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 : 1월 26일 성 디모테오 주교 순교자 /성 디도 주교 /성녀 바울라

수성구 2014. 1. 25. 09:10

축일 : 1월 26일 성 디모테오 주교 순교자 /성 디도 주교 /성녀 바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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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월 26일

성 디모테오와 성 디도 주교

Saints Timothy and Titus

 

디모테오와 디도는 바오로 사도에게 안수를 받은 제자들로서 바오로 사도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다.
스승인 바오로 사도를 대신하여 디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디도는 그레데 교회를 지도했다.
자애로운 성격의 디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참된 믿음의 아들', '협력자', '절친한 친구'라고 불리었으며
디도는 교회 안의 많은 문제들을 잘 해결한 '영적인 협상가'였다.
리체니아에서 태어난 디모테오는 바오로의 전도 여행을 충실히 도운 충실한 제자이며 협조자였다.
또한 디도는 바오로 사도에게 영적인 아들과 같은 인물로서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고,
교회 안의 불화를 해소시키는 데 큰 능력을 발휘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와 디도에게 사목 서간을 써 보냈는데,
이 사목 서간들은 성직자와 신자들을 지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많은 권고들을 담고 있다.

 

 

 

 

축일 : 1월 26일

성 디모테오 주교 순교자

ST. TIMOTHY

St. Timotheus, E. et M

San Timoteo Vescovo

stoned to death in 97

 

리체니아의 리스트라 태생인 성 디모테오는 희랍인 아버지와 유대교에서 개종한 에우니체의 아들이다.

그는 성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할 때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성 바오로의 친구이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행전 16:1~4).

그는 혹시 말썽이 날까봐 할례를 받은 후, 바오로의 제 2차 전교 여행에 수행하였다.

바오로가 유대인의 적개심 때문에 베레아를 몰래 빠져나갈 때,

디모테오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테살로니카로 파견되어 그곳의 상황을 보고하고, 또 박해 중의 크리스챤들을 격려하였다.

58년, 디모테오와 에라스토는 마체도니아로 파견되었으며, 그 후 코린토로 가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명심하라고 권고를 하였다.

바오로가 체사레아에서 투옥되었고 또 로마로 이감되었을 때, 디모테오는 같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 후 그는 에페소로 가서 그곳의 초대 주교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그가 디아나를 공경하는 카타고리아 이교 축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다가 돌을 맞아 순교하였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바오로의 두 편지는 65년경에 마체도니아에서 썼을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디모테오
라틴어  Timotheus 
   Timotheus(?~97?). 성인. 축일 1월 26일. 순교자. 로마의 속주(屬州)인 리카오니아(Lycaonia)의 리스트라(Lystra)에서 그리스인 부친과 유태인 모친 사이에 태어났다. 성 바울로의 제1차 로마 식민지 전도여행 때 디모테오와 모친, 조모가 그리스도교에 귀의(歸依)한 것으로 보인다(사도 14:7-9, 2디모 1:5). 기원후 50년 성 바울로의 제2차 여행 때 디모테오는 바울로의 전도여행을 충실하고도 열심히 도운 수반자로 시종하였다. 디모테오는 데살로니카서(書), 고린도후서, 필레몬서의 공동 집필자이다. 히브리서 13장 23절에는 그가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성 바울로는 그를 에페소에 있는 어느 그리스도교 학습소 선생으로 파견(1디모 1:3), 그러나 후에 성 바울로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디모테오를 급히 로마로 소환하였다.
   성 요한 다마셰노(Johannes Damadcenus, 645?~750?)에 의하면, 에페소 주교 디모테오는 성모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로마황제 네르바 치세 때인 기원후 97년에 순교했다고 한다. 356년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그의 유골을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하였다. 디모테오는 비교적 소심하면서도(1고린 16:11, 2디모 1:7-8), 심성이 자애로웠다(2디모 1:4). 그는 병약하고(1디모 5:23), 성 바울로의 마지막 피체(被逮) 때(63년경) 아직 젊었었다(2디모 2:22). 성 바울로는 그에게 보내는 2통의 사목서간(디모테오서)에서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르며 그를 염려하였고(1고린 4:17), 충실한 모방자(필립 2:19-20), 협력자(로마 16:21), 절친한 친구(2디모 1:4)라고 칭찬하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디모테오는 유니게라고 부르는 유다인 어머니와 그리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렇게 혼혈아였기에 유다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47 년경 바울로에 의해 개종했고 후에는 바울로의 선교활동에 참여했?

15 년 동안 바울로와 함께 일하며 어려운 사명을 맡아 처리했으며 바울로가 세운 교회에서 생긴 큰 혼란들과도 맞서야 했다.

후에 디모테오는 바울로가 로마에 연금되어 있는 동안 그와 함께 지내기도 했고 디모테오 자신이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바울로는 에페소 교회에서 자신을 대리하도록 디모테오를 내세웠다.

그의 생활은 현대의 활동적인 주교들과 비슷했다.

