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3월 15일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
St. Louise de Marillac
Santa Luisa de Marillac Vedova e religiosa
15 August 1591 at Meux, France -
15 March 1660 at Paris, France of natural causes; body incorrupt
Beatified : 9 May 1920 by Pope Benedict XV
Canonized : 11 March 1934 by Pope Pius XI
크리스찬 사회사업가들의 주보 성녀.
성 루이즈 드 마리약은 1591년 8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한 정치가들을 탄생시킨 귀족 드 마리약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푸이시에 있는 수도원에 맡겨져 교육을 받으며 자란 루이즈는 1613년
본래 수도자로 살고 싶어하며 결혼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거절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청원서 심의관 앙투안 드 그라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후에도 영적독서로 영성을 성화시켜 나갔고 부르심을 받고도
부름심을 따르지 않았던 괴로움에 어두운 밤과 같은 영적인 시련을 거쳐야 했다.
1623년 성 니콜라스 성당의 성령 강림절 미사에서 루이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의 순간을 체험했다.
그날 자신의 모든 이기적인 야심과 인간적인 계획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1624년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만난 루이즈는 1625년 남편 앙트안이 세상을 떠나자,
남은 생애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만 모두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후 루이즈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도와 1633년 가난한 이들의 종이라 불리우는
지금의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였다.
1660년 3월 15일 69세를 일기로 자신과 함께 사도직을 수행했던 자매들과 협력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 그녀는
1934년 3월 11일 성인품에 오르셨고 1960년 2월 16일에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모든 크리스챤 사회사업가들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홈에서)
그녀의 임종 때, 프랑스 내에는 이미 4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돕는 구호소는 수 없이 많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이는 곧 그리스도이시니..."
1617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샤티옹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애덕부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어느날, 평소대로 빈첸시오는 미사를 집전하기위해 제의를 입고 있을 때,
한 부인이 외딴 집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의 처참한 환경에 대해 말하였다.
전 식구가 다 아파 몸져 누워있으나 그들을 돌봐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빈첸시오는 측은함이 넘친 강론을 하여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사후, 빈첸시오는 그 외딴집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가는도중,
빵과 약품 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하루에 그 집을 방문하고 그 다음날에는 전혀 방문하는 이들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조직적인 봉사단체가 필요함을 깨달았고,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위하여 애덕부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렇게 창설된 애덕부인회는 프랑스 전체로 그 조직이 커 나갔다.
귀족 부인들로 구성된 애덕부인회는 본당이나 마을에 가난하고 병든 환자들을 방문하여 돌보았고,
자선병원 등에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애덕의 마음은 넘쳤으나, 그들의 대부분이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활동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아, 때때로 그들은 자신들의 하녀들에게 대신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애덕부인회는 증가했으며 빈첸시오는 루이즈 드 마리약에게
애덕부인회를 맡기며 하느님의 다른 뜻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중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봉사하고 싶다는 원의를 품은 한 양치기 소녀가 빈첸시오를 찾았다.
빈첸시오는 말가릿 나조와 같은 지향을 갖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하는 자매들을 모아
루이즈에게 맡겼다.
1633년 11월 29일. 6명의 처녀들이 성 루이즈 드 마리약에게 맡겨졌으며
이로써 최초의 활동회인 사랑의 딸회를 창설되었다.
그당시, 교회에서는 수녀들이 수녀원 담밖을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실질적인 활동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빈첸시오는 수도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의 딸회라 이름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는 1655년 파리 대주교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1668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로마에서 승인되었다.
성 빈첸시오는 사랑의 딸회 창설 당시부터 1625년에 창설한 빈첸시안 선교회 (라자리스트회)
총장신부에게 사랑의 딸회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성 루이즈 드 마리약이 본회의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청한 것이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홈에서)
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이하)’는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에 놓인 이웃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못 본 척 외면하는 사람. 동정심은 지니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
그들의 무능을 내심 질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돌보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다.
성 빈체신오 아 바울로(1581-1660)는 ’애덕부인회(1617)’, ’선교회(라자리시트회.1625)’,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1963)’을 설립하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된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들의 주인"이라며 스스로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청했다.
빈첸시오는 1581년 프랑스랑드 지방의 푸이에서 검소하고 성실한 가정의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배웠다.
가난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가정교사로 일해 스스로 학비를 벌었던 그는 19살 때 사제로 서품된다.
