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성모님 사랑

마리아 막달레나의 노래../ 전태련 엘리사벳 / 오늘의 묵상(默想)../ 사도들의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있는 막달라 출신의 여인

수성구 2019. 4. 23. 06:26

마리아 막달레나의 노래../ 전태련 엘리사벳 / 오늘의 묵상(默想)../ 사도들의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있는 막달라 출신의 여인|☆...주 님 의 향 기 °♡。

       


부활 아침/ 전태련 엘리사벳


​ - 마리아 막달레나의 노래


 


라뽀니!

 

당신이 동산 지기가 아니라

부활하신 내 사랑이시기에

온 세상 가득 벅찬 기쁨 차오릅니다

 

마리아야!

 

다정스레 부르신 그 목소리

마른 나무에 새순 돋듯

다시 살아나신 당신 입술에서

처음 불리운 그 이름

그 목소리 듣는 제 귀가 복되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사랑의 얼굴 보고 있는

제 눈이 보배롭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불러 밤새 잠 못 이루고

새벽을 달려 여기 빈 무덤으로 이끈 예수님,

부활하신 당신을 입어 새 생명 얻은 몸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 전하러 달려가는

제 발이 날래고 아름답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

내 생명의 생명이심을

고백하는 이 아침이 눈부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노래 - 이영옥♧



주님,

늘 바람이 불었습니다.

메마르고 삭막한 제 마음의 광야에는

자주 회오리 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햇살을 가리는 모래폭풍이 이는곳.

독이 오른 뱀이 또아리를 틀고

그치지 않는 갈증이 맴도는 땅,

제마음은

또 하나의 유다 광야였습니다.



그 거칠은 광야의 신음 소리가 들릴떄면

자주 성마른 걸음으로 호숫가를 배회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득히 찰랑이는 물 곁에서도 제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고

푸르른 그 호수는 또 다른 심연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을 뵈온 그 날도

광야에는 바람이 불었습니다.



호수 기슭의 언덕에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을때

모처럼의 호기심이 피어났습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누구신지도 모르는 채 당신께로 갔습니다.



아 주님,

당신이 제 눈을 바라보았을때

당신이 저를 향해 미소지으셨을때

그처럼 목말라했던 갈릴리 호수가

당신의 두 눈속에서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고요하고 깊은 그 맑은 바다가 저를 흠뻑 적셔주었습니다.



또아리를 틀었던 뱀도 짐승들의 소리도 사라지고

늘 휘몰아치던 바람소리도 그쳤습니다.

촉촉한 단비처럼 당신의 말씀이 제 영혼 깊은 곳에 내렸습니다.

광야는 더 이상 불모지가 아니었으며

당신이 뿌리신 씨앗들은

여리게 고운 잎을 싹 틔워갔습니다.



좋은신분이시여

당신이 제 삶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이 제게 눈길을 주신 그날부터,

당신이 제게 하늘나라의 행복을 가르쳐주신 그날부터

저는 온통 당신으로 가득 찼었고

당신은 제삶의 새로운 주인이 되셨습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많은 주인들 중

제 유일한 주인이신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귀한 진주가 당신임을 압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보물이 묻힌 밭이 바로 당신임을 압니다.

가진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그 진주를 갖겠습니다.



오 주님,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나이다.

열두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과월절 만찬을 드시던

빠스카의 그 기나긴 밤을.



밤 늦게야 사도들로부터 당신의 소식을 들은 우리는

뜬눈으로 그 밤을 지샜습니다.

광야의 회오리 바람이 귓가를 울렸고

알수 없는 거대한 어둠이 밤을 덮어

옛날 우리 조상들이 에집트에서 보낸

그 죽음의 밤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새벽은 더디었고 어둠은 무척이나 짙었습니다.



가시관을 쓰고 빌라도 앞에 서 계셨던 주님을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하라" 고 외쳐대는 광포한 그들을 바라보신

당신의 눈길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애통해하신 그날처럼

깊은 슬픔과 연민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번만이라도 당신의 눈을 고요히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당신의 말씀에 조용히 귀 기울일 수 있었더라면

제가 그러했듯이

저들의 삶도 달라졌을 터인데

완고한 마음들은 구원의 때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골고타를 향한 그 고난의 길을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걸었습니다.