그는 복음을 전할 특권과 또한 그것으로 인해 바울로와 함께 반대자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면서 바울로의 동료 주교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특별한 성소를 받은 대 사도 성 바오로는 필립비 인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주 예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디모테오를 여러분에게 어서 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편에 여러분의 소식을 들으면 내 마음도 기쁘겠습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자기 일만 돌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테오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듯 나를 섬기면서 복음을 위하여 함께 일해 왔습니다"(필립 2, 19-22)하고

대단히 디모테오를 칭찬하고 있다.

실제로 성 바오로의 편지, 그 중에서도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디모테오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었던가를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디모테오는 구세주께서 태어나시기 바로 전에 소아시아의 남쪽에 있는 리스트라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교인이었지만 어머니 오이니게와 숙모 로이스는 경건한 유다교 신자였으므로,

디모테오도 어려서부터 천주 십계와 모세의 율법을 배웠고 덕행을 존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어머니와 숙모(叔母)는 유다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가지 기적과 고난과 부활 등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45, 6년경 성 바오로가 첫 번째 전도 여행 도중 리스트라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녀의 집에 머무르게 되어 친절한 접대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때 디모테오는 친히 이 대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존래 성격이 온순한 그는 바오로에게 사랑을 받게 되고 그도 역시 바오로를 친부모와 같이 사모하게 되어 마침내 그의 두 번째 전도 여행에는 동반(同伴)까지 하고, 세 번째 전도 여행 때에도 선구자로서 그리스에 먼저 들어가서 은사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예루살렘까지 같이 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광신적인 유다교인들은 성 바오로를 ’율법의 파괴자’라고 미워하며 어느 날 그를 체포해 죽이려고 했으므로, 그의 무죄함을 잘 알고 있었던 로마 총독 펠릭스는 사도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하기는 했으나, 유다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를 2년간이나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므로 디모테오는 할 수 없이 성 바오로를 떠나게 되었지만, 스승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되자 그를 따라서 에페소로 돌아왔다.

 

그 동한 한가지 기묘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에페소 교회의 신자로 예언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받고 있엇던 몇 사람이, 일제히 동시에 디모테오가 주교가 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는 그 지방의 장로들과 같이 디모테오의 머리위에 안수(按手)하고, 그를 그 교회의 주교로 임명했다.

 

이것은 확실히 적재 적소(適材適所)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에페소와 같이 중요하고 성대한 교회를 맡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다년간 성 바오로를 따라다니며 친히 그의 지도를 받은 독실하고도 성덕이 높은 디모테오를 제외하고는 다른 데서는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성 바오로가 "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생활, 나의 생활 목표와 믿음, 나의 참을성과 사랑, 나의 인내를 본받아 살아왔습니다"(2디모 3, 10) 라고 격찬한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디모테오는 이 때 사도에게 이와 같은 찬사를 받을 만큼 그의 마음이 정직하고 선량하고, 또 어떠한 고난 박해에도 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진하여 엄한 고행을 해나갔다."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을 위해서나 자주 앓는 그대의 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좀 마시도록 하시오"(1디모 5, 23) 하고 성 바오로는 그의 고신극기의 과도함을 충고했다.

 

살아 있을 때에 성 바오로를 충실히 따른 성 디모테오는 죽을 때에도 은사와 같이 장렬한 순교를 했다.

그것은 에페소 시의 이교도들이 디아나라는 여신(女神)에게 대한 제사에 광분(狂奔)한 때였다. 디모테오가 그 여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발광하던 군중은 앞뜰에 그를 체포해놓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려 그를 참살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서의 인물]헌신적인 제자 디모테오-허영엽 신부(평화신문 641호에서)

 

에페소에 있는 디모테오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스승 바울로에게서 온 편지였다. 디모테오는 반가운 마음으로 편지를 뜯고 읽어 내려갔다.

얼마 전 사람들을 통해 이곳 사정을 스승에게 기별을 보냈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은 디모테오가 바랬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디모테오는 내심 스승이 이곳 에페소를 떠나 자신에게로 오라고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로는 그냥 에페소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의 아들, 디모테오! 내가 마케도니아로 갈 때 말했던 것처럼 에페소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이 말은 사실 디모테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스승의 이 말은 "끝까지 싸워라! 회피하지 말라!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라!"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디모테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실 하루하루 버티어 온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디모테오는 당장이라도 스승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에페소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기에는 너무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다. . 당시의 에페소는 황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 물질과 돈에 굶주린 도시였다.

그래서 에페소 사람들은 너 나 할것 없이 부에 대한 열정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에페소는 이런 분위기는 교회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이단자들이 설치고 있었다.

젊은 디모테오만이 이단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그 싸움은 사실 젊은 디모테오에게는 힘겨운 것이었었다.

그런데도 바울로는 디모테오에게 혼자 싸우기를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테오야, 너는 에페소의 혼잡한 상황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후퇴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은 너에게 갈 수 없으니 네가 혼자 잘 싸워야한다.

내가 늘 너와 함께 영적으로 함께 있는 것을 잊지 마라." 디모테오의 눈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나 그는 참고 견딜 것을 다짐했다.

