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7,24-30: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다음에 요한을 높이 평가하시며 칭찬하신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려 광야로 몰려갔다.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4절) 물으신다. 그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었다. 주님은 세상을 불모지 광야로 비유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의 무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보러 나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흔들리는 갈대란 변하기 쉬운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에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고 흔들리는 생각을 하는 인물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여자와 같은 사람, 비단옷을 입은 왕궁의 궁인들과 같은 사람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러 건 사람은 바로 심지가 굳은 요한 세례자였다. 이 요한을 예수께서는 칭찬하신다. “예언자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26절),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28절) 하신다. 어떻게 요한은 모든 예언자보다 큰 인물일 수 있을까? 예수님도 예언자이심을 우리가 알고 있다.
주님은 모세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신명 18, 15.18)이라 말하고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나갈 것”(사도 3,23)이라고 한 그 예언자보다 위대하신 분이시다. 여기서 주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시다. 자기와 태생 조건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본성이 다른 분과 인간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느님과 인간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요한을 하느님과 견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여간 그들이 보러 나간 것은 예언자이며 성인이다.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분이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라고 한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해 그분에 앞서 올 분이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28절) 어째서 그런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세례자 요한은 그에 앞서 태어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더는 여인의 자식으로 불리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요한 1,12)라 불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와 여인의 자식의 차이이다.
지금 내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의 위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나의 삶 속에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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