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11월13일 알칼라의 성 디에고(디다코) 수도자 / 성 대 니콜라오 교황

수성구 2013. 11. 11. 16:55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 당시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격리된 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제가 그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선언해야 동네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기도 전에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린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왜 감사드리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다른 마음이 앞섰을 것입니다. 건강해지기는 하였으나 동네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더 컸을 것입니다. 나병 환자였다는 선입견도 이겨 내야 하고, 무엇을 하며 생계를 이어야 할지, 걸인으로 살았던 습성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 등에 대한 걱정이 앞선 나머지 감사하는 것을 잊었을 것입니다.
극심한 신체장애를 안고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46세에 오토바이 사고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4년 뒤에는 비행기 사고로 말미암아 하반신까지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밤낮으로 매달렸고 또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었습니다. 그는 어느 연설에서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행이 닥쳐오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만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천 가지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천 가지에 대한 슬픔과 고통보다는 나에게 남아 있는 구천 가지를 선택하여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온갖 걱정거리에만 마음이 사로잡힌 채 감사해야 할 것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가만히 돌아다봅시다.
축일:11월13일 알칼라의 성 디에고(디다코) 수도자 / 성 대 니콜라오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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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1월13일

알칼라의 성 디에고(디다코) 수도자

ST.DIDACUS(Diego,Diaz)

San Diego di Alcala Religioso

Alcala del Puerto, Siviglia, ca. 1400 -

Alcala de Henares, Madrid, 12 novembre 1463

Canonized :1588 by Pope Sixtus V

diocese of San Diego California, Franciscan laity, Franciscan lay brothers

 

 

디에고(1400 - 1463)는 에스빠냐 산 니꼴라스 태생으로

젊은 시절 3회에 들어가 3회 지도 신부의 지도를 받아 은둔 생활을 하였다.

후에 이리자파에서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신앙 생활의 통찰력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을 매료시켰다.

 

1442년 새로 발견된 카나리아 섬에 파견되어 그 곳에서 보나벤투라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성 요한 까페스트라노가 총봉사자로 재직하는 동안

1450 년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시성식 때문에 그를 로마로 불렀다.

예식에 참가한 형제들 사이에 전염병이 생겼을 때

그는 희생자들을 보살피느라 자기 시간을 송두리째 바치기도 하였다.

1463년 11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의 유해는 에스빠냐로 이장되었으며 썩지 않은 채로 보존되고 있다.

디에고는 작은형제회 평형제들의 주보로 선정되었다.

식스또 5 세가 시성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요한 까페스트라노 축일:10월23일.게시판1434번.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축일:5월20일.게시판1169번.1772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1400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란치스코회원이 된 성 디에고는

문지기 수사로 있으면서 아픈 동료와 거지들을 극진히 돌보았으며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였다.

 

또한 병자들을 치유하고 부족한 빵을 늘리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애덕과 경덕에 있어 높은 성덕을 인정받아 수도원장이 되었다.

1463년 십자가를 굳게 쥐고 세상을 떠났으며 1588년 시성되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세빌레 근교에서 태어난 디에고는 한때 은수자로 고적한 삶을 살다가, 프란치스꼬회의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그는 카나리아 섬으로 파견되어, 그곳의 수도원 문지기 수사로 일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뛰어난 사랑으로 큰일을 이룩하여 성덕이 탁월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배우지 못한 그가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된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 번의 임기를 채우고 그만두었다.

그는 여생동안을 스페인의 각 수도원을 다니며 하찮은 일을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그의 높은 성덕은 프란치스꼬회뿐만 아니라 온 교회를 비추었던 것이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에서)

 

 

 

 

 

복자 주니페로 세라 축일:7월1일 (게시판1250번)

Blessed Junipero Serra, OFM (1713-1784)

 

우리에게도 익숙한 샌디에이고, 샌프란치스코 등

캘리포니아 해변을 따라 늘어선 도시들의 이름은 성인들의 출석부 같다.

성 디에고, 성녀 클라라, 성 프란치스코...