그러나 그는 서품 5년째인 1605년 마르셀리나로 여행을 하는 도중 터키의 해적을 만나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빈첸시오는 연금술사로부터 병을 고치는 법과 화학,물리학 등을 배웠는데
이는 나중에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데 요긴하게 쓰여졌다.
그 후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나 냉담하고 있던 농부를 회두시킨 그는 농부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훗날 그 농부도 로마의 한수도원에 입회했다.
빈첸시오는 가난하게 컸고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 내적 갈등도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피에르 베륄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이들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께 봉사하겠다고 서약하기에 이른다.
1617년 빈첸시오는 병들고 불쌍한 이들을 돌볼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평신도 여성들의 봉사 단체인 ’애덕부인회’를 만들었다.
40세가 됐을 때는 노예들을 찾아가 돌봤으며, 활동의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해
1625년 남자 수도회인 ’선교회’를 창설했다.
이어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을 받아 1633년 ’가난한 이들의 종의 회’라고도 알려진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사랑의 딸회’를 청설했다.
빈첸시오의 협조자가 된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1591-1660)은
어릴 적부터 수도자가 되고 싶었던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앙뜨완과 결혼, 아들 한명을 낳았다.
남편이 일찍 세상으 떠난 다음 그녀는 빈첸시오가 일하고 있던 ’착한 어린이들의 학교’근처에서 살며
경건한 생활을 했다.
루이즈는 빈첸시오와 만나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이 가져온 내면적 어둠을 이웃에 대한 봉사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즈가 빈첸시오 모르게 받아적었던 훈화는
빈첸시오가 수녀들에게 직접 썼던 방대한 양의 편지와 함께 그의 영성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빈첸시오는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많은 여자 수도회가 봉쇄 구역 안에서 페쇄적인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랑의 딸들은 병자들의 집과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며 셋방이 수녀들의 독방이다.
성당은 본당 성당을 사용하고, 도시의 거리가 바로 봉쇄 구역이며,
병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빈첸시오에게 기도는 필수적이었고 그는 수녀들에게도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것을 누누히 강조했다.
세속에서 일하는 수도자들은 봉쇄 생활을 하는 수도자보다 죄지을 기회를 더 많이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빈첸시오는 또 수녀들이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내 모든 자매가 어디에 있든간에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Incorrupt body of Saint Louise de Marillac.
Picture taken April 20, 2001, by Joann.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육화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겼다.
그는 주인이 불렀을 때 즉시 달려가는 착한 종처럼,
하느님이 불렀을 때 즉각적으로 순명한 옛 예언자들처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가는 모습은
마치 불이 났을 때 달려 가는 사람과 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집, 자기의 가장 소중한 물건에 불이 붙어 사랑스런 가족을 위협하고 있을 때 취할 행동,
바로 그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태도여야 한다는 것이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가족
루이즈 드 마리약은 매우 바쁜 여성이었다.
그는 성 빈첸시오 드 폴과 함께 ‘애덕의 수녀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요한 23세 교황은 그 공을 받들어 그를 사회사업가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하였다.
루이즈는 어린 시절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일생을 수녀원에서 보낸 ‘전형적인’ 수녀는 아니었다.
그는 남편이 죽기 전까지 12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고,
외아들 미셀을 낳았으며 언제나 그를 마음에 두고 살았다.
그의 자서전에는 “수도 생활을 하며 온갖 일을 다하는 중에도 결코 아들을 잊지 않았다.”라고 씌어 있다.
루이즈는 아들이 장성한 후에도 결코 그를 홀로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아들을 마음에 가까이 두었고 임종 순간에도 마지막으로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축복했다.
우리가 아무리 생활에 쫓긴다고 하더라도 루이즈의 모범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일을 하는 데 바쁘더라도
우리 자신이 가족의 축복이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족 중에 소홀히 대한 사람은 없었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야기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축일;9월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St.VINCENT de Paul
San Vincenzo de’ Paoli Sacerdote
자선단체의 수호성인.
인창동성당게시판1387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고 눈 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하여(루가4,18) 파견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방하고 그분의 사명을 계속하신 성 빈센트 드 뽈 (St.Vincent de Paul)과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St.Louise de Marillac)의 정신과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교적 자비의 실천으로 이 사명에 참여 하고자 한계를 모르는 하느님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자비의 수녀회로 설립되었습니다.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홈에서)
오, 구세주여,
당신은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적인 방법으로도 이 계명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모든 의미인 그런 신분으로,
거기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끊임없는 요구들을 내포하는
그런 소명으로 저를 불러 주셨으니 영원히 감사드릴 일입니다.