디모테오는 그의 정신적 아버지가 도와주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디모테오는 이처럼 경건하고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디모테오는 눈을 감고 스승을 만났던 그 날을 회고했다.

 

열심한 청년 디모테오는 어느 날 바울로를 만나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은 디모테오의 일생의 전환점을 이루는 가장 큰 사건이 되었다.

당시에 스승은 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로는 바르나바와 마르코 문제 때문에 결별을 하고 실라를 데리고 안티오키아를 떠나왔었다.

디모테오는 리스트라에서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바울로는 디모테오가 젊은 사람이었지만 몹시 듬직해 보이고 믿음이 갔다. 디모테오, 나와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겠소.라는 바울로의 말에

디모테오는 가슴 쿵쿵거릴 정도로 흥분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바울로는 한눈에 디모테오의 됨됨이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디모테오는 리스트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만 알았던 바울로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나서 전도를 하기 위해 다시 떠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뜨거운 감동을 체험했다.

그리고 자신도 바울로의 뒤를 따라 전도에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바울로는 믿음 안에서 디모테오를 아들로 삼았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

바울로는 자주 디모테오를 "믿음 안에서 나의 참된 아들", "나의 아들", "나의 동업자이며 형제"라 는 애칭을 즐겨 사용했다.

결국 디모테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로의 열정적인 제자로 성장했다.

 

바울로의 눈부신 전교활동 현장에서 디모테오의 신실하고도 은총 넘치는 활동이 큰 도움이 되었다. 디모테오는 사목자로 준비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디모테오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선교활동을 했다.

그래서 바울로가 그가 나이가 어려 남에게 멸시를 당할까봐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디모데오를 믿고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이처럼 제자를 확신을 갖고 믿는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디모테오는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디모테오도 자신을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여 충실하게 스승의 말을 따랐다. 디모테오는 이처럼 바탕이 좋은 일꾼이었다.

디모테오는 자신의 처지에서 자족하며 최선을 다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금의 순간에 만족하는 마음이 아닐까.

사도 바울로는 그 옛날 디모테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대로 머물러라, 후퇴하지 마라, 싸워라라고 하는 것 같다.

 

 

[성서의 인물] 디모테오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허영엽 신부(평화신문673 호에서)

 

사도 바오로가 아들처럼 아꼈던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디모테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그대를 기억하고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오. 나는 그대가 눈물을 흘리던 일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대를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소.

그대를 만나게 되면 내 기쁨은 한없이 클 것이오. 그대의 거짓 없는 믿음과 투철한 신앙심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오.”

 

믿음의 특성은 다른 이로부터 전해 받는 것이다. 특히 부모의 신앙은 대개 자녀들에게 전승되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의 가르침과 교훈은 일생을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곤 한다. 디모테오 역시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믿음을 배웠다.

로이스와 유니게는 성서에 단 한 번밖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위대한 사도 바오로에게 강한 인상과 감동을 주었다.

 

사도 바오로는 아들과 같이 사랑했던 디모테오의 됨됨이와 신앙의 자세가 그의 열심한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을 알고 있었다.

디모테오의 가정은 신앙적으로 열심한 가정이었다. 로이스와 유니게, 그리고 디모테오에 이르는 삼대에 걸친 믿음의 고리는 이들을 육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를 일치시키고 있었다. 혈통이 이어지는 곳에 신앙도 함께 했던 것이다.

 

디모테오의 경우에서처럼 신앙의 인연 역시 한 사람의 영혼에서 다음 세대의 영혼으로 전수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이 주신 신앙을 대대로 꽃 피워 가는 디모테오의 가정은 신앙인의 가정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로이스와 유니게는 다른 열심한 유다인 가정처럼 디모테오를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교육시켰을 것이다. 디모테오는 일찍부터 히브리 성서와 기도생활에 몰두했다.

어린 시절의 학습과 배움이 일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침이 되는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유니게와 로이스 모녀는 어린 디모테오에게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미리 준비시킨 셈이었다.

 

훗날 이들의 참된 교육은 디모테오를 통하여 큰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로이스와 유니게는 디모테오의 결실을 자신들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디모테오 뒤에서 돕는 것으로 기뻐했다.

이들은 겸손하고 참된 성품을 가진 신앙인이었다. 오늘날에도 훌륭한 사목자 뒤에는 훌륭한 부모님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분들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뒤에서 기도와 희생으로 사목자의 큰 용기와 힘이 되어준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교육은 태어나고 자란 가정에서 시작된다. 디모테오는 가정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면서 자랐을 것이다

유니게와 로이스가 디모테오에게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가르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기초가 있는 교육이 중요하다.

 

디모테오에게도 사랑의 체험이 훗날 사람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잘 체험하지 못하면 이웃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의 올바른 개념을 갖기 어렵다고 한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디모테오와 사도 바오로가 겪은 복음 전도의 고난과 육체적 고생은 그 중요한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자녀교육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오늘날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잘못을 응석으로 받아주는 부모의 태도는 그들을 약화시키고 결국 자녀의 삶에 해를 끼치게 된다.

