감동글

산나물 –노천명-좋은수필

수성구 2022. 3. 4. 04:22

산나물 –노천명-좋은수필

 

먼지가 많은 큰길을 피해 골목으로 든다는 것이, 걷다보니 부평동 장거리로 들어섰다.

유달리 끈기 있게 달려드는 여기 장사꾼 ‘아주마시’들이 으레 또, “콩나물 좀 사보이소. 예!

아주머니요! 깨소금 좀 팔아 주이소.” 하고 당장 잡아당길 것이 뻔한지라, 나는 장사꾼들을 피해

빨리빨리 달아나듯이 걷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은 역시 하나하나 장에 난 물건들을 놓치지 않고 눈을 주며 지나는 것이었다.

한 군데에 이르자 여기서도 또한 얼른 눈을 떼려던 나는, 내 눈이 어떤 아주머니 보자기 위에 가 붙어서

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보자기에는 산나물이 쌓여 있었다. 순진한 시골 처녀모양,

장돌뱅이 같은 콩나물이며 두부, 시금치 틈에서 수줍은 듯이, 그러나 싱싱하게 쌓여 있는 것이었다.

 

얼른 나는 엄방지고 먹음직스러운 접중화를 알아봤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산나물을 또 볼 수 있었다.

고향 사람을 만난 때처럼 반가웠다.

원추리, 접중화는 무덤들이 있는 언저리에 많이 나는 법이다.

 

봄이 되면 할미꽃이 제일 먼저 피는데, 이것도 또한 웬일인지 무덤들 옆에서만 잘 발견되는 것이다.

바구니를 가지고 산으로 나물을 하러 가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일이다.

예쁜이, 섭섭이, 확실이, 넷째 들은 모두 다 내 나물 동무들이다. 활나물, 고사리 같은 것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만 꺾을 수가 있었다.

뱀이 무섭다고 하는 나한테 ‘섭섭이’는 부지런히 취순을 꺾어서 내 머리에다 꽂아 주며 이것을 꽂고 다니면

뱀이 못 달려든다는 거시었다. 산나물을 하러 가서는 산나물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산 저 산으로 뛰어다니며 뻐꾸기를 잡고, 싱아를 캐고, 심지어는 칡뿌리를 캐서

그 자리에서 먹는 맛이란 또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꿩이 푸드덕 날면 깜짝 놀라곤 하는 것이다.

 

내가 산나물을 뜯던 그 그리운 고향엔 언제나 가게 되려는 것이냐?

고향을 떠난 지 30년, 나는 늘 내 어린 기억에 남는 고향이 그립고, 오늘같이 이런 산나물을 대하는 날은

고향 냄새가 물큰 내 마음을 찔러 어쩔 수 없게 만들어 놓는다.

산나물이 이렇게 날 양이면, 봄은 벌써 제법 무르익었다.

냉이나 소루쟁이니, 달래는 그러고 보면 한물 꺾인 때다.

산나물을 보는 순간, 나는 이것을 사가지고 오려고 나물을 가진 아주머니 앞으로 오락 다가서다가,

그만 또 슬며시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각을 해보니, 산나물은 맛이 있는 고추장에다 참기름을 치고 무쳐야만 여기다 밥을 비벼서

맛도 있고 한 것인데, 내 집에는 고추장이 없다.

그야, 나는 친구 집에서 한 보시기쯤 얻어올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고추장을 얻어다 나물을 무쳐서야

그게 무슨 맛이 나랴?

나는 역시 싱겁게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진달래도 아직 꺾어보지 못한 채 봄은 환연히 왔는데, 내 마음속 골짜기에는 아직도 얼음이 안 녹았다.

그래서 내 심경는 여지껏 춥고 방안에서 밖엘 나가고 싶지가 않은 상태에서 모두가 을씨년스럽다.

시골 두메촌에서 어머니를 따라 달구지를 타고, 이삿짐을 싣고 서울로 올라오던 그때부터 나는 이미 ‘

에덴’ 동산에서는 내쫓긴 것이었다.

 

그리고 칡순을 머리에다 안 꽂고 다닌 탓인가.

뱀은 내게 달려들어 숱한 나쁜 지혜를 넣어주었다.

10년 전 같으면 고사포를 들이댔을 미운 사람을 보고도 이제는 곧잘 웃고 흔연스럽게 대해줄 때가 있어,

내 그 순간을 지내 놓고는 아찔해지거니와, 풍우난설의 세월과 함께 내게도 꽤 때가 앉았다.

심산 속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연의 품에서 그대로 펴진 대로 펴지고 자랄 대로 자란 싱싱하고

향기로운 이 산나물 같은 맛이 사람에게도 있는 법이건만, 좀체 순수한 산나물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요새 세상엔 힘 드는 노릇 같다.

산나물 같은 사람 어디 있을까?

모두가 억세고, 꾸부러지고, 벌레가 먹고,

어떤 자는 가시까지 돋혀 있다.

어디 산나물 같은 사람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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