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고전글·한시

사람의 운명은 왜 서로 다른가?|◈─……

수성구 2018. 1. 29. 05:23

사람의 운명은 왜 서로 다른가?|◈─……고전글♡漢詩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업(業)과 환생(1)-냐나띨로까 대장로 지음 ◎ 1. 사람의 운명은 왜 서로 다른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운명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누구나 대부분 모든 것이 참으로 공평치 못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어떤 이는 부유하고 권세를 누리는데 다른 사람은 가난하고 궁핍할까? 왜 어떤 이는 평생 건강하고 튼튼한데 어떤 이는 날 때부터 허약한 병 주머니일까? 왜 어떤 이는 잘 생긴 외모에 좋은 머리, 완전한 감각 기능을 타고 나는데 어떤 이는 구역질나게 추한 외모나 백치,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로 태어날까? 왜 어떤 아이는 극심하게 불행하고 비참한 사람들 속에서 태어나 범죄자로 성장하는데 어떤 아이는 풍요롭고 안락한 가정에서 훌륭한 부모를 만나 따뜻한 보살핌과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정신적, 도덕적 교육을 누리는가? 왜 어떤 이는 손끝 하나 까딱 않고도 하는 일마다 잘 되는데 어떤 이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가? 왜 어떤 이는 호사스럽게 사는데 어떤 이는 가난에 찌들어 살아야 하는가? 왜 어떤 이는 행복한데 어떤 이는 불행한가? 왜 어떤 이는 장수를 누리는데 어떤 이는 한창 나이에 요절하는가? 왜 이럴까? 도대체 왜 이와 같은 차별이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불교는 이런 의문들에 대해 만족스런 해답을 들려 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와 같은 차별 현상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원인과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썩은 망고씨로부터 싱싱하고 맛난 열매가 열리는 튼튼한 망고나무가 나올 수 없듯이 전생에 악의를 품고 했던 행위인 악업은 다음 생에서 악운을 맞게 하는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좋은 팔자나 나쁜 운명, 그리고 타고난 성품은 단순히 우연의 결과라 할 수는 없고 반드시 전생에 원인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모든 생명체는 앞선 원인들이 있어야 생겨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생겨나기에 적합한 선행 상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어떤 생명체도 순전히 외부 원인에 의해 생겨 날 수는 없습니다. 생명체는 단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과거의 자신이 씨앗이 되어 현재의 자신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생명체가 실제로 생겨나 성장하는 데는 씨앗이라는 원인[因]이 기본 조건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여러 조건들[緣]이 필요합니다. 흡사 망고나무가 생겨나 성장하는 데는 씨앗이라는 기본 조건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기 위해서 흙, 물, 빛, 온도 등이 필요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한 생명체의 탄생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는 성격이나 겪는 운명의 진정한 원인을 찾으려면 전생에 형성된 업의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 업(業)과 환생(2) ◎ 2. 업력의 작용 불교에 의하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어머니 태안에서 태아로 형성되려면 세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란 여성의 난자, 남성의 정자, 그리고 깜마 웨가(Kamma-vega)라고 하는 업력(Karma-energy)인데, 경에서는 이것을 은유적으로 혼(魂)이라는 의미를 가진 간다바(gandhabha)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업력은 임종에 임한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방출됩니다. 부모는 단지 태아의 몸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육체적 요소만을 제공해 줄 뿐입니다. 태아 속에 잠재해 있는 성격상 특성, 성향과 능력들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삶에 매달리다가 죽는 순간에 업력을 방출하는데 이 업력은 수태 준비가 된 새 어머니의 자궁에 전광석화처럼 찾아듭니다. 업의 힘이 난자와 정자에 충격을 주면서 거기에서 하나의 응결체로서 소위 원생세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말을 통해 발생된 공기 진동의 작용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공기진동은 다른 사람의 청각 기관에 부딪쳐 순전히 주관적 느낌인 소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소리 감각이 옮겨 간 것이 아니라 단지 공기진동이라는 힘의 이동만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사람이 방출한 업력은 부모가 마련해 준 질료에 작용하여 새로운 태아를 생성해 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어떤 실체나 영혼이 옮겨 간 것이 아니라 단지 업 에너지가 전달된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은 과거의 업에 상응하여 나타난 것이며 미래의 삶은 현재의 업에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 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른바 자아란 것은 세세 생생 한 순간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변화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흡사 파도가 얼핏 보기에는 바다 위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매 순간 에너지를 전달받으며 물이 제자리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에 불과하듯이, 엄밀히 생각해 보면 궁극적 의미에서는 윤회의 바다를 옮겨 다니는 영구적인 자아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단지 거듭거듭 삶을 향한 충동과 의지에 휘말린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과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수태되는 순간에 부모가 어떤 정신적 상태에 놓여 있었느냐 하는 것은 태아의 품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어머니가 지닌 천성이 그녀가 자궁 속에 품고 있는 아이의 인격에 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만이 지니는 정신적 특성은 결코 부모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실제적으로 존재를 만들어 내는 원인, 다시 말해 이후의 존재를 생겨나게 하는 업의 진행과정 자체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영향이나 조건들의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새로 태어나는 개체가 부모에 의해 태어날 때 부모와 전혀 상반되는 성향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 아이들은, 특히 쌍둥이일 경우에는, 예외없이 부모와 유사한 품성을 지닙니다. (이것이 바로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대 한자락의 바람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