저에게 은총을 주시어 우리 공동체가 이웃을 섬기기를 일삼는 데에,
우리 누구나가 역경에 처한 이웃의 외침을 들으면
곧장 하던일을 팽개치고 나서는 데에 더불어 이바지하게 하소서.
*성 빈센트의 기도*
축일:11월28일
침묵의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
ST. CATHERINE LABOURE
Santa Caterina Laboure
인창동성당게시판1495번
메달앞면 :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메달뒷면 : 십자가, "M"문자와 사랑의 심볼인 2개의 심장,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의 심볼인 열 두개의 별
프랑스 파리 뤼드박에 있는 ’사랑의 딸회’ 모원 ’기적의 메달 성당’ 입구에 있는 상으로
성모님과 대화하는 성 가타리나 라보레의 모습입니다.(성모님의 첫번째 발현모습)
성 가타리나 라보레는 1806년 5월 2일 프랑스 볼르강디 지방 한 농가의 10남매중 여덟 번 째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윈 그녀는 가사일을 도우며 어린 시절부터 새벽미사를 다니며 신앙심을 다졌다.
어느날 그녀는 "성모님, 이제부터는 당신이 제 어머니이십니다"라고 말한 이후로
성모께 대한 사랑과 꼭 한번 성모님을 뵙고 싶다는 강한 원의을 갖기 시작했다.
그후 가타리나는 마침내 사랑의 딸회에 입회,
다른 수련자들과 함께 수녀 수업에 힘쓰며 성모님을 뵙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은
기도할 때나 일을 할 때나 더욱 강해져 갔다.
1830년 7월 18일 밤 잠을 깨운 수호천사를 따라 그녀는 성당으로 인도되어 그 곳에서 성모님 을 뵙게 되었다.
성모님 발현후 가타리나는 오직 고해 신부님께 말씀드렸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수련기를 마친 그녀는 파견되어 성모님 발현의 비밀을 지킨 채
45년간의 생애를 기도 속에서 기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바쳤다.
특히 파리 교외의 Enghien에 수용된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임종하기 얼마전 가타리나는 45년동안 지켜온 비밀을 원장 수녀님에게 말씀드리고
1876년 12월 31일 70세의 일기로 평화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1907년에 시복을 위한 심리가 시작되었고 1933년에 그녀의 무덤을 개봉하기에 이르렀다.
5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옷과 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성모님의 무릎??오랫동안 놓여졌던 손은 더더욱 그랬다.
1947년 7월 27일 로마에서 성인품을 받게 되었고,
교황 비오 12세는 성 가타리나 라보레를 ’침묵의 성녀’라고 부르셨다.
성녀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셨기 때문에 시성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종으로서 매일 깊은 신앙 안에서 성모님의 표양을 따라 겸손하게 사신
그분의 삶이 성녀로 만든 것이다.
프랑스 뤼드박의 수녀원 모원 성당은 1830년 ’기적의 메달’을 전파하게 한 성모 발현지로서
’기적의 메달 성당’으로 잘 알려져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홈에서)
축일:1월 4일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
St.e.ann seton
St. Elisabeth Ann Seton
인창동성당게시판1551번.
■ 마더씨튼 영성
"겸양·소박·사랑 그리고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사랑의 씨튼 수녀회 영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랑의 씨튼 수녀들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깊이 있는 기도생활을 통해 부드럽고 쾌활한 가정적
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겸양·소박·사랑으로 활동하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는 생활을 하고자 한다.
특히 창설자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이 성 빈첸시오의 정신을 19세기 미국 교회에 토착화하였듯이,
본 회원들 역시 성녀의 영성을 한국 땅에 토착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오늘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민감히 듣고 분별하여 융통성을 가지고 현대 교회의 필요에
응답하고자 하며, 여러 면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다.
사랑으로 깊이 결속된 사랑의 씨튼 수녀들은 오늘도 기도와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하느님과 그 나라를 증거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랑의 씨튼 수녀회홈에서)
축일:9월8일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
Blessed Frederic Ozanam
Beato Federico Ozanam
인창동성당게시판1356번
앙토안느-프레드릭 오자남 (Antonie-Fredric Ozanam)은 1813년 4월 23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리용 출신인 그의 부모님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임시로 밀라노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오자남의 가족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사회적 불의와 무거운 고통의 짐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도록 교육하였다.