 

이처럼 캘리포니아 해안의 도시들에 성인의 이름이 붙은 것은

신대륙에 처음 도착한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선교 수도원을 세우면서 성인들의 이름을 붙였고

그 수도원을 중심으로 마을과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수사들은 하루 종일 걷다가 해가 져서 쉬어야 하는 곳에 성당 터를 잡았는데

그렇게 해서 세워진 성당이 무려 21곳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9개 성당은 주니페로 세라가 세웠다.

 

San Diego(1769년), San Carlos Borromeo(Carmel mission,1771년)  San Antonio (1771),

San Gabriel (1771), San Luis Obispo (1772), San Francisco (1776), San Juan Capistrano (1776),

Santa Clara (1777), San Buenaventura (1782).

 

그는 1784년 8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그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그는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여행하였기에 온 피로로 탈진 되었던 것이다.

그는 35년간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1987년 9월 17일 요한 바오로 2세는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캘리포니아의 Carmel Mission을 들렀다.

이 때 교황은 Junipero Serra의 무덤에 헌화하였다.

1988년 9월 25일 교황은 이 프란치스칸 복음 선포자를 복자품에 올렸다.

 

 

 

 

 

 

축일:11월13일

성 대 니콜라오 교황

ST. NICHOLAS I

ST. Nicholas the Great

San Niccolo I Papa

Roma, 819/822 - Roma, 13 novembre 867

(Papa dal 24/04/858 al 13/11/867)

105 대 교황

 

 

로마의 귀족 출신인 그는 로마의 사제로서 교황 세르지오 2세를 도와 성청에서 일하였고,

레오 4세의 부제, 베네딕또 3세의 고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858년 4월 22일, 선임 교황 베네딕또를 계승하여 교황이 되었다.

 

그는 즉시 늘 문제시 되어왔던 결혼의 거룩함과 불가해소성을 역설하였고,

황제의 조카인 로테르 2세 국왕의 혼인이 불법이라 규탄하는 등 수많은 정치 문제에 말려들게 되었다.

 

또 콘스탄티노블의 총주교좌의 오랜 분쟁, 라벤나의 요한 대주교의 문제,

라임스의 힌크마르의 야심 등으로 그의 재임 기간은 상처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관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므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정의감은 높은 존경을 받게 하였다.

 

성 니꼴라오는 "대" 교황이란 칭호를 받는 3명의 교황 중의 한 분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축일:11월10일.게시판1462번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9월3일.게시판134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105대 교황 성 대 니콜라오 1세

(Papa dal 24/04/858 al 13/11/867)

 

 

 

 

 

 

축일:11월13일(8월15일)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가
Santo Stanislao Kostka
St. Stanislaus Kostka
Born:October 1550 at Rostkovo, Poland
Died:14 August 1568 on the feast of the Assumption
Beatified:19 October 1605 Pope Paul V
Canonized:31 December 1726 by Pope Paul V
Stanislao = la gloria dello stato, dal polacco(the Gloria of the state, from the Pole)

 

 

폴란드 로스트코보 성에서 태어난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가(또는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원로원의 아들이다.
그는 개인교수로부터 교육을 받고 14세 때에 비엔(Vienne)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근면과 신심 그리고 고행으로 유명하였는데, 수차례에 걸쳐 환시를 보았다.
그는 마침내 예수회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비엔의 관구장으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그는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와 함께

350마일을 걸어 딜렌겐으로 갔다가 다시 로마(Rome)로 갔다.


그는 마침내 1567년에 예수회에 입회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더욱 엄격한 고행을 하였고, 미사 중에 자주 탈혼하였으며,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예수회원으로서 단지 9개월을 지낸 뒤 사망하였다.
그는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1726년에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성인전]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1550 - 1568) 

                예수회스타니슬라오수련원홈에서 www.jesuits.or.kr/vocation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는 겨우 18살에 1년이 채 안 된 수련자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폴란드의 마조비아에 있는 로스트코바 가문 출신으로 대략 1550년 중반에 태어난 폴란드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크록짐의 영주였고 국가회의 의장이었다. 비록 스타니슬라오가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의 부모는 주의를 기울이며 그를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시켰고 모든 사치와 자기관용으로부터 멀리 하게 하였다.
 

