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 : 다해 - 하느님의 말씀 주일 (일치 주간)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3주일 : 다해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말씀을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 실천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구원적 삶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나에게 있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서는 에즈라가 바빌론 귀양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의 말씀, 법은 공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어서고, 손을 쳐들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아멘’ ‘아멘’ 하며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여’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주일 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은 에즈라로부터 하느님의 법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느헤미야 8,9)고 한다. 즉 ‘하느님의 법’을 듣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회개’를 일으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후회와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게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들음으로써 공동체가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확실한 신앙으로 전달되지 못했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복음: 루카 1,1-4; 4,14-2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서문(1,1-4)과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에 나자렛 회당에서 있었던 일(4,14-21)로 되어있다. 그러나 복음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신앙심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예를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은총의 말씀’(22절)에 놀라면서도 그분 앞에서 취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외적인 것, 예를 들면 ‘요셉의 아들’(22절)이라는 것보다 그분 안에 있는 그 이상의 어떤 사실을 알아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사가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전하고 해석하면서 독자들을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 혹은 그 어머니를 아는 것으로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신앙이다. 이것을 복음사가는 의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읽으신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이 내용은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는 해방과 하느님 구원의 약속을 전한 내용으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성서를 읽으시고 자리에 앉으시어 그 내용을 설명하시는 말씀에서 제기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 말씀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 예언의 말씀이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인 ‘요셉의 아들’인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언자의 메시아 활동이 바로 그 순간 즉 ‘오늘’ 이루어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써 가르치시고 구원업적을 이루신다. 예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해방이다. 그 해방은 모든 악으로부터의 해방, 육체적, 영적 시력상실로부터의 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 죄악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즉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져오신 분이다. 그분은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구원자로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신앙으로서만 가능하다. 나자렛의 한 목수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러기에 그 옛날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이 ‘규범’, ‘법’이 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 ‘오늘’은 매일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성경 말씀을 당신의 가르치심과 행동으로 이루셨다. 그럼으로써 이사야를 만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처럼 “이 성경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었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을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거니는, 여정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인체를 들어 설명하면서 각자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지체는 서로가 조화를 이루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올바로 성장할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몸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로서 제 일에 충실하며 지체 간에 진정한 일치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우리 사이에 서로 불화를 야기하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옛날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그 형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을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말씀 앞에 그 말씀이 “오늘”, “여기서” 나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말씀이 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삶은 올바른 성사 생활, 또 전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도록 해야 하는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규범’인 삶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한 몸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성찰해 보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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