 

진실한 사랑은 그 사랑하는 자를 성숙시키며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도록 자유를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부모 자신이 아픔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신자의 가정은 믿음을 계승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순수한 믿음은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주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왜냐하면 험난한 세상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은 부모가 자녀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부모 자식의 관계일지라도 인간적인 힘으로만 전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고 한 가족이 믿음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부모는 하느님께서 자녀들을 자신에게 맡겨주셨다는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의 성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분명히 하느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디모테오 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디모테오 전후서란 이름은?

디모테오 전후서는 신약성서에서 열다섯번째와 열여섯번째로 나오는 편지로 데살로니카 후서 다음에 위치합니다.

필립비서, 에페소서 등이 각각 필립비 교회와 에페소 교회의 불특정 다수의 신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디모테오 전후서는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였던 디모테오라는 한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죠.

개인에게 보낸 편지라 해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람 낭독되다가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므로 훗날 서간성서에 한데 묶이게 되었답니다.

 

누가 썼나요?

디모테오 전서와 후서는 모두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띄웠다는 기록을 첫머리(1디모 1,1; 2디모 1,1)에 명확히 밝히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들 편지에 쓰여진 문체가 바오로 친서와 현저하게 다른 것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직접 쓰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여요.

학자들 중에는 바오로 주변에 있는 인물이 썼거나 바오로의 권위를 빌어 50-60년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썼으리라고 보는 이들도 있어요.

다른 학자들은 후대에 바오로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이 썼을 것으로 보아요.

 

언제 쓰여졌나요?

디모테오 전후서에 실린 교회 제도가 초대교회와 다른 것으로 보아, 사도 바오로가 죽은 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난 다음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아요.

이냐시오가 117년경에 보낸 편지에는 감독과 장로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디모테오 전후서에서는 혼용되고 있거든요.

학자들에 따라서 집필연대를 신앙인들의 2세대(70-100년)로 보기도 하고, 3세대(100-130년)로 잡기도 해요. 디도서보다는 조금 늦게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왜 썼나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은 사도 시대나 교회 시대나 늘 한결같음을 일깨우고자 해요.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과거 및 구약성서, 유다인들의 윤리 및 가정규례, 바오로의 사도직과 가르침, 헬레니즘과 로마 문화와도 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어요.

 

즉 1세기 말 아시아 교회 전역에는 율법교사로 자처하면서도(1디모 1,7) 꾸민 이야기와 족보에 정신이 팔려(1디모 1,4) 결혼을 금하고 음식을 절제하며(1디모 4,3)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2디모 2,18) 이들이 여기저기서 늘어났어요.

디모테오 전후서는 이처럼 다른 이들의 신앙까지도 뒤흔들어 놓는 교회의 암적인 존재들과 맞서, 사도 바오로가 전해 준 그리스도교 사상만이 참된 삶의 길임을,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 - 로마 철학의 문체와 어휘, 논증방식을 사용해서 일깨우고자 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가 선교지 교회 신도들과 주고 받은 일상적인 편지는 거룩한 성서로까지 인정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띄우는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한 주간 되십시오.(가톨릭홈에서)

 

 

축일 : 1월 26일

성 디도 주교

St. Titus, E

San Tito Vescovo

Died :c.96 at Goryna, Crete

Canonized:Pre-Congregation

 

성 디도는 성 바오로에 의하여 개종한 후, 그의 비서가 되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다.

바오로는 그를 코린토로 파견하여 오류를 시정케 하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헌금을 모금하게 하였다.

그후 그는 바오로에 의하여 크레타의 주교로 축성되어 바오로의 사업을 이어나갔다. 그후 그는 달마시아를 방문한 뒤 크레타로 돌아와서 운명한듯 보인다.

그는 법률가 제나가 쓴 "디도 행전"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바오로로부터 받은 편지의 주요 내용은

영적인 권고를 비롯하여 착한 목자가 지녀야 할 자질 및 크레타 신자들에게도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디도 
라틴어  Titus  

   Titus(?~96?). 성인. 축일 2월 6일. 초기교회의 주교(主敎), 증거자(證據者), 성 바울로의 제자이며 수행자. 양친은 그리스인(갈라 2:1-5), 안티오크(Antioch, 현재 터키령)에서 태어난 것 같다. 사도행전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성 바울로의 서한에는 그에 관한 정보가 많이 보인다. 바울로에 의해 개종(改宗)(디도 1:4), 두 번 고린토 교회로 파견되었다. 바울로를 따라 크레타섬에 전도를 갔다가 나중에 교회를 조직하기 위해 그 곳에 남아 있었다(디도 1:5). 후에 바울로는 그를 니코폴리스(Nicopolis)로 소환(디도 3:21), 다시 달마티아로 파견 하였다(2디도 4:10). 전설에 의하면 디도는 그 후 크레타섬에서 주교로 여생을 보내고 93세에 별세했다고 한다. 유해는 고르티나(Gortyna)에서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에 옮겨졌다. 디도는 결단력 있고 유능하고 열심한 신자였으나 원만한 성격도 있었기 때문에 바울로는 그를 말썽 있는 곳에 파견하곤 했다고 한다. 디도서(書)는 성 바울로가 주교인 디도에게 보낸 서한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그는 그리스인으로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디도는 바울로와 가까운 친구이자 제자였으며 동료 선교사이기도 했다.

