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시와 좋은 글

해 뜨는 집

수성구 2021. 2. 19. 03:02

해 뜨는 집

 

♱해 뜨는 집

(에티오피아의 모든 아침은 집집마다

향기 그윽한 '분나 세레모니'로 시작된다.)

 

아들아 일어나렴, 춥고 긴 밤이 지났다

눈이 가문 할머니를 울타리 밖 화장실로 안내하렴

 

딸아 한 줌의 물로 네 얼굴과 흰 이를 빛내렴

잠에서 깨어 우는 아이는 꼬옥 안아주고 담요 곁의

 

어린 양도 밤새 추웠으니 쓰다듬어 주렴

병아리들에게는 밀 이삭을 주고 당나귀에게는

 

마른 풀을 주렴 둘째는 모래바람이 놀다간

흙마당을 쓸고 동생들의 단추를 가지런히 채워주렴

 

저 멀리 시미엔 산맥 위로 여명이 밝아오고 잠시 후

나일 강에 아침 해가 떠오를 것이다 이제 되었다

 

우리 모두 불이 있는 흙바닥 거실로 모이자

어제 셋째와 넷째는 하루 종일 맨발로 산비탈을 걸어

이 귀한 나뭇단을 이고 왔단다

 

불을 지폈으니 우리 둥그렇게 몸을 쪼이자

할머니가 볶은 보리를 한 줌씩 나눠주시는구나

자 지금부터 분나 세레모니가 시작된다

 

큰딸아 너는 엄마 손을 잘 보아두거라

먼저 불 위에 둥근 쇠판을 얹어 달구어야지

그 위에 맑게 씻은 연노랑 분나 콩을 한 줌 얹고서

섬세한 손길로 고루 저어 볶아야 한다

 

콩 빛이 초콜릿 빛 네 피부처럼 고와질 때쯤 지금이다

오래된 나무절구에 볶은 콩을 넣고 빻아야지

부드러운 리듬으로 네 심장의 리듬으로

오 이 순간 살며시 눈을 감아라 쌉사름하고

신비로운 분나 향이 피어오르잖니

 

이제 주전자에 분나 가루를 넣고 끓일 때다

너무 끓어 넘치지도 않게 너무 불어 진하지도 않게

분나 향이 그윽할 때를 조율해야 한단다

 

여기 자그맣고 하얀 아홉 개의 잔이 준비되었다

하나의 빈 잔은 어디론지 모르게 집 나가서

여태 소식도 없는 무정한 아빠의 잔이란다

 

자 따끈한 분나를 한 모금 마셔라 대지에

아침 해가 떠오르면 또 하루가 탄생하듯

분나가 네 몸에 흘러 들어가면 새로운 날의 네가 깨어난단다

 

첫 번째 잔을 마시자 첫 번째 잔은 우애의 잔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두 번째 분나가 끓는구나 두 번째 잔은 평화의 잔이다

 

부귀를 탐하려면 친구를 이겨라 평화를 구하려면

친구를 도와라 마지막 잔이 끓는구나

 

세 번째 잔은 축복의 잔이다 승리를 바라거든

주먹을 쥐어라 축복을 바라거든 손을 맞잡아라

 

마지막 잔을 들었으니 서로 포옹을 하고 우리 각자의

일터로 나가자

첫째는 어린 양이 벼랑에 떨어지지 않게 돌보거나

둘째는 먼 우물터에서 물을 길어와 항아리에 채우고 빨래를 하거라

셋째는 테프를 말리고 남은 사탕수수를 거두어라

넷째는 오늘 할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돌보거나

맨발의 아이들이 맘 아픈 스물세 살 어머니는 재를

다독여 불씨를 간직하고 잔을 씻어 정리한 뒤

당나귀 등에 테프 한 말을 싣고 50리 장터를 향해

해 뜨는 시미엔 산맥을 넘어 아침 길을 나선다

 

-『박노해(朴勞解) 가스파르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