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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광해군 이혼 |◈─……고전글

수성구 2018. 1. 7. 01:36

15대 광해군 이혼 |◈─……고전글♡漢詩

 

15대 광해군 이혼

 

 

 

재능 뒤에 감춰진 한계 15대 광해군 이혼.

 

광해군

 



명군의 자질

 

선조 편에서 언급했다시피 선조는 오랫동안 적자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선조의 수많은 서자 중에 누구라도 세자에 책봉될 수 있었지요. 이 중 유난히 영특했다.

 

임진왜란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정국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온 대사건입니다. 일본은 전쟁에서는 패했으나 조선의 학자와 기술자를 빼가고 문화재 등을 약탈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또한 어디까지나 원정군의 입장이었던 만큼 인명 피해도 상대적으로 적었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정권을 찬탈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인이 히데요시와는 다른 인물임을 내세우며 조선과의 외교 회복을 꾀합니다.

 

영락제가 즉위하며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대군을 파병하며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습니다. 이전까지 범접할 수 없던 대국으로서의 위상은 상당 부분 사라진 상태였지요. 그리고 당시의 혼란기를 틈타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분열된 부족을 통합하며 점점 세력을 키워갑니다.

 

광해군은 이와 같은 격동기에 왕위에 오릅니다. 전란의 피해 복구, 떨어질 대로 떨어진 조정의 위신 쇄신, 그리고 과거와는 전혀 다른 국제 정세에 대한 대처. 조선의 앞날을 결정지을 무거운 책임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요.

 

던 이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입니다. 조선의 여타 다른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광해군 역시 어려서부터 남달랐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임금이 세자를 정하지 못하여 여러 왕자의 기상을 보려고 앞에다 보물을 성대하게 진열해놓고 마음대로 취하도록 하니, 여러 왕자가 서로 다투어 보물을 취하는데 유독 광해군만은 붓과 먹을 가지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여겼다. - 연려실기술18,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여러 신하가 인정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광해군의 재능은 특출했지만 선조의 마음은 광해군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공빈 김씨 사후 인빈 김씨를 총애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신성군을 후계자로 삼고자했지요.

 

선조의 최측근이었던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했다가 엄벌에 처해진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선조의 뜻은 확고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혹시 모를 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그간 미뤄왔던

 

세자 책봉 문제를 결정지어야만 했고, 당시 신성군은 13세에 불과한 어린아이였기에 나이도 충분하고 재능까지 겸비한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게 되지요.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시국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든 것이지요.

 

세자가 된 광해군은 의주로 피난한 선조를 대신하여 조선의 종묘사직을 떠맡습니다. 그를 따르는 여러 신하와 함께 분조(分朝)1를 이끌며 사실상 적지나 다름없는 지역을 떠돌며 국왕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지요.

 

조선왕조를 세우기 이전에 고려의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태조 이성계,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볐던 정종 이방과를 제외한다면 조선 왕실을 통틀어 스스로의 의지로 외적과의 전면전에 나선 사례는 광해군이 유일합니다.

 

광해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각지의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한 만큼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한 백성들과 사대부들은 광해군의 활약에 힘입어 항전 의지를 고취할 수 있었지요.

 

특히 광해군에게 직접 연안성2 사수를 명받은 이정암은 불과 수백의 병력으로 수천의 일본군을 격퇴시키지요.

 의병과 이순신 등의 활약, 명나라의 파병 등으로 조선이 반격의 단초를 마련할 때까지 광해군은 조선의 실질적인 국왕 역할을 합니다.

 

조선이 왕조국가였던 만큼 왕실의 구심점이 된 광해군의 공은 결코 적다 할 수 없습니다. 전쟁 후반기에 명나라 장수 송응창은 민심이 광해군에게 있다며 그에게 남부 지방의 군무를 위임할 것을 제안한 적도 있지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임금과 몸을 아끼지 않고 지도자의 책무를 다한 세자. 두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명히 대비되면서 당시 광해군의 인기가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광해군 본인이 훌륭한 군왕의 자질을 갖추었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입니다.

