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묵상글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눈에 보일 때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수성구 2021. 2. 14. 02:51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눈에 보일 때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눈에 보일 때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나라 의료기술도 참으로 많이 발전한 듯, 가끔 좋은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임신 25주에 출산한 380g 초극소 미숙아가 건강하게 자란다거나 최단 임신기간 출산 기록인 22주 530g의 아기도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퇴원했다는 소식이다.
현실에서 그럴 리는 없지만, 만일 22주에 조산한 아기가 장애인이 될 우려가 있거나 키우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부모와 의사가 합의해서 조산아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 형법의 살인죄(과실치사가 아님)로 구속되고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22주의 아기를 유도분만으로 낙태한 의사나 부모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아무 일도 없다. 적발된 적도 없으니, 처벌된 적도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죽이면 안 되고, 죽여도 되는 기준이 무엇인가?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다. 눈에 보이면 못 죽이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개인의 안위와 편의를 위해서 죽이기도 한다.


“태아에게 장애가 예상되어 낙태하고 싶어요.”라고 낙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아기 본인이나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낙태를 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눈에 보이는 장애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장애인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일까? 똑같은 논리라면 사회의 불행 요소인 장애인을 제거해야 마땅한가?


당연히 눈에 보이는 장애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인은 제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것이 쉽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만 것이다.


장애는 분명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불편이 곧 불행은 아니거늘, 내 주변의 모든 불편 요소를 제거하면 세상은 행복해질까? 고통이나 불편은 인간 존재의 삶의 한 부분으로 항상 있다. 고통이 있기에 고통이 사라진 기쁨도 아는 것이고, 불편이 있기에 사랑과 희생이 필요하다.


만일 ‘상대적 불편 요소’를 제거하는 식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이 세상은 여전히 우생학적 인종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로, 열등하고 불편한 요소를 지닌 인간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역시 후대를 위해 지금의 열등한 나의 존재마저 부정할 수 있는가. 상황에 따라, 눈에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 우리의 판단을 달리하는 잣대가 여전히 마음속에 있다.

 

2020년 전 세계 사망 원인 1위는 눈에 보이는 180만여 명의 사망자를 낸 코로나19만이 아닌, 4200만 건의 눈에 보이지 않은 태아들의 낙태였다는 사실도 이제는 알아야 하겠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2021. 1. 24(나해)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대전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