오자남은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영민하고 통찰력이 깊은 그는 흔히 철학 초보자들이 겪는
일종의 불신과 회의론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탁월한 철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노아로 신부 (Fa ther Noirot)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아로 신부는 오자남의 카톨릭 신앙을 확고히 다져 준 분이었다.
지식과 성덕을 겸비한 성인 사제 노아로 신부를 ’영혼의 탁월한 교육자’라고 불렀다.
이렇게 청년기의 위기를 벗어난 오자남은 열린 정신의 신앙인으로 성숙해 갔다.
그의 신앙은 진리의 원천에서 물을 마실 수 없는 불안한 영혼들을 도와주고 싶은 불타는 열정으로 나타났다.
오자남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도와주는 일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이 목표에 충실하였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The Society of St. Vincent de Paul)
1833년에 프레드릭 오자남에 의해 파리에서 창설된 국제적인 가톨릭 평신도 단체 이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며, 고통받고 있는 모든이들을 돕기 위해 정의와 사랑을 추구한다.
이것은 각 회원들의 직접적인 봉사로 행해진다.
평신도들의 형제, 자매적 단체로서 회원들은 곤경에 처해 있는 자기 이웃안에서 하느님을 섬김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한다.
131개국에 590.000명 (파리 세계 총 이사회 2001년 9월말 에 달하는 남녀회원으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체이며 회원들은 매주 시간을 할애 하여
이웃을 도움으로서 주님의 증인이 되고 있다.본회는 교황청의 인가와 교권으로서 운영한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홈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참아주어라.
또한 그들에게 자선을 하면서 미루지 말아라.
계명대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궁핍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아라.
형제나 친구를 위해서라면 손해를 봐도 좋다.
돈을 돌밑에 두어 썩혀 버리는 것보다
형제나 친구를 위하여 손해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명령대로 네 재물을 써라.
그것이 황금보다도 너에게 더 유익하리라.
네 곳간을 적선으로 채워라.
그러면 네가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리라.
그것이 방패나 창보다도 더 강한 무기가 되어,
네가 원수와 싸울 때 네 편에서 서 주리라.(집회 29, 8-13)
축일:3월15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St. Clemens Hofbauer, C
St. CLEMENT MARY HOFBAUER
San Clemente Maria Hofbauer
26 December 1751 at Tasswitz, Moravia as John Dvorak
- 15 March 1820 at Vienna, Austria of natural causes
Beatified:29 January 1888 by Pope Leo XIII
Canonized:1909 by Pope Pius X
Patronage:Vienna Austria (named by Pope Pius X in 1914)
Clemente =indulgente, generous
클레멘스 마리아 홉바우어는 1751년 12월 26일 모라비아의 타스비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빵공장에서 일하였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가능한 한 한 많은 시간을 내어 학업을 계속하였다.
로마에서 구속주회에 입회하였고 사제로 서품된 후 바르샤바로 갔다.
거기에서 폴란드 내의 첫 번째 구속주회 공동체인 ’성 베노’를 열고 매우 풍성한 사도적 결실을 거두었다.
후에 많은 이들의 박해로 비엔나로 옮겼고 거기에서 20여년을 일하고 1820년 3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전구를 통해서 기적적인 은총을 받았으며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구속주회홈에서)
모라비아의 타쓰비츠 태생인 체코 사람으로 그의 본명은 얀 드르략인데 독일 이름인 흡바우어로 개명하였다.
그는 푸주간의 아홉째 아들인데, 어려서 부터 빵굽는 기술을 배웠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항상 은수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으며,
얼마동안은 로마와 비엔나 사이를 오가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브룩크에서 프레콩트레 수도원의
빵굽는 데서 일하였으며, 마침내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요셉 2세 황제가 은수소들을 폐쇄하였을 때, 그는 비엔나로 돌아와서 빵굽는 사람이 되었으나,
친구인 베드로 쿤즈만과 함께 티볼리의 주교 키아라몬띠의 승락을 받고 재차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비엔나와 로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속죄회에 입회하여, 178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비엔나로 파견되었으나 황제가 많은 수도회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속죄회 수도원 건립이 불가능하게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옛 친구인 쿤즈만을 만나 평수사로 입회시켰다.
그러나 교황 대사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바르사바로 갔으며,
그곳에서 20여 년 간 선교활동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클레멘스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속죄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기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끝내 비엔나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의 이탈리아 구역에서 일하였으며,
울술라회의 지도신부로도 활약하면서 부터는, 그의 설교와 성덕, 그리고 지혜와
고해신부로서의 이해심 등이 높은 명성을 얻게 하였다.
