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2019년 4월 18일 다해 성주간 목요일 (요한 13,1-15) ​<당신의 감정은 안녕하십니까?>전삼용 요셉 신부

수성구 2019. 4. 18. 07:38

2019년 4월 18일 다해 성주간 목요일 (요한 13,1-15) ​<당신의 감정은 안녕하십니까?>전삼용 요셉 신부|전삼용 신부 강론

       






   <당신​의 감정은 안녕하십니까?> 


제가 처음으로 많이 울어본 경험을 한 것은 영화 ‘에비타’(1996)를 볼 때였습니다. 일반 대학 다니다 군대 제대하고 신학교 들어갈 것을 결심한 때였습니다. 이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에비타라는 주인공과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별을 할 때도, 심지어는 누가 죽어도 눈물이 잘 나오지 않았었는데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다니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어쩌면 눈물을 보이면 안 되는 억압된 환경에서 이제 비로소 탈출하게 되었기 때문에 눈물이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강해야하고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정글의 법칙입니다. 정글에서는 작은 상처로 절뚝거리기만 해도 야생동물에게 잡아먹힙니다. 그래서 멧돼지는 발에 가시가 박혀도 아픈 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결국 상처가 곪아서 죽는다고 합니다. 정글에 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때는 감성이 풍부하다가도 어른이 되면 감정이 메마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감정이 지나쳐 모든 이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처럼 느껴져도 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아픔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무뎌져도 좋지 않습니다. 행복은 감성적인 것입니다.

적어도 구원을 위해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하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오늘 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날입니다. 목숨을 바쳐 생기게 만든 감정이 감사인 것입니다. 이 감사가 우리를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힘입니다. 감사는 주는 이에 대한 부담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부담스러워야 보답하려고 노력하다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짐승을 길들일 때도 자꾸 부담스럽게 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는 방법을 씁니다. 훈련을 시킬 때 잘 하면 먹을 것을 던져주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씻어주시는 행위와 성찬례가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발을 씻겨주시고 성찬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성체를 예전부터 ‘감사’로 불러왔고 성찬례를 시작할 때 ‘감사송’을 부르며 감사의 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성체를 영하며 감사가 나와야 발을 씻은 사람처럼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발을 씻어주어도, 성체를 영해주어도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지 않으면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가리옷 유다에게서 감사가 솟아나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자아가 만든 정글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글에선 강한 자만 살아남습니다. 그래서 더 가지려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라도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모기나 기생충이 아닌 이상 사랑을 받으면 기쁘고 감동의 눈물이 나야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감정이 없는 모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랑을 받아도 느낄 수 없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변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사회생활을 하며 감정을 짓누르다보면 지금 자신의 상태가 기쁜지, 슬픈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성당에 와서 성체를 영하면서도 감사가 솟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다의 상태와 별반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은 감정을 억누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과 맞서야합니다. 세상에서 “너, 나에게 감정 있니?”라고 누가 물으면 “너, 나 때문에 기분 나쁘냐?”라는 뜻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기분 나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듯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미덕이 아닌 세상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감정을 잃고 살아갑니다. 유다도 세상에서의 성공에 집착하다보니 감정을 잃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누구도 그의 감정을 보도록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감정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알람을 맞추고 자는데 아침마다 알람이 울리며 이렇게 물어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처음엔 ‘네가 뭔 상관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뭐, 기분이 그냥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요즘엔 ‘오, 감사한데? 물어봐주니 기쁜데?’ 등의 반응이 나옵니다. 자꾸 질문을 받아보니 나의 감정에 민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젠 우리도 나와 상대의 감정을 깨우기 위해 “안녕하세요?”가 식사를 했는지가 아닌 “오늘 기분은 어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감정은 안녕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꾸 물어주어야 그 사람도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 목요일, 가리옷 유다처럼 비극의 날이 되지 않기 위해 나 자신과 이웃의 ‘감정은 안녕한지?’ 자주 물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