당신을 도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몬을 부러워하며

심장을 찌르는 가시를 안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당신의 손에 못이 박힐때 제손에도 못이 박혔습니다.

당신의 발을 망치질할때 제발목도 휘청거렸나이다.

당신이 목말라하신 십자가 아래에서

제 심장의 피도 말라갔습니다.



그 격심한 고통 끝에 아버지께 당신의 영을 내어 드리실때

당신으로 인해 한 세상이 마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당신이 쓰러지실때

다윗의 도성이

거룩한 다윗의 성전이 무너져 내림을 느꼈습니다.



곱게 노을빛으로 물들은 골고타에

서서히 다가오는 안식일의 고요가

비통 가운데서 퍼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요셉과 니고데모가

당신의 주검을 거두어 모시려고 왔을때,

문득,

제맘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말씀들처럼

당신의 삶이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당신 곁으로 온 그들에게서

당신의 무엇인가가

새로운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명망 있는 의회의원들이며

바리사이인 그들의 출현은 놀라왔으나 이 날,

당신의 장례를 치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새로운 돌무덤과 수의를 준비해온 그들의 배려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로왔는지요,

서둘러 당신을 안장하고

저물어가는 언덕길을 내려올대

긴 울음 끝에 찾아온 고요처럼 안식일 이 시작되었습니다.



주간 첫날,

어둠이 가시기도 전에 향료가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투덜거리는 주인의 불평을 뒤로한 채

서둘러 가는 발걸음에 새벽의 찬 공기도 비켜났습니다.

무덤을 향해가던 제 심정은 전날의 비애보다는

영이 떠난 육신일지라도

그저 빨리 당신을 뵈어야겠다는 조급함과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상치 않은 일들이 삶을 놀랍게도 한다지만

입구를 막은 거대한 돌이 치워지고

시신이 사라져 버린 당신의 빈무덤



너무나 놀라

사도들에게로 달려갔을 때,

어둠은 이미 사라지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어디에서도 당신을 찾을 수 없는 빈 동굴 앞에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해는 중천에 떠올라 무덤 속을 환히 비추는데

어둠의 그림자라곤 없는 밝음 속에서

당신을 다시 잃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울었습니다.



밤새워 아침을 기다려왔습니다.

저를 다시 살게 한 그 깊은 눈빛이 사라졌을지라도,

따스하던 미소가,

정답던 목소리가 사라졌을지라도,

당신의 영과 고난을 함께 한

귀한 육신을 깨끗이 닦아드리고

상처를 싸매어 드리고

좋은 향료로 향기롭게 해드리고 싶었었는데...



오 주님,

다시는 당신을 뵈올 수 없을 것 같아

당신을 잃은 제 삶을 감당할 수 없어 울었습니다.

원인도 이유도 알수 없는 또 하나의 상실이

스승과 저를 영원히 갈라놓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등어리에 쏟아지는 따뜻한 했살 너머로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군가가 제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동산지기여서

혹시라도 주님의 행방을

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햇살은 너무도 밝아 온땅과 하늘,

빈동굴 속마저도 눈부셨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더 여리고 조용한 소리로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문득 그의 목소리에서 어떤 익숙한 울림이 느끼어 졌습니다.

"누구를 찾고있느냐?"

"주님을....."

" 마음속에서 메아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갈릴래아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실때

세번씩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던 주님을,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로부터 향유를 발리우실때

당신의 장례 얘기를 하시던 주님을,

사도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과월절 만찬을 드실때

당신의 살과 피를 어린양을 대신하여 내어주셨다던 주님을,

유다의 배반을 알고서도 그를 그냥 내보내시고

올리브 동산에서 잡히시기까지

당신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셨다던 주님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오히려 당신을 슬퍼하는 예루살렘 부임들을 위로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을,

"이제 다 이루었다"

당신의 영을 고스란히 아버지께 바치진 주님을.

그렇다!

자기에게 다가올 죽음을

누가 그 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회당장의 열 두 살 난 딸을 살리시고

나인과부의 아들을 되돌려 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분이 아니시던가!

죽음이 절대 삼킬 수 없으신분,

그가 바로 스승이셨다.



"누구를 찾고있느냐?"