그는 비엔나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였고, 독일 지역의 수도생활 재생을 위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클레멘스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하였다. 그는 1909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요셉주의 Josephinism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재위: 1741∼1790)의 종교정책으로,
그에 따르면 국가는 교회에 대한 간섭권, 우위권을 갖는다고 한다.
황제는 교회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하고,
교회에 바쳐지는 모든 기금을 종교기금 (Religions fund)에 통합시켜 공공의 종교활동비에 충당하려 하였다.
목적달성을 위해 황제는 모든 수도원을 해산시켰고, 이를 세속용으로 불하하였다.
양초에 관한 규칙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간섭한 요셉 2세는 `제의실의 황제’라고 불렸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클레멘스 호프바우어는 20세기에 새로 성인품에 오른 분으로서
1909년 5월 20일 비오 10세 교황에게 시성되고,1914년 빈의 사도인 동시에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수도명은 클레멘스이고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그는 1751년 오스트리아(Austria)의 빈도보나(Vindobona)에서 태어났다.
열두 형제 중 아홉째의 아들이고, 가정은 가난한 고기 파는 직업이었으나 양친은 모두
신심면에 열심한 분들이었다.
그가 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어머니는 그를 십자가 앞에 데리고 가서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이제부터 네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다"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그 뒤 형제들 중 일곱까지 일찍 다 죽었으므로 요한은 아직 소년의 몸으로 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도하고 또 일하라"(Ora, et labora)함은 유명한 트라피스트(Trappisst)의 표어지만
당시 요한의 생활을 나타낸 말이기도 했다.
거기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손님이 와서 어머니와 대화 중 권태(倦怠)란 말을 여러 번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 뜻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금 뒤 그는 어머니에게 그 뜻의 설명을 들었지만 "하는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생각은
그가 이제까지 조금도 알지 못했던 관계로 대단히 놀라며
"엄마, 그러한 때에는 기도를 바치면 좋을텐데.."하고 태연히 말했다고 한다.
요한은 어려서부터 항상 사제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으며 얼마동안은 로마와 빈 사이를 오가는 방랑 생활을
하다가 부룩크에서 프레몽트레 수도원의 빵 굽는 데서 일하면서 라틴어 문법을 배웠다.
그 뒤 그는 로마에 가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참배하고 일심으로 기도하고 돌아오는 도중 이탈리라의
티볼리 부근에 초막을 마련하여 잠시 은수자의 생활을 해 보았지만, 본래 사제를 지망하는 그는
이에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그때의 그 생각에는 그 나라의 서울인 빈에 가면 어떻게든지 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막상 가 보니 쉽사리 마음대로 안 되고, 우선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와이리히라는 빵집에
취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신심이 깊었던 선량한 주인 부부는 성실한 요한이 한결같이 마음에 들어 사위로 삼으려고 했으므로
요한은 이를 알자 자못 놀라며 기회있는대로 도망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가 여전히 근방에 있는 스테파노 대성당에서 미사 참여하러가서
복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니 때마침 큰 비가 쏟아졌다.
현관에서는 세 귀부인도 야단난 것처럼 서있었다. 친절한 요한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비오는 가운데 뛰어가서 마차를 불러왔다.
귀부인들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거듭 사례하며 "그대도 함께 탑시다"라고
자꾸 권하므로 사양할 수 없어 같이 탔던 것이다.
가는 도중 요한은 그들이 묻는 대로 자기는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지만
학비가 없어서 될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평소에 그의 열심하고 경건함에 탄복하고 있던 그들 세 사람은 극히 동정하며
"그만한 비용이라면 어떻게든지 장만해 드리겠습니다"하고 생각지도 않던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이처럼 의외로 학비의 혜택을 받게 된 요한은 그 당시 30세라는 나이에
젊은 학생들과 똑같이 어학부터 철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웠다.
그런데 그 당시의 빈 대학에 있어서의 신학의 경향에는 매우 좋지 못한 점이 있어서,
지금까지순수한 가톨릭 교육만을 받아온 요한은 얼마나 마음으로 그것을 우려했는지 모른다.
하루는 어느 교수의 합지주의설에 대한 강의를 듣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그렇다면 참된 가톨릭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이라고 항의했다.
그래서 그는 순수한 가톨릭의 학설을 배우러 로마에 가려고 결심하고 휴부르라는 친구와 함께 제일 먼 성도
(聖都)로마를 방문해 그 날 밤은 여인숙에서 머물고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종이 울려온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했다.