디도는 바울로와 훌륭한 친구이자 행정가이며 평화의 전파자였다.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디도와 그의 우정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으며 얼마나 큰 동료의식으로 복음을 설교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와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디도는 그의 ’준엄한 편지’를 가지고 갔다.

디도는 불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바울로는 디도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디도서를 보면 디도가 그레타섬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악습을 개선하고 장로들을 임명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관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디도는 성 디모테오와 같이 성 바오로 사도에 의해 개종한 후 가장 사랑받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엇다.

그는 모든일에 지혜로웠고 그의 활약은 참으로 뛰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성 바오로의 서간에 기록되어 있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것은 극히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 디도는 그리스인인데 그의 출생지는 명백치 않다.

성서에 그에 대한 기사는 안티오키아에 있을때부터 시작했다.

그는 앞서 말한 대로 성 바오로의 감화로 개종했다.

바오로 사도가 그를 "공통된 신앙에서의 나의 친아들"이라고 부른 점으로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51년 성 바오로는 디도와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그때 거기서는 중대한 문제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에는 이전 유다교를 믿던 사람도 적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교에 개종한 후도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많이 있었으므로 그들도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되느냐 안 되느냐가 큰 문제가 되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편으로서 지금까지 이교도 출신의 신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가르쳐 왔는데 이제 와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성 베드로는 마침내 교황의 무류지권(無謬之權)으로 개종자는 유다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단정했다.

그 결과는 디도에게도 중요했다. 그 이유는 그도 전에는 이교도였던 연고이다.

 

디도는 그 후 다시 안티오키아에 돌아가서 성 바오로가 두 번째의 전도 여행을 떠나

프리기아 및 갈라디아를 지나 아테네, 고린토의 방면에 갔을동안 그곳에 체류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뜻으로 크리스찬이라고 칭한 것은 아티오키아의 신자가 처음이었다.

아티오키아의 교회는 성 바오로가 안 계시는 동안 신앙의 기초를 견고히 하고 신자의 수를 증가시켰다.

이것은 디도의 활동이 절대적 역할을 한 셈이다.

그 이유는 성 바오로는 그러한 결과를 보고 경건하고 열심히, 또한 지혜로운 자에게만 맡길 수 있는 고린토 교회의 주교라는 직분을 그에게 위탁했기 때문이다.

 

고린토라는 곳은 성 바오로가 손수 전교하고 교회를 설립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고린토 교회의 신자들은 신앙으로 뭉치지 못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죄까지 공공연하게 범했다.

성 바오로는 이러한 슬픈소식을 듣고 스스로 그곳으로 가려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마침 두번 째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세 번째의 전도 여행의 준비중에 있었으므로

도저히 여가가 없었으므로 다음은 그의 제자인 디모테오와 에라스토를 파견했지만 그들의 활동도 그 교회를 구출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고린토에서 약간 안심할 만한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므로 성 바오로는 될 수 있으면 후에 자신이 가 보려고 생각했지만 즉각 어떤 인망 높은 이를 보낼 필요를 느끼고 디도를 선택해 보내기로 했다.

 

처음에 디도는 책임의 중대함을 생각하고 주저했지만, 성 바오로가 이웃을 사랑하는 덕을 가르쳐

예루살렘이나 아카이아에 있어서 곤란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을 위해

기부를 모을 것을 의뢰했으므로 그는 마침내 승낙을 하고 즉시 동반자를 데리고 출발했다.

성 바오로는 트로아스에서 그와 다시 만나려고 했으나

그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에까지 가서 디도를 만나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엇다.

디도는 모든 일을 현명히 처리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종종 같이 여행하며 크레타 섬에도 갔다.

그리고 그곳에 몇 군데의 교회를 세우고 디도가 주교로서 머물렀다.

성 바오로는 안심하고 그 지방을 떠났지만, 결코 사랑하는 제자를 잊지 않고 2년 후에 디도에게 한 통의 서간을 보냈다.

현재의 성서 안에 있는 디도서가 바로 이 서간이다.

그 서간 중에서 성 바오로는 주교로서의 생활 및 임무에 대해서 훈계하고 지도했으며

한 번 더 사랑하는 제자를 만나고 싶어서 그를 키프로스로 불러 거기서 한 겨울을 같이 지냈다.

 

다음해 그는 디도를 달마디아로 파견하고 전교하도록 했으나 그것도 잠깐 동안이엇고

오래지 않아 디도는 크레타로 다시 돌아와 그 섬 및 부근의 작은 섬에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것에 즐겨했다.

실로 그는 사도 성 바오로의 제자로서의 적합한 경건하고, 열심하며, 영리함으로 유익한 인물이었고,

또한 극히 희생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강론과 깨끗한 행동은 얼마나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했는지 모른다.