 

광해군묘

 

빛의 바다, 광해군의 등장

조선의 제15대 국왕 광해군의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나서 2년 후인 1577년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정의 부재 속에서도 광해군은 소년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고 특이한 구석이 많았다.

 

언젠가 선조가 왕자들을 불러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마음대로 고르게 하자 왕자들은 사투어 보물을 골랐지만 학문에 심취해 있던 광해군은 붓과 먹을 집어 들어 선조를 놀라게 했다.

 

일찍이 선조에게는 14명의 아들을 있었지만 막상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방계혈통으로 보위에 오른 탓에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던 선조는 적통의 후계자를 갈망했지만 나이 마흔이 넘도록 적통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 무렵 대신들이 세자책봉을 거론하자 선조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그런데 서인의 리더였던 정철이 세자로 광해군을 언급하자 내심 신성군을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선조는 분노하며 그를 유배형에 처해 버렸다.

 

그 후 맏아들 임해군이 세자 물망에 올랐지만 평소 포악한 성격과 자질 부족이 문제가 되어 결정이 유보되었다.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에는 엄청난 불행이었지만 광해군에게 자신의 능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개전 직후 조선군이 연전연패하면서 북쪽으로 쫓기자 선조는 서둘러 18세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런 다음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하는 길에 영변에 다다른 선조는 국가비상사태 때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행하고 광해군에게 국사를 일부 위임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광해군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592년 6월 14일, 분조를 이끌고 의주를 출발한 광해군은 12월 말까지 영변, 운산, 회천, 덕천, 맹산, 곡산, 이천, 성천, 은산, 숙천, 안주, 용강, 강서 등 평안도 지방을 시작으로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옮겨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했으며,

 

군량과 마초를 수집하는 등 활발한 후방 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활약으로 전란 초기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되었던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항전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그해 7월 광해군은 이천에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왜적과의 항전을 독려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 이조 참의 이정암에게 황해도의 연안성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이정암은 500여 명의 의병으로 5,000명이 넘는 일본군을 격퇴하는 개가를 올렸다. 광해군은 또 명과 일본군의 화의 교섭으로 전쟁이 주춤해진 1593년 10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명군 지휘부의 요청에 따라 남행길에 올라 무군사(撫軍司)라는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를 순행하고 민심을 살폈다

 

 

험난했던 즉위 과정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광해군의 남다른 활약상을 지켜본 선조는 1594년(선조 27년) 윤근수를 명나라에 파견해 세자책봉을 주청했다.

 

그런데 명나라 예부에서는 선조에게 맏아들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고명을 거부하면서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다섯 차례나 종용했다. 그것은 명나라 황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후계 다툼 때문이었다.

 

당시 황제 신종은 정귀비에게 얻은 주상순을 염두에 두고 장자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명나라 신료들은 만일 조선의 광해군를 세자로 승인해주면 신종이 주상락 대신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일본군의 철수로 한양이 수복되자 명나라의 요청으로 설치된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군대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했다.

 

때문에 조야에서는 광해군이 차기 대권의 주인공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역사는 또 다시 기막힌 상황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1600년 6월, 의인왕후가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선조는 2년 뒤인 1602년에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김제남의 19세 된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그때부터 인목왕후는 정국의 핵으로 돌변했다. 젊고 건강한 그녀가 만일 아들을 낳는다면 광해군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1603년, 인목왕후는 정명공주를 낳자 광해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3년 뒤인 1606년 1월, 드디어 그녀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의 나이 55세, 인목왕후의 나이 23세 때였다.

 

그때부터 조정 신료들은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으로 갈라져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당시 소북의 영수였던 유영경은 세종대의 고사를 예로 들면서 어린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드리기까지 했다.

