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수성구 2021. 11. 13. 06:10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지혜 18,14-16; 19,6-9; 루카 18,1-8 

20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인 지혜서에서 창조 이래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이전까지 에덴 동산과 가나안과 이집트에서 진행되었던 역사를 서사적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이렇습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4). 그리고 모세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모으시고자 이집트를 상대로 전격적으로 일어났던 해방의 역사에 대해서는 말씀을 의인화하여 이렇게 묘사됩니다: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으로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지혜 18,16; 19,6-8). 

 

이집트에서 억압을 받으며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던 히브리 노예들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까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역동적인 기적이 이러했습니다. 그 천 년이 넘게 흐른 뒤에 예수님께서는 지리멸렬해 진 이 백성을 새로이 열두 제자 체제로 재편성하셨고, 서로 사랑하라는 복음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을 상기시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회를 ‘공동체’로 인식하고 인류도 인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러 모으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형제애는 공동체라는 생활양식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향후 교회의 선교활동 역시 “서로 사랑하라”는 단호한 명령으로 말씀의 지혜가 이끄시는 역동적인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의회가 열리기 2백여 년 전부터 교우촌이라고 불렀던 신앙 공동체를 세워 백 년의 박해를 이겨낸 우리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한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파스카의 길을 가고자 할 때에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말씀과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을 불러 모으시는 자리도 결국은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반어법적으로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것도 결국, 공동체를 통해 역동적인 기적을 이루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