그가 승천한 때는 94세라는 고령이었다.(대구대교구홈에서)

 

 

[성서의 인물]믿음의 동행자, 문제의 해결사 디도-허영업신부(평화신문 647호에서)

 

사도 바오로에게는 여러 명의 협조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디도였다.

디도는 그리스 사람으로 사도 바오로를 만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디도는 사도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사도 바오로의 전교활동에는 항상 그가 동행했다.

디도는 믿음직스럽고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신심 깊은 신자였다.

사도 바오로가 디도를 가리켜 “같은 믿음의 생활을 하는 진실 된 아들”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디도는 사도 바오로의 손발처럼 든든한 협조자일뿐 아니라 영적인 부자지간이었던 것 같다.

사도 바오로가 생각할 때 디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모범으로 여겼던 것 같다.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상황을 예루살렘교회에 알리려 할 때 모델로 디도를 데리고 갔을 정도였다.

 

사도 바오로의 충실한 두 제자는 디모테오와 디도였다.

디모테오는 어머니가 유다인이었지만, 디도는 순 그리스인으로 개종한 제자였다.

디도는 디모테오 보다는 더 나이가 많았고 성격과 수완에 있어서도 디모테오 보다 원숙한 듯하다.

고린토 교회의 사태 수습을 위해 디모테오를 보냈으나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디도가 파견되어 사태 수습을 한 것을 보면 디도는 지혜와 정치적 수완도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디도는 디모테오처럼 바오로의 서신에서 송신자로 이름이 함께 연명된 일이 없고, 사도 행전에도 디도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고린토 후서 등 몇 편의 서간에서 잠시 소개될 뿐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사도 바오로의 그림자처럼 그의 활동에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디도의 가장 현저한 활동은 뭐니뭐니 해도 고린토 교회의 문제 해결에서였다.

고린토 교회의 분열은 바오로의 큰 관심사였다.

교회가 여러 파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의 붕괴로 이어질 가장 나쁜 조짐이었다.

바오로는 처음에 디모테오를 보내면서 그를 정중히 대접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디모테오의 활동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후 고린토 교회의 사정은 더 악화되었고, 바오로에 적대적인 유다인들이 득세하여 그들은 거만해져서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사정을 수습하기 위해 바오로는 급히 고린토를 방문하였으나 결국 이 여행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고린토 교회는 더 혼란해지고 바오로는 모욕을 받고 에페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침내 바오로는 디도를 고린토에 다시 보내어 계속 사태 수습에 노력하게 하였다.

또한 가난한 삶들을 위한 헌금 모금 사업도 벌이도록 지시하였다.

 

“이보게 디도, 고린토 대부분의 교인들은 믿음이나 언변, 그리고 지식이나 열성이 따를 수 없는 훌륭한 신자들이요. 그들을 잘 사목 해 주시오.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만들어 주고 은혜로운 헌금 모금사업도 차질 없이 추진해 주시오.”

“알았습니다. 분부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토 교회의 사태 수습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또한 구제 사업을 위한 헌금 모금도 성공적이었음을 알고 몹시 기쁘고 만족했다.

바오로는 기쁨에 넘쳤고 만족했다.

 

드디어 바오로가 고린토에 세 번째로 도착했을 때에는 여러 난제가 쉽게 해결되고 바오로는 다음의 계획인 로마전교를 준비할 수 있었다.

바오로는 교우들 앞에서 디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디도는 나의 참 아들이요, 친구이며, 믿음의 동반자입니다.

디도는 여러분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맞아준 것에 대해 신자 여러분에게도 큰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전도여행을 하면서 디도는 그레데 섬에 남겨두어 사목을 담당하게 하였다.

디도가 할 일은 교회를 돌보며 원로를 임명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계속 여행하면서 디도에게 서간을 보내어 사목의 지침을 내려주었다.

 

“디도! 내가 그대를 그레데 섬에 홀로 남겨둔 것은 내가 다하지 못한 사업을 완결 지으려는 것이오.

훌륭한 원로들을 뽑아주어 교회가 자립할 수 있게 해주오.

그리고 그레데 사람들 중에 악명 높은 자들이 많소.

그들은 더러운 이익을 위해 못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오.

그대는 그들을 꾸짖어주고 건전한 교리에 부합하는 것만을 가르치시오.”

 

그레데 섬은 지중해 상에 있는 섬인데 상당한 수의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오로는 디도에게 원로의 임명과 이단의 경계 등을 지시하고, 교회 각계 각층에 대한 교훈과 사회일반에 관한 교훈 등 상세하게 편지를 썼다.

 

바오로가 디도를 그레데 섬에 홀로 남겨두고 중대한 임무를 부탁하고 있는 것은 디도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디도는 바오로가 힘들어하는 일을 담대하게 처리할 수 있는 가장 믿을만한 제자였던 것이다.

그래도 바오로는 어떤 의미에서 참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어려운 문제의 해결사인 디도 같은 제자가 있었으니까.