 

1607년 10월부터 병석에 누운 선조는 만일에 대비하여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어린 영창대군으로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재기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자 당황한 영의정 유영경과 소북 대신들은 그 내용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광해군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듬해인 1608년 1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한 선조는 중신들을 모아놓고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렸다. 그런데 또 다시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 정인홍에게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유영경의 죄상을 발고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숨을 거두었다. 다급해진 유영경은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삼고 수렴청정하라고 인목대비를 부추겼다. 그러나 선조의 유명을 중시한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으로 보위를 잇게 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

 

연립정권으로 당쟁을 잠재우다

그렇듯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1608년 2월 2일, 34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조정의 기풍을 바로잡고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의 확보에 최선을 기울였다. 그와 함께 2월 23일, 비망기를 내려 조정에서 당파의 대립을 없애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늘이 한 세대의 인재를 내리는 것은 그들로서 한 세대의 임무를 완성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사대부들은 논의가 갈라져서 명목을 나누고 배척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제부터는 피차를 막론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광해군은 그런 자신의 의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당시 신망이 높았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전격 임명했다. 아울러 국방과 외교의 전문가였던 이항복이덕형도 중용했다. 그래서 광해기 치세 초기에는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 정승직을 맡았다.

 

정인홍, 유희분, 이이첨 등 대북파 실세들은 이런 인사에 불만이 많았지만 광해군의 뜻은 완강했다. 그는 국방정책과 같은 대사 만큼은 당파에 관계 없이 능력 있는 인물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조정은 이귀, 김류, 정경세 등 서인과 일부 남인들의 연립정권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나이 지긋한 서인과 남인 원로들이 정승으로서 광해군을 보좌했고, 상대적으로 연소한 북인들은 인사와 언론을 담당했다.

 

그렇게 해서 조정이 안정을 되찾자 광해군은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로하고 무너진 국가기반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아울러 왕권 강화에도 박차를 기울였다. 광해군은 우선 세자 시절 자신의 앞길을 막았던 유영경 제거에 나섰다.

 

유영경은 종전 이후 광해군의 선무공신 책봉에 반대했고, 세손의 원손책봉과 혼인을 지연시켰으며, 선조의 전위를 방해한 죗값을 목숨으로 치러야 했다.

 

이윽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광해군의 즉위 사실을 알리는 사신을 파견했다. 그런데 명나라는 엉뚱하게도 요동 도사 엄일괴와 만애민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책봉과정을 조사하게 했다.

 

하지만 왕실에서 막대한 은을 뇌물로 받은 두 사람은 조선 중신들에게 임해군을 박대하지 말라고 종용한 다음 돌아갔다.

 

그 후 광해군은 임해군이 왕위에 대한 집착을 보이자 강화도에 귀양 보낸 다음, 그를 추종하던 고언백, 박명헌, 운원도정 등 100여 명을 처형해버렸다.

 

몇 달 뒤에는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 현감 이직이 1609년(광해군 1년) 5월 3일, 임해군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609년 6월, 드디어 명나라의 사신으로 온 태감 유용이 광해군의 책봉을 허락하는 황제의 칙서를 전해주었다.

 

 

연이은 옥사, 대북파의 무리수

1611년(광해군 3년), 유림의 숙원이었던 사림5현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졌다. 한데 그 과정에서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가 사림과 성균관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조선의 중추랄 수 있는 사림과의 분란은 광해군 정권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이듬해인 1612년(광해군 4년)에는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과 소북파는 영창대군이나 능창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 세자책봉과정을 재심해달라고 요청했다. 대북파는 그 정보를 정적 말살의 계기로 삼았다.

 

 

정적들의 혐의는 당연히 역모였다. 대북파는 황해도 봉산 군수 신률이 병역을 피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한 다음 관련자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역모를 계획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어서 재차 김경립을 고문하여 팔도에 대장과 별장 등을 정해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파와 광해군을 축출하려 했다는 자백을 이끌어냈다. 그의 아우 김익진에게는 팔도도대장이 김백함이라는 자백까지 받았다.

 

그 여파로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 사위 황보신과 일족이 모조리 체포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임을 자인하고,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을 옹립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이때 연루된 인물로는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등 대부분이 소북파 인사들이었다. 그 결과 진릉군을 비롯하여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고 100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1613년에는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이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증살되었다.

