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12월24일 시조 아담과 하와 (ADAM and EVE) / 성 윌리브로드

수성구 2013. 12. 20. 19:15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왜 하필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 다윗, 바빌론 유배, 이 세 가지 기준으로 나누었을까요? 그 이유는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리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며 땅, 후손, 복(福)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갖추는 기본 요소입니다. 한 국가가 성립되려면 영토, 국민, 주권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어쨌든 이 약속은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땅의 정착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두 번째로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은 다윗에 대한 것입니다. 그 약속은 다윗의 왕좌가 영원하리라는 것인데,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영원하도록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중개자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실현되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왕국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고, 백성의 상당수가 바빌론으로 유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세 번째의 약속을 통하여 두 번째의 약속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남기셨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 백성과 새 계약을 맺겠다고 말씀하십니다(예레 31,31-33 참조). 옛 계약을 온전히 이루시면서 그 계약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약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계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축일:12월24일 시조 아담과 하와 (ADAM and EVE) / 성 윌리브로드

//



 

 

Creation of Adam-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510.Fresco, 280 x 570 cm.Cappella Sistina, Vatican

 

창세2,7-8

7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8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The Creation and the Expulsion from the Paradise-GIOVANNI di Paolo

c. 1445 Tempera and gold on wood, 46,4x52,1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창세3,9-24  

주 하느님께서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셨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농사를 짓게 하셨다.

 

9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10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따 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12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13 야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 먹었습니다."

14 야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너는 저주를 받아,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15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17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18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

20 아담은 아내를 인류의 어머니라 해서 하와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21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22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되어서는 안 되겠다" 고 생각하시고

23 에덴 동산에서 내 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짖게 하셨다.

24 이렇게 아담을 쫓아 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 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의 피난처가 되시었나이다.

○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도 훨씬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느님께서는 계시나이다. ◎

○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께서는 말씀하시나이다,

"인간의 종락아, 돌아가거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

○ 당신께서 앗아 가면, 그들은 한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서 말라 버리나이다. ◎

○ 날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저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

주님, 돌아오소서. 언제까지오리까? 당신의 종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

 

 

축일:12월24일

시조 아담과 하와

ADAM and EVE

Sant’ Adamo Primo uomo

Sant’ Eva Prima donna

 

아담은 '붉은 흙', '사람'이란 뜻이다.

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생명', '여자', '살다'란 뜻이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창조자 하느님께 불순명한 죄로

하느님께서는 아담은 이마의 땀을 흘리며 노동하면서 살도록 하셨고

하와는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을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흙으로 빚은 그들의 몸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인 성녀이시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아담. Adam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이며 인류의 원조를 지칭하는 이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4장).

하느님을 불신하고 불순명함으로써 원죄를 범한 첫인간 아담은 `미래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교회헌장 22)이요 `장차 오실분의 원형’(로마 5:14)이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 1:15)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 또는 새 아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고 죄인이 되어 죽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로마 5:12-21)

 

하와 Eva.Eve

’생명’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말이며, 원조 아담이 자신의 아내에게 생명을 지닌 모든 인류의 어머니라 해서 붙여준 이름 (창세 3:20).

불가타(Vulgata)에서는 이를 Eva(에바)로 번역하였다.

하느님을 불신하고 불순 종함으로써 아담과 더불어 원죄를 범하였으며 이레네오를 비롯한 교부들은 성모 마리아를 `둘째 에바’라고 불렀다.

즉 "에바의 불순명이 묶어 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명이 풀어 주었고 처녀 에바가 불신으로 맺어 놓은 것을 동정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 "고 하며,

에바와 비교하여 마리아를 `산 사람들의 어머니’라 부르고, 가끔 "에바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고 주장한다.(교회헌장 56)

-가톨릭대사전에서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善)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2-

 

 

 

 

 

[이콘]주무시지 않는 눈. 팔레히(Palech)화파. 제작년도 1797. 32x27.5cm

 