 

 

 

디도서는 어떤 책인가요?

 

디도는 누구인가요?

디도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 바오로를 도와 복음선교에 협력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동반자로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에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할례 요청을 집요하게 받지만,사도 바오로가 이 요청을 막아주죠(갈라 2,1-10).

고린토 교회 신도들이 바오로의 가르침을 배격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바오로보다 앞서 고린토를 방문하여(2고린 2,13)

자세한 사정을 사도 바오로에게 보고하는 역할(2고린 7,13-14)도 맡아 했답니다.

그렇지만 디도서에 나오는 ‘디도’의 모습은 사도 바오로의 유능한 심복이라기보다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받아야 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이 둘이 동일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어요.

 

누가 썼나요?

디도서 첫머리에 “나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디도 1,1)로 되어 있어, 초대교회로부터 오랫동안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으리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바오로의 다른 편지들에 비해 신학적 용어나 어휘 등이 많이 다른 것으로 보아, 바오로를 따르는 후대의 사람이 썼을 것으로 보아요.

 

언제 쓰여졌나요?

디도서는 디모테오 전후서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 실린 교회 제도가 초대교회와 다른 것으로 보아, 사도 바오로가 죽은 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난 다음에 생겨났을 거에요.

디모테오 전후서는 디도서보다는 교회의 직제에 대해서 보다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디도서가 사목서간 중에서는 가장 먼저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이냐시오가 117년경에 보낸 편지에는 감독과 장로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디도서에는 혼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100년경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그리스도교가 퍼져 나가던 1세기 말엽은 개척교회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어요.

교회를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교회 구성원을 격려하고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전수하며,이단자를 배척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목자들이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죠.

이에 신설된 교회를 맡아 사목하는 이들이 이러한 갖가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일러주고자 해요.

 

어떤 내용이 실려 있나요?(디도 1,1-3,15)

바오로는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사도로 임명되었습니까?(디도 1,1)

디도서는 3장밖에 안되어요. 그 안에서 사목자로서 디도가 그레데섬에서 해야 할 일들을 상세히 일러주고 있지요.

흠잡힐 데 없는 사람을 원로로 임명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진실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을 감독자로 임명할 것을 당부합니다.

누구를 헐뜯거나 싸움질을 하지 말고 온순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도록 신자들을 가르칠 것을 촉구하고 있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남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사람이 되라고 권유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준 은인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가톨릭홈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또모 주교의 강론에서

(Hom. 2 de laudibus sancti Pauli: PG 50,480-484)

 

나는 훌륭하게 싸웠습니다

 

바울로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흡사 자신이 하늘 나라에 있는 것처럼 느꼈고, 상처와 채찍을 받을 때 상을 받는 이들보다 더 큰 기쁨을 지녔습니다.

그는 상급에 못지 않게 고통을 사랑했습니다.고통은 상급을 얻게 해주므로, 그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로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상급이고 육신안에 사는 것은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상급을 뒤로 미루고 투쟁하는 것을 더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로에게 있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는 것은 큰 투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투쟁보다 큰 투쟁이고 다모든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상급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상급보다 투쟁과 고통을 택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투쟁과 고통을 겪는 것을 즐거운 일로 여겼다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이 점에서 나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우리에게 슬픔의 원인인 것은 그에게 가장 큰 즐거움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무엇 때문에 위험과 환난을 상기하는 것입니까? 바울로는 어떤 때 큰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바울로 사도의 놀라운 덕행의 모범을 경탄하는 것으로만 만족치 마십시오.

여러분은 또 그 모범을 본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바울로와 같은 공로를 지닌 사람이 그와 같은 상급을 얻으리라고 말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로 의 다음 말씀을 들으십시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로가 우리 모두를 자기 자신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같은 영광의 월계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그 선물들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로가 지닌 덕행들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그리고 그렇게도 큰 영광을 얻게 한 그의 열성과 견고성만을 생각지 말고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똑같은 그 인간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려운 것은 쉽고 가벼운 것으로 보일 것이고, 잠시 동안 여기에서 노력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총으로 부패함이 없는 불사 불멸의 월계관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영광과 권세가 있습니다. 아멘.(가톨릭홈에서)

 

축일:1월26일

성녀 바울라

St. Paula of Rome

Santa Paola Romana Vedova

5 May 347 at Rome -

404 at Bethlehem of natural causes;

buried under the Church of the Nativity at Nazareth.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인 바울라는 톡소시우스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이상적인 부부로 존경받았으며, 379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한 후,

엄격한 절제생활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성 에피파니오와 안티오키아의 바울리노를 통하여 예로니모를 만난게 인연이 되어

예로니모의 사업에 적극 가담하여 후원하였다.

384년, 그녀의 딸인 블레실라의 죽음으로 한때 비통에 잠겼으나,

다음 해에 그녀는 에우스또치움과 함께 로마를 떠났고,

예로니모와 더불어 성지를 순례한 뒤,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다.