그것은 근방에 있는 구속주 수도원에 속하는 성 율리아노의 성당이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기묘한 것으로서 오래지 않아 이 두사람은 그 곳의 수도자가 되어
요한은 클레멘스라고 개명하여 35세때 비로소 오랜 세월 갈망하던 사제가 되었던 것이다.
수사 신부인 클레멘스는 총장으로부터 북쪽 유럽에 구속주회를 발전시키라는 분부를 받고
러시아의 독일 이민부(移民附) 사제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가는 도중 휴부르와 같이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당도하니 로마 교황청의 대사 사르쯔오는 그들을 동시에 머루르게 하고
성 벤노에게 봉헌된 성당을 내주며 그 시에 살고있는 독일인 신자들을 맡아보게 했다.
그 교회는 황폐하기 짝이 없어 클레멘스는 우선 손질과 청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때는 마침 프랑스 대혁명의 시초였고, 그의 영향은 바르샤바까지 미치게 되어,
시민은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교회의 중요 신앙 조목조차도 모르고도 수치로 여기지 않던 상태였으므로
클레멘스는 신앙의 부흥을 위해 다음 세대의 국민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철저히 가르칠 필요성을 통감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빈민이나 고아들의 구호 사업에 착수하고, 자신은 빈궁을 감내하면서도
그들에게는 부자유를 주지 않으려고 힘껏 일하며 그것 때문에 친히 구걸하러 다니고,
때로는 박해나 수치를 당해도 조금은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한 예를 들자면 어느날 그가 요리점에 가서 구걸을 애원하니까 손님 중의 하나가 욕성르 퍼부으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래도 그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천천히 그것을 씻고 나서
"지금 것은 나에게 주신 것이고, 이번에는 불쌍한 고아들에게도 아무것이나 베풀어주지 않겠습니까?"
라고 정중히 말해 상대자도 매우 부끄러워하고 또한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대단히 감동하여
각기 응분의 희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같이 구걸하면서도 부족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기적으로 도우신 때도 종종 있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성 벤노 교회 사제의 감탄할 만한 활동 상태는 오래지 않아 그 부근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동정하는 이도 증가되어 기부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성당을 보살펴 주는 이도 있었다.
교회는 날로 새로워져서 자유로 장엄한 예식도 거행할 수가 있게 되었고,
나중에는 "성 벤노 교회는 신심의 보금자리(오아시스)"라고 불리기까지 되었다.
이 칭찬의 언사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가 구속주 수도원이 형제들과 활동을 개시하던
첫 1년간 성체를 영한 신자수는 2천명이었지만
그로부터 14년후에는 10만여명에 달했다는 점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그런데 선행을 멸망시키려는 악마는 도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클레멘스는 사악(邪惡)한 사람의 모함을 당하여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구속주 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기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그렇게 번성하던 성 벤노 교회도 하루 아침에 멸망의 운명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클레멘스는 사방을 헤매다가 1808년 빈에 돌아와서 그곳 우르술라회(Urusline convent) 수녀들의
지도 사제가 되어, 고해 성사도 주고, 강론도 하며 가난한 이의 아버지, 학생들의 좋은 지도자로서
바쁜 생활을 보내기를 13년간이나 했다.
일류의 학자나 정치가도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에게 교훈을 청하고 또한 프러테스탄트 인으로서
그의 지도에 의해 개종한 이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빈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했고 독일 지역의 수도 생활 재생을 위해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했다.
그러던 중 성자 클레멘스에게도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나 영혼의 고향인 천국에 개선할 날이 다가왔다.
뜻밖에 장티푸스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된 그는 1820년 3월 15일 정오,
요란히 들려오는 삼종소리를 들으며 "삼종소리가 들리니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장레식의 시각은 계원(係員)의 불찰로 발표를 잊고 있었으나 어떻게들 알았는지
정각에는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깊은 애도 속에 성인의 유해는 묘지까지 전송되었다.
"클레멘스 사제의 죽음은 나에게도, 국민에게도,
심지어 교회에 대해서도 다시 찾을 수 없는 손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유일한 교회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라 함은
그의 죽음에 오스트리아의 프란트 황제가 발표한 애도사 중의 한 구절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우르술라회(The Ursuline Sisters) 창설자
성녀 안젤라 메리치 동정 축일:1월27일.게시판1589번
*성녀 우르술라 동정 축일:10월21일.게시판143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