나직이 물은 그 목소리가 천둥처럼

제 의식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천천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렸을때

그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리아"



그리운 분,

꿈에도 잊지 못할 그 목소리, 그 눈길,

햇살보다 더 눈부시고 환한 미소로

주님이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오,나의 주님!"



♬AntonioCaldara - Maddalena ai piedi di Cristo 18. Aria; Pompe inutili♬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점차 예수님을 알아 뵙게 되는 과정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신 적이 있었지요(루카 8,2 참조). 그 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그녀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지요. 물론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앞에 계신데도, 알아 뵙지 못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부르시지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이런 화법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통하여 상대방이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지요. 이어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이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앙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막달레나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예수님께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은 모두 도망갔어도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지요. 그 결과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대하게 되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내 앞에 현존하시고 활동하고 계심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마리아 막달레나는 늘 예수님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리고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서는 곧바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그분의 말씀에 더 주의를 기울인 마리아는 주님의 가장 충실한 종이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목격한 은총의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며, 예수님의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예수님께 직접 들은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생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늘 예수님과 함께했으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 부활의 순간에 그녀와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함께 머물러야만 평소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상대방의 내면적인 모습, 신앙에서의 초월적인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회개의 순간에도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남김없이 쏟아 부은 것은 그녀의 전 존재가 담긴 온전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그녀의 이런 사랑으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생애 최고의 고백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돌려서 회개하고, 그분과 함께 머물며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것,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그분께 최선을 다하는 것, 마리아 막달레나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신앙의 최고 모범들입니다. 

☆☆☆

교회의 전통으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라자로와 마르타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치에 있었다’(루카 10,39 참조).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 보았듯이, 마리아는 시중드는 데에 분주했던 마르타와 달리 그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2).

여기서 ‘좋은 몫’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깊고 오묘합니다. 그것은 부활 체험의 근본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뵙자마자 그분 발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 또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기도 하였습니다(요한 11,2 참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주님 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마르 15,40 참조).

그렇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치에 머물렀고, 심지어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뒤에도 그 발치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없이 돌아가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능력을 감추시고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무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놀란 막달레나는 시신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즉시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립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보고입니다. 돌아가셨다고만 생각했지 부활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대반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대반전의 여인’입니다. 루카 복음에는 그녀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만큼 강력한 ‘악의 세력’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벽하게 본모습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는 하셨던 것입니다.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온몸으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십자가의 길도 함께 걸었고 죽음의 순간에도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그러기에 부활 사건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여인이 됩니다. 철저하게 사랑했기에 ‘철저하게 사랑받았던’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입니다.

☆☆☆

‘아가’의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남녀 간의 애정으로 노래한 것이 아가이다. 여인은 사랑하는 애인을 찾아 나선다. 그녀는 성읍을 돌아다니며 광장과 거리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고 있다. 스승 예수님을 찾고 있는 막달레나의 모습과 같다(제1독서). 무덤을 찾아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한다. 너무나 뜻밖이었기에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님을 알아본다. 사랑이 담긴 목소리를 듣자 곧바로 알아본 것이다(복음). 

☆☆☆

오늘 복음에서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가까이 지냈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인지요? 아니면 막달레나의 슬픔 때문인지요? 아무튼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시신을 옮긴 장소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바뀝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자 금세 알아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아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눈으로 확인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은총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부르셨을 것입니다. 사랑이 밴 목소리였기에 막달레나는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밴 목소리로 부르면 누구나 응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목소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은 그분께서 부르시는 목소리입니다. 

꾸중이 아니라 애정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막달레나처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모든 사건에 담긴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인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 

사냥감을 발견한 개는 끝까지 그것을 쫓아간답니다. 그러나 사냥감을 보지 못한 개는 다른 개가 달리는 것을 보고 뛰다가 곧 멈춘답니다. 자기가 달리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끝까지 찾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면 얻고, 찾으면 발견하게 된다고 일찍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녀는 열심히 찾음으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 없이는 끝까지 찾을 수도 없고,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찾는 일은 허사일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만이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중가요의 가사에도 있지 않습니까. “마음 없이 부르는 소리는 안 들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그 목표를 보았습니까? 끝까지 달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찾는 마음에 사랑이 있습니까?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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