 

바울라와 에우스또치움은 구호소와 수도원을 세웠는데, 바울라는 수도원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예로니모의 절친한 친구이자 보조자였으며, 성서 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바울라는 과부들의 수호자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축일:9월30일.게시판139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부유한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모른다.

그러므로 별로 악인은 아닐지라도 자연히 인생에 대한 진실성이 없어져

일상 생활이 사치와 향락에 기울어져 호화스러운 생활에 떨어진다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떤 기회에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 상태에 충격을 받아

돌연 열심한 자선가가 되는 수도 있다.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로마의 성녀 바울라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347년에 태어나 15세때에 귀족 유리오 가의 톡소시우스라는 청년에게 출가해,

부부가 서로 화목하여 1남 4녀를 낳았다.

집에는 많은 노예와 종들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고,

양순한 남편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해 주고,

또 사교 무대에서는 여왕과 같은 대접을 받는 등 그녀의 생활은 꽃이 핀것과 같이 아름다웠다.

 

호사다마(好事多摩), 좋은 일에는 마가 들기 쉽다는 격언과 같이,

결혼 15년만에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남편은 돌연 세상을 떠나 버렸다.

뜻밖에 당한 불행에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밤이나 낮이나 울음으로써 보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그녀의 눈물은 그쳤지만,

그녀의 마음은 남편을 생각하던 정이 깊었으므로 그만큼 마음의 고통이 항상 남아있었다.

 

지금까지 즐거웠던 세상이 갑자기 아무런 매력도 없이 허무한 것으로만 보였다.

그녀는 현세의 허망함을 깊이 깨달았다.

세상 사람들은 재산가인데다 아름답고 아직 30세밖에 안 된 이 과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방에서 재혼의 신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죽은 남편에게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그녀의 가슴에는 그러한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깨끗이 거절했다.

 

간신히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킨 바울라에게 깊은 위로와 힘을 준 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이었다.

그때 마침 로마 집정관의 미망인이던 성녀 마르셀라가 동일한 신분의 부인들을 모아

아벤티노의 언덕에 있는 집 한칸을 구입해

수도적 공동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듣고 그녀는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다.

마르셀라는 그녀의 슬픔을 없애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빈민굴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문하러 갈 때 그녀를 데리고 갔다.

 

*성녀 마르셀라 축일:1월31일.

 

 

 

지금까지 보지못한 이러한 비참한 생활상태에 접한 바울라의 놀람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불행에 동정의 눈물만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할 수가 있을까 하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途꼈?내게 남편의 막대한 유산을 남겨 준 것은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라고 하는 뜻이 아닐까?

그곳의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 준다면 이미 죽은 남편도 내세에서 얼마나 즐거워할 것인가!"

이와 같이 생각하니 바울라는 마음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사치하게 입었던 자기의 의복을 모두 팔고, 또 검소한 음식으로 인내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어머니의 변한 모습을 보고 자녀들은 매우 놀랐다.

그러나 바울라는 자신은 부자유를 참는다 하더라도,

자녀들에게는 신분에 적합한 교육을 시키는 것은 망각하지 않았다.

장녀 블레실라는 어떤 사람에게 출가했지만,

그녀의 운명도 어머니와 같아서 오래지 않아 남편이 죽었으므로

젊어서 과부가 되어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같은 경험을 겪은 큰딸은 어머니의 마음을 잘 이해해 마음을 같이하여

자선과 박애 사업에 같이 진력하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후에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딸인 동시에 서로 의지살 수 있는 동료를 잃은 바울라의 한탄과 슬픔이

어떠했는가는 가히 짐작 할수 있을 것이다.

 

다마소 교황은 성서학자로 유명한 성 예로니모를 로마에 초빙했는데

마르셀라는 이때를 좋은 기회로 여기고

아벤티노의 수양 단체를 위해 성서 강의와 히브리어(語) 수업을 청했다.

그때 바울라도 셋째 딸 에우스토치움과 같이 그 교회 박사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중 그의 수도 생활에 관한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및

죽음의 성지(聖地)에 대한 말씀은 바울라 모녀의 마음을 대단히 감동시켜

그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수도 생활을 할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들은 둘째 딸이 출가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넷째 딸과 아들을 친척집에 맡기고

재산을 통틀어 모아 로마를 출발하여 그리워하던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그곳에 남자를 위한 수도원 하나와 여자를 위한 수도원 세 개를 설립하고

동료들을 모아 성 예로니모의 지도하에 수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성 예로니모가 말씀한 "아마 바울라보다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 그대로

그녀의 자녀에게 대한 사랑은 대단한 것이어서

딸 둘과 아들과 작별할 때 그녀의 슬픔컸지만 그녀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완덕의 길을 씩씩하게 나아가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그들과 헤어진 것이다.

 

그녀는 매우 바쁜 수도원장의 직에 있으면서,

다른 자매들의 인자한 어머니가 되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관대했다.

어린 예수께서 누워 계셨던 말구유가 있던 곳에서 그는 20년이란 오랜 기간 시종 희생과 고행의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같이 지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천상의 평화를 간직하고

그녀가 평안히 세상을 떠난 것은 404년의 일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