 

칠서의 옥이란 조령에서 상인을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이다 붙잡힌 강도 박응서 등 일곱 명의 서얼이 김제남과 역모를 꾀했다는 허위진술에 따라 일어난 옥사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615년에는 신경희의 옥사가 발생했다. 대북파는 능창군이 신경희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했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된 인물이다. 갑작스레 역모의 주인공으로 몰린 능창군은 억울함을 호소하다 자결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가 처형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 오충갑 등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과감한 개혁 정책

광해군의 재위 시절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당쟁의 격화와 환관들의 횡포 때문에 국세가 대폭 약화되었다. 그 틈을 타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여 세력을 과시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3대 쇼군이 되면서, 히라도에 네덜란드 상관을 설치하고 영국과 통상을 허락하는 등 개항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광해군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획기적인 정책을 펼쳤다. 1608년 선혜청을 설치했고, 경기도 일원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간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었다.

 

대동법은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공물을 백성들에게 현물 대신 쌀로 받아들이는 획기적인 조처였다.

 

1611년(광해군 3년)에는 양전사업을 통해 경작지를 넓히고 국가재원을 확충했다. 또 왜란 중에 불타버린 창덕궁을 수리하고 종묘를 중건했으며 사고를 비롯한 여러 관청을 재건했다.

 

또 인경궁과 경덕궁, 원구단을 짓는 등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대북정권은 대규모 토목공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은이나 목재, 석재 등을 바치는 사람에게 관직을 팔았으며, 전국에 조도사를 파견해 돈을 긁어모음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광해군 치세에는 문화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이 간행되었고, <국조보감>, <선조실록>의 편찬되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같은 획기적인 저술도 나왔다. 1616년 유구에서 담배가 들어와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후금의 건국과 광해군의 실리외교

1610년 초반, 흩어졌던 여진족의 통합이 가속화되자 광해군은 비변사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적극적인 정보수집활동을 펼쳤다. 1611년에는 과거 누르하치 진영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었던 하세국에게 6품직 사과(司果)를 제수했다. 그의 여진어 실력과 견문을 활용하여 북방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함이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를 노추(老酋), 여진족을 견양(犬羊)으로 부르며 멸시했지만 그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부추기지는 않았다. 왜란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전란을 맞게 되면 조선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원거리 무기인 조총과 화포 등 신무기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무렵 평지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철기 부대는 적수가 없었다. 이를 직시한 광해군은 침략국이었던 일본과 1609년(광해군 1년)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기유약조)를 체결하여 국교를 재개했다.

 

1617년에는 오윤겸을 회답사로 파견하여 조총, 장검 등을 구입해 오게 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도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광해군의 생각이었다.

 

광해군은 또 병력 확충을 위해 호패법을 실시하고 수시로 무과를 열어 지휘관을 양성했다. 1622년(광해군 14년) 이후에는 모든 무과 합격자들을 변방으로 배치하고,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곽재우를 북병사로 제수하기까지 했다.

 

조선 최후의 보루로 일컬어지는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광해군이 당시 얼마나 북방의 위협에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1616년(광해군 8년) 드디어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건국했다. 과거 아구다가 세웠던 금(金)나라 이래 두 번째로 여진족의 나라가 등장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급히 국방 태세를 점검했고, 대포의 주조를 독려했다.

 

이울러 평양 감사에 박엽, 만포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하고 후금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토록 했다.

그 무렵 후금의 대군은 만주지역을 일통하고 서쪽으로 명나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명나라는 1618년 윤4월 27일, 병부좌시랑 왕가수의 격문을 보내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후금의 군사력이 막강해 명군이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파병을 거부했지만, 이이첨을 비롯한 비변사 신료들은 재조지은을 강조하며 파병을 적극 주청했다.

 

그 무렵 광해군은 폐모 논의와 궁궐 건설 등 내정의 현안들로 골치 아픈 상태였으므로 거듭된 명의 압력과 신하들의 주청이 이어지자 어쩔 수 없이 파병을 수락하고 말았다.

 

1617년에는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다.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던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은 유배형을 당했다.

 

이런 광해군의 연이은 무리수는 영구집권을 노린 대북파의 책동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역모를 빌미로 정적들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지나친 살상과 군주의 패륜을 부추김으로써 민심이 광해군에게 등을 돌리는 부작용을 낳았던 것이다.

