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수성구 2022. 2. 2. 04:42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말라 3,1-4; 루카 2,22-40  

2022.2.2.; 주님 봉헌 축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서원 미사; 이기우 신부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교회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후 사십 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정한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신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께서는(레위 12,1-8), 아브라함 이래 지켜온 관습과(창세 22,1-18) 모세가 정한 대로(탈출 13,2) 첫 아기인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때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가난해서 비둘기 한 쌍만을 예물로 바쳤으나, 사실은 평생동정의 허원도 바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출가하신 후에 당신 대신 어머니를 봉양해 드린 친척 형제들이 있기는 했으나 친동생은 없었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연로하신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겨드려야 했습니다. 신성의 차원에서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로서 동정의 몸이었던 마리아께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고 또한 인성의 차원에서도 구세주께서 태어나시리라고 예언된 바 있었던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으므로,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구세주에 걸맞는 품위와 품격으로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평생동정이라는 귀하디 귀한 봉헌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바친 비둘기 한 쌍과 평생동정이라는 봉헌을 본받기 위해 초를 봉헌합니다. 

 

  초는 자기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자신을 봉헌하는 뜻으로 초를 봉헌하는 주님 봉헌 축일의 백미는 수도자들의 서원 예절입니다. 수도자들의 삼대 서원은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온전히 자기자신을 봉헌하기 위한 복음삼덕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도자들의 서원 예절을 보면서 예수님의 삶과 신앙과 진리가 복음삼덕에 녹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고, 이를 믿고 따르려는 교회의 신앙은 공동체를 위한 십자가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교회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를 수 없거니와, 공동체가 아닌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에서는 십자가가 생겨날 수도 없고 생겨난다고 해도 피하면 그만입니다. 또한 부활 신앙이 아닌 그 어떤 다른 목표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목표가 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이야말로 이미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부활의 삶인 까닭입니다. 

 

  오늘 수도자로서 첫 서원을 발하는 수련 수녀들은 복음삼덕에 따라 정결과 청빈과 순명의 서원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라는 구체적인 수도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께 봉헌하게 됩니다. 첫 서원을 발함으로써 여러분은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십자가의 고통도 받겠지만 부활의 기쁨도 아울러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미래에 주어질, 그래서 막연한 부활의 희망으로 힘겹게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현재 부활의 기쁨으로 지금 여기서부터 가벼운 짐으로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30). 이 말씀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군중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특히 당신을 직접 닮고자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더욱 적중하는 말씀이고, 오늘 복음삼덕의 서원을 하는 수련 수녀들과 이미 서원한 수도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언젠가 주어질지 안 주어질지 모르는 미래의 부활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여기서 먼저 주어지는 부활의 기운으로라야 능히 짊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정결의 서원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처럼 평생동정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성적 본능을 포기하고, 배우자 관계가 주는 평생의 위안도 포기하며, 자신을 닮은 자식을 두지 않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대신에, 같은 수도 공동체의 회원들을 평생의 형제로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따라서 수도 공동체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시련은 형제애를 발휘함으로써만 이겨낼 수 있을 것이요, 형제애로써가 아니라면 이겨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물론 형제애가 충만한 공동체에서라면 수도생활은 이미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의 진복팔단을 가득히 누리는 은총이 될 것입니다. 부부생활과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의 삼중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평신도들은 형제애가 충만한 수도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수도자들을 통해서 부활의 희망과 천국의 기쁨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혼인하지 않고도 기쁘게 살아가는 수도생활은 서원한 수도자들의 신앙적 의무입니다. 

 

 두 번째로, 청빈의 서원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비둘기 한 쌍을 봉헌 예물로 바친 것처럼 가난한 생활을 자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보통의 유다인 부부들은 일 년된 양이나 염소를 바치곤 했습니다(레위 1,10). 빈손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탈출 23,15; 34,20; 집회 35,6). 인간은 누구나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면서 복지를 누릴 권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제한당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역사 이래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최소한도의 물질만으로 소유하거나 사용하면서 더 필요한 이들에게 그 복지가 돌아가도록 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청빈의 서원은 단지 검소한 생활만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연대해야 할 의무도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도 가난하게 사셨으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행한 행동 여하에 따라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모든 재물과 나눔의 노력은 그래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도록 하느님께서 섭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행하는 봉헌과 나눔의 노력으로도 세상의 가난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역사의 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허용된 재물로, 우리에게 허용된 인생의 시간에 가능한 한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세상에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어려움이 덜어질 수는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큰 범위에서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요청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정치적 애덕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거듭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청빈의 서원은 건전한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반드시 요청합니다. 

 

  세 번째로 순명의 서원은 요셉과 마리아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전갈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태도에 기인합니다. 마리아는 아직 동정의 몸이었지만 구세주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전갈을 듣고 나서,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주소서”(루카 1,38) 하고 순명하였으며, 요셉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파혼할 결심을 굳혔으나 잠자리에 찾아온 천사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내로 맞아들이라”(마태 1,20)는 말에 순명하고 평생 마리아와 예수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부모의 이런 영성은 아들 예수에게도 고스란히 대물림되었고,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로써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지니시게 된 후부터는 더욱 철저해져서 하느님과 한 몸처럼 공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만을 전했고, 그분의 힘으로만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그분의 섭리대로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이 순명의 서원은 예수님의 부모와 그분을 더욱 닮기 위하여, 앞선 두 가지 서원을 담보하고 공동체의 복음적 질서와 부활 신앙을 앞당기는 교회적 질서를 위해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공동체와 부활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명의 대상인 장상은 개인이 아니며 공동체 질서의 권위를 대변하는 존재인 것이며, 공동체 질서는 하느님의 영광과 뜻을 향해 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장상은 자신의 취향이나 권한이나 관심에 앞서서 하느님의 뜻은 물론, 공동체의 필요와 사명과 질서를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묻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로 응답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발하는 장상의 의견은 공동체의 의견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기꺼이 그에 대해 순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가톨릭 윤리신학에서는 자유의 윤리라고 말합니다. 무릇 모든 자유는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책임이란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기 위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물론 당신 자신도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신 이유도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순명은 복종이 아니며 순명 서원은 자유에의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삼년 동안 사도로 양성하시고 당신 자신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내주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교회는 숱한 시행착오와 깊은 사색과 숙고를 되풀이하여 그분을 따르는 길을 복음삼덕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세에서는 박해를 방불케 할 만큼 커다란 십자가이지만, 이미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하는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복음삼덕의 삶은 성직자에게든 평신도에게든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나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아가거나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나, 공동체의 삶이면서 부활의 삶으로 인식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와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누구의 배우자이거나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면서 모두를 사랑하고자 끌어안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고,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될 수 있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이며, 철저하게 장상의 결정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철저하게 하느님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와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