스타니슬라오가 14살이 되던 1564년에 그의 아버지는 그와 그의 형인 폴을 당시에 특히 귀족들을 위해 문을 막 열었던 빈의 예수회 대학에 입학시켰다. 처음 일곱 달 동안 그 두 형제는 학교 옆에 숙소를 마련해 살았다. 그러나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그 건물을 회수해서 셋방을 구했다. 1565년 3월에 항상 안락함을 찾던 폴은 킴버커 의장 댁의 방들을 빌렸고 코스트카 형제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스타니슬라오는 인문학 과정을 밟았고 성녀 바르바라에 대한 많은 신심이 있었다. 신중하고 조용한 성격의 그는 모든 불필요한 손님과의 접촉을 피하고 공부에 열중했으며 검소한 의복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성찰로 보냈으므로 폴은 그를 예수회원이라고 비꼬아 놀렸다. 이제 그들은 의장의 집에 있게 되었고 더 이상 예수회원들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지 않게 되었다. 교만하고 잘난 척하는 폴은 스타니슬라오의 천성적인 공손함과 겸손함을 폴 자신의 세속적이고 행복한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로 해석했다. 그 결과 폴은 동생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스타니슬라오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불쾌감과 분노를 주었고 폴은 그를 때리고, 발로 차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앙갚음하였다. 동생에 대한 폴의 부당한 처사는 18개월간 지속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스타니슬라오의 확신을 깨는 대신에 덕행의 시험으로서 그를 강하게 하고 예수회원이 되도록 격려했음에 틀림없다.
 

1565년 12월 중순에 스타니슬라오는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중태에 빠졌고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병의 심각성 때문에 그는 병자성사를 청했으나 폴은 그의 병세가 심하지 않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사실 이를 연기한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킴버커 의장 댁이 독실한 루터교 집안이라서 병자성사를 주러 사제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거룩한 성체 안의 주님을 모시려는 열망으로 불타오른 스타니슬라오는 폴이 사제를 불러주지 않을 것을 깨닫고 그의 신심의 수호자인 성녀 바르바라에게 죽기 전에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겸손한 기도는 가장 인상적인 방식으로 응답 받았는데 바로 성녀 바르바라와 두 천사가 성체를 모시고 그의 방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 방문의 위로가 지나가자 성모님께서 팔에 아기예수를 안고 스타니슬라오를 찾아오셨고 어머니처럼 성인의 팔에 예수님을 건네주시면서 그가 예수회에 입회할 것임을 알려주셨다. 이 신비스러운 은혜 뒤에 스타니슬라오는 회복되었고 다시 대학을 다녔다.


그는 빈의 예수회 관구에 입회에 대하여 문의하였고 관구에서도 받아들이고 싶어 했지만 그가 먼저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미성년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타니슬라오는 부모가 자신이 예수회원이 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어려운 처지를 다른 예수회원에게 전했고 그는 스타니슬라오에게 아우구스부르크로 가서 독일 관구의 베드로 카니시우스 신부에게 입회 허가를 요청할 것을 제안했다. 이제 확신에 찬 스타니슬라오를 낙담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567년 8월 10일 아침, 그는 조용히 빈을 떠나 그 즉시 도시 외곽에서 순례자의 허름한 차림새를 하고 아우구스부르크로 향했다. 동생의 성공적인 탈출에 분노한 형 폴은 성인을 뒤쫓았다. 그가 동생을 따라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순례자 차림의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쳤고 그는 동생이 다른 길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아우구스부르크를 향하여 450마일을 걸은 스타니슬라오는 딜링엔을 방문 중인 카니시우스 신부를 만나기 위해 다시 여행을 했다. 신념에 찬 스타니슬라오가 그 관구장을 만났을 때,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빈의 예수회원이 자신을 위해 써준 소개장을 주었다. 스타니슬라오는 그의 신심을 단번에 알아보고 예수회 입회를 허락한 베드로 카니시우스에게 마음을 열었다. 스타니슬라오가 아직 폴란드에 매우 가까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력이 독일까지 미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카니시우스 신부는 곧 로마로 가려고 했던 두 예수회원과 같이 가도록 조정했다. 그러나 출발하는 날까지 그는 딜링엔의 성 예로니모 학교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어린 귀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돌봐주었다. 9월 하순에 스타니슬라오와 두 동료들은 험한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가는 긴 여정을 떠났고 10월 25일에 도착했다.