 

조선 14대 왕 선조, 인목왕후와 영창대군

 

 

사르후 전투, 광해군의 본심

 

1619년(광해군 11년) 2월, 1만 5천 명의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심양 부근의 사르후 지역으로 출동했다. 이 원정을 심하전역(深河戰役) 혹은 사르후 전투라고 한다.

 

광해군은 당시 명군이 동북 오지인 허투알라까지 장거리 원정을 나선 것을 알고 피로에 지친 명군 지휘부가 조선군을 적극 활용하리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억울한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상황을 직시한 광해군은 어전통사 출신의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한 다음 명군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왕명을 받은 강홍립은 군대를 좌우중영으로 나누어 평안도 창성을 출발, 1619년 2월 23일 압록강을 건넜다. 2월 26일 진자두에 다다른 강홍립은 광해군의 지침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명군 총사령관 양호의 요구대로 화기수

 5,000명을 떼어 명군 우익남로군 사령관 유정 휘하에 배속시켰다.

 

그 후 명군의 성화에 못 이긴 조선군은 군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강행군을 거듭해 3월 2일 허투알라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사르후 지역에 도착했다. 초전에 조-명연합군이 600여 명의 후금군과 싸워 물리쳤다.

 

3월 4일 부차(富車)에 다다른 조선군은 앞서 갔던 명군 본진이 후금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네 개의 부대로 편제되었던 명군이 3월 1일 동시에 허투알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좌익중로군 두송이 공명심 때문에 일찍 출발했다가 귀영가, 홍타이지, 아민이 이끄는 3만 후금군의 매복에 걸려 궤멸당하고, 뒤이어 마림과 유정 등의 잔여부대도 각개격파 당했던 것이다.

 

 

조선군의 처지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조선군의 좌우영이 후금군의 철기의 공격을 받아 선천 군수 김응하, 운산 군수 이계종, 영유 현령 이유길 등이 전사하고 진영이 와르르 무너졌다. 중영에 있던 강홍립은 더 이상 무모한 싸움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병사들과 함께 백기를 들었다.

 

 

<광해군일기>에는 당시 후금군이 통사를 보내와 항복을 종용했다고 씌어 있고, <만주실록>에는 강홍립이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했다고 씌어 있다. 어쨌든 강홍립은 3월 5일 허투알라로 가서 누르하치에게 무릎을 꿇었다.

 

명청 교체기에 가장 중요한 일전이었던 이 사르후 전투 결과 명군은 10만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지만 후금군은 겨우 200여 명을 잃었을 뿐이다. 강홍립의 항복소식이 알려지자 조선의 조야는 들끓었다.

 

강홍립의 처자를 죽이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지만, 광해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명나라 역시 강홍립이 고의로 항복했다고 의심하고 서광계를 보내 재징병을 요구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원정군으로 후금군과 싸우다 순절한 김응하를 추모하는 사당을 짓고 시집 <충렬록>을 편찬하는 등 조선군이 당시 전투에서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를 내외에 선전하면서 명나라 조정을 달랬다.

 

 

인조반정과 폐위, 쓸쓸한 말년

 

광해군의 재위 15년 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대북파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옥사를 일으켰다. 때문에 살아남은 정적들은 은인자중하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급기야 1623년 서인인 김류와 이귀, 김자점 등이 과거에 죽은 능창군의 형 능양군과 손잡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거부했으며, 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임금에서 왕자로 강등된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폐되었다.

 

 당시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을 죽이고 친정을 멸문지화시킨 광해군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보위에 있었던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인조의 만류로 분루를 삼켰다.

 

그 후 병자호란의 패배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는 혹시 모를 청의 광해군 복위를 염려하여 그를 멀리 제주도에 이배했다. 그때 광해군의 아내 유씨는 광해군과 함께 귀양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뒤 1년 7개월 뒤인 1624년 10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씨는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창덕궁에 몰려든 반란군을 향해 “오늘의 거사가 대의를 위한 것이오,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오?”라고 힐난했던 여걸이었다.

 

그 후 광해군은 피붙이 하나 없는 제주 땅에서 홀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땅의 피폐한 민생에 한 줄기 희망을 뿌렸던 조선의 빛은 그렇게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