이 성화(Icon)의 주제 (主題)를 금색의 글씨로 그림의 윗 가장자리에 다음과 같이 써넣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이다."
이 문장은 시편 121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어린 그리스도를 어린 사자에 비유한 기독교 생리학자들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잠자리에 누운 그리스도의 왼쪽에 성모를, 오른쪽에 대천사 미카엘을 묘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의 양편 윗 모서리에는 해와 달이 보인다.
그림의 가장자리 네모서리를 축소화적인 금장식으로 정교하게 꾸몄으며,
아랫 가장자리 중앙에 있는 성화의 제작년도를 기입한 빨간색의 글씨판의 가장자리를
바로크 액자처럼 금 장식으로 꾸몄다.
매우 희귀하고 장식적인 묘사법을 사용한 회화적 수준이 극치에 달한 작품이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

 

축일:12월24일 
성녀 이르미나
Sant' Irmina di Treviri Vergine 
Treviri, sec. VII-VIII
St. Irmina of Oehren
Died:c.716 at monastery of Weissenburg
Irmina = consacrata al dio Irmin, dal tedesco = consecrated the God Irmin, from the German 

 

공주이던 성녀 이르미나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왕
성 다고베르트 2세(Dagobert II, 12월 23일)의 딸로서
헤르만 백작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St. Dagobert II


결혼 준비가 다 되어 갈 즈음에 그녀를 사모하던 어떤 사람이
남편 될 사람을 살해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참극을 당한 그녀는 부친의 허가를 받고 수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부친은 그녀를 위해 트리어(Trier)에 수녀원을 세워주었다.


그녀는 당시의 유명한 선교사인
성 빌리브로르두스(Willibrordus, 11월 7일)를 열렬히 지원하였다.
(가톨릭홈에서)

 

* 성 윌리브로드 축일:11월7일,게시판1458번


 

 

축일:11월 7일

성 윌리브로드

ST. WILLIBRORD

San Villibrordo Vescovo

Northumbria.England. 658 -

Echternach (Lussemburgo), 7 novembre 739

Willibrord of Echternach; Bishop of Utrecht, Apostle of the Frisians,

and son of St. Hilgis,

 

 

잉글랜드의 노스움브리아 출신인 성 윌리브로드는

일곱 살 때에 로폰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성 윌프리드의 지도를 받았고,

12세 때에는 성 에그버트와 성 위그버트와 더불어 공부하였다.

 

그는 30세 때에 사제가 되었고, 11명의 잉글랜드 사제들과 함께 프리스랜드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교황 세르지오 1세로부터 프리스랜드 설교권을 얻었으며, 페핀 대왕으로부터 큰 격려와 지원을 받았다.

 

695년, 그는 프리시안인들의 주교로 축성되어 그의 주교좌를 우트렉트에 세웠다.

또한 그는 룩셈부르그에 엑테르나크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이 수도원 운동이 덴마크까지 파급되게 하였다.

 

또 그는 찰스 마르텔의 아들 페핀 개종시킴으로써, 그의 선교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그는 "프리시아인들의 사도"로 공경받는다.

 

 

 

 

 

피핀 3세 Pippin III
(영)Pepin Ⅲ. 별칭은 단신왕(短身王) 피핀(Pippin der Kurze).
714경~768. 9. 24 네우스트리아(지금의 프랑스) 생드니.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최초의 왕.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며 샤를마뉴의 아버지이다.
747년 프랑크 왕국의 사실상 단독 통치자가 되었고,
751년에는 이름뿐이었던 프랑크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프랑크 왕 가운데 최초로 성별(聖別)된 왕으로,
성 보니파키우스와 교황 스테파누스 2세(754)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샤를마뉴, 스투코로 된 조상(9세기경),
스위스 뮌스터에 있는 Church of St. John the Baptist 소장
출처 : Copyright © By courtesy of Weidenfeld & Nicholson Ltd. ; photograph, Ann Mun


샤를마뉴 Charlemagne
샤를 1세, 카를 1세라고도 함.

별칭은 대제(Carolus Magnus/Charles le Grand/Karl der Grosse/Charles the Great).
742경. 4. 2~814. 1. 28 아우스트라시아 아헨(엑스라샤펠).프랑크 왕국의 왕(768~814 재위)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샤를마뉴는 승리했으며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세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追贈)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시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낱말은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체크어의 král, 폴란드어의 król 등).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독일의 사도.성 보니파시우스 주교 순교자 축일: 6월5일, 게시판180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