여행을 무사히 마친 세 명의 예수회원들은 총장인 프란시스 보르지아 신부가 있는 곳으로 갔고 성인은 그에게 카니시우스 신부가 써준 소개장을 주었다. 보르지아 신부가 다음과 같은 스타니슬라오에 대한 소개장을 읽었다. “그는 폴란드 귀족이고 이름은 스타니슬라오입니다. 그는 훌륭하고 지적인 청년으로서... 그는 이곳에 도착하여 그의 항구한 열망을 이루는 데에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몇 년 전 그는 스스로 확신을 갖고 예수회 입회를 지원했었습니다. 비록 아직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는 가족의 방해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로마로 보내지는 것을 대단히 원했습니다. 또한 영신적으로 많이 진보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저희는 그가 훌륭한 일들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 새로운 수련자는 게슈 지역 예수회에서 3개월 가량 보냈고 그런 다음 1568년 초에 로마 대학에서의 한 달을 거쳐 성 안드레아 수련원에서 나머지 기간을 보냈다. 스타니슬라오의 수련기는 단지 10개월에 그쳤지만 그 기간 동안 그의 기도는 순수해졌고 하느님과의 결합은 확고해졌다.

 


1568년 8월 초, 스타니슬라오는 8월 15일에 죽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8월 10일에 열이 나서 시달렸지만 그의 상태가 특별히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8월 14일에 그는 자신을 돌보는 또 다른 수련자에게 내일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수련자는 스타니슬라오가 심각하게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흘려들어 버렸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그는 갑자기 악화되었고 모든 힘을 잃은 듯 보였다. 그 수련자는 스타니슬라오가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 봉헌될 방에서 동료들과 함께 그가 받을 병자성사를 준비했다. 그는 병자성사를 받고 난 다음에 밤이 되어 모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동료들과 즐겁게 대화했다. 예수회원들이 떠나간 뒤에 스타니슬라오는 기도를 하고 “저의 마음은 준비되었습니다. 오 주여! 저의 마음은 준비되었습니다.” 라고 찬송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다음날 아침까지 그 바닥 위에 남아있기를 청했다. 새벽 3시 무렵, 그는 기도를 멈췄고 큰 기쁨에 의해 환해진 얼굴로 성모님께서 천사들과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오고 계신다고 가리키면서 방 안의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18살의 스타니스라오는 순명과 사랑으로 순수한 영혼을 주님께 봉헌하였다. 때는 1568년 8월 15일로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스타니슬라오는 예수회 성당 오른편에 묻혔으나 지금은 그 유해가 로마에 새로 지은 성 안드레아 델 퀴리날레 성당의 기념 제단 밑에 안치되어 있다.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는 죽은 지 36년만인 1605년에 시복되었고 이 영광을 받은 최초의 예수회원이 되었다.

그는 베네딕도 13세 교황에 의해 1726년 12월 31일에 시성되었다.

그의 기념일은 11월 13일이다.

 


 

*성녀 바르바라 축일:12월4일.게시판1506번.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가니시오)사제 축일:12월21일.게시판1531번.
*성 프란시스 보르지아 축일:10월3일(10월10일)게시판1415번.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축일:7월31일.게시판1295번.

 


 

[IHS]성 안드레아 보볼라 순교자 축일:5월15일.게시판1766번.
*성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축일:4월11일,게시판1707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Dedication to Jesus

 

Dedication to Jesus

Lord Jesus Christ,

take all my freedom,

my memory,

my understanding, and my will.

All that I have and cherish you have given me.

I surrender it all to be guided by your will.

Your grace and your love and wealth are enough for me.

Give me these,

Lord Jesus, and I ask for nothing more. Amen.

 

- St Ignatius Loyola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저는 이것으로 만족하리이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봉헌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