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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3일간 사랑|◈─……

수성구 2017. 12. 14. 06:04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3일간 사랑|◈─……고전글♡漢詩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3일간 사랑

 

 

 

 

[ 원효대사와 자루빠진 도끼 ]

 

 



 

우리나라 고승중에서 대학자이자 불교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분이 원효대사 이지요

 

대사님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길에 해골에 담긴물을 마신뒤

 

“일체가 마음에 달렸다”고 하면서 크게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전국을 방랑하는 유행승(遊行僧)이 되었다 하네요

 


 

그는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에서‘정토의 깊은뜻은

 

본래 범부(凡夫)를 위함이지 보살을 위함이 아니다‘ 라며

 

불교 대중화에 힘쓰셨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비롯하여

 

240여편에 이르는 불교경전(佛敎經典)을 집필하셨다 하지요

 


 

원효대사는 한곳에 머물지 아니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주유(周遊)하며

 

불교 대중화에 힘쓰셨기에 전국사찰중 120여곳이

 

원효대사가창건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네요

 

원효는 34세때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현장법사와 규기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꾼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날 옥살이를 하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 왔어요

 


 

10년후 45세가 되던해에 두번째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다를 통해 당나라로 가기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는 도중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 폭풍우를 만나 깊은 산속에서 길을잃고 헤메다

 

겨우 토굴을 발견하고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지요

 

대사는 한밤중 천신만고(千辛萬苦)끝에 토굴을 찾아 누우니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어요

 


 

얼마를 잤을까?

 

심한 갈증으로 잠이 깼는데 왠 바가지에 물이 고여있어

 

캄캄한 밤중이라 아무 생각없이 그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지요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 였는데

 

물을 마시던 그릇은 바로 해골 바가지 였어요

 

대사는 여기서 활연대오(豁然大悟)

 

"환하게 크게 깨우침"을 얻었지요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라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활연대오를 한 스님은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또는 거지행세를 하며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들어갔으며

 

이런 생활을 계속 하면서도

 

<화엄경>을 알기쉽게 주석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면서 원효대사는 미친듯이 이곳 저곳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외치고 다녔어요

 


 

수허몰가부위작지천주(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것인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 " 라고

 

동네방네 노래하며 외치고 다녀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지요

 

 

 


그런데 태종 무열왕이 풍문으로 들려오는 그 노래를 듣고

 

그 뜻을 알아차렸어요

 

무열왕이 말하기를"원효가 아마 귀한집 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아버지를 닮아 큰 인물이 태어나면

 

나라에 더 큰 복이 될것이다"라고 하였지요

 

즉 "자루빠진 도끼"는 ‘과부’를 뜻함이요

 

"하늘을 받칠 기둥"은 '국가의 인재'를 뜻함 이었지요

 

그래서 내심 원효에게 줄 적당한 과부를 구하던 무열왕에게

 

좋은 묘안이 떠올랐어요

 


 

마침 오래전 백제와의 전쟁에서 장열히 전사한

 

부마(사위)가 생각났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결혼한지 3일만에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궁주가 떠올랐던 것이지요

 

원효는 워낙 박식하고 뛰어난 대사인지라

 

자신이 자주 불러 조언을 구하는 까닭에 인연도 깊었고

 

공주 또한 그를 흠모하는 눈치였어요

 

한번은 공주가 그를 위해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한적도 있었지요

 


 

몇일후 무열왕은 궁중 내관을 시켜

 

원효를 불러 들이라고 명하였어요

 

내관은 어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아다니다가

 

남산(南山)아래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고있는

 

원효와 만나게 되었지요

 

그 내관이 자신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미리 알고있던 원효는

 

내관의 모습이 가까이 오자 짐짓 발을 헛디딘 척

 

일부러 문천교(蚊川橋)아래 냇물에 풍덩 빠져 버렸어요

 


 

헐레벌떡 뛰어온 내관이 물에빠진 원효를 대궐로 인도하여

 

무열왕앞에 알현케 했는데 이에 무열왕은

 

온 몸이 물에젖은 원효를 보고 크게 놀라

 

요석공주를 불러 대사님을 요석궁으로 모시고가

 

물에 젖은 옷을 갈아 입히고

 

저녁상을 잘차려 뫼시라고 명하였지요

 


 

요석궁으로 인도된 원효는

 

요석공주가 쓰던 향기나는 옥수로 목욕을 하고

 

요석공주가 건네준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푸짐한 저녁상에 반주까지 곁들이게 되었어요

 

어여뿐 공주랑 단둘이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요석공주의 아리따운 향취와 풍만한 육체에 현혹되어

 

불심도 저버리고 말았지요

 


 

요석공주 또한 3일간의 신혼생활이었지만

 

이미 사내와의 희열넘치는 정분을 아는지라

 

뜨거워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원효대사의 늠늠한 모습에 빠져들고 말았어요

 

원효대사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공주의 향기가 성욕을 자극하는데

 

선화공주가 과부임을 아는지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지요

 


 

"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는데

 

자루빠진 도끼가 어디 없을까요? 허허 "

 


 

그러자 선화공주가 웃으며 말하였어요

 


 

“ 대사님은 불심만 깊으신줄 알았는데

 

대목(목수) 일도 하시나봐요? 호호 "

 


 

대사님이 점잖게 대답했지요

 


 

“ 허허 물론이지요~ 다만 하지 않을뿐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옛날 부처님의 큰제자인 아난도

 

마등(冕)이라는 여자것을 빌려 쓴적이 있지요 ”

 


 

선화공주가 재미있다는 듯 요염한 눈빛을 보내며 말하였지요

 


 

“ 그럼 대사님께서도 음사(淫事)의

 

묘미(妙味)를 아신다는 말씀인가요? ”

 


 

이에 대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대답했지요

 


 

" 옛말에 생지안행(生知安行)이란 말이 있어요

 

인간은 태어나 배우지 않아도 쉽게 행할수 있다는 뜻이지요

 

기둥을 깎는다는 것은 그런것이 아닐런지요? "

 


 

이 말을 들은 선화공주는 차츰 마음이 동하여

 

군침을 삼키기 시작 했어요

 


 

" 호호 그러시다면 자루빠진 도끼를 빌려 드릴수도 ... 호호 "

 


 

하면서 선화공주가 대사님 품에 안기자

 


 

“ 선가에는 극락세계가 있지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극락세계지만 한번 가보고 싶군요 "

 


 

하면서 슬며시 선화공주의 개미같은 허리를 끌어 앉자

 

공주는 벌써 무아지경에 이른듯 온몸을 비비꼬기 시작 했지요

 


 

“ 그럼 우리 음사의 묘미를 한번 느껴 볼까요? "

 


 

하면서 대사의 하초가 공주님의 옥문앞에 당당하게 도달하여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지요

 

공주는 대사님의 우람한 양물에 요석궁이 떠나가라

 

운우의 극치를 느끼며 업치락 뒤치락

 

끝과 끝의 경계를 넘나들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 대사님이 나를 속였군요 극락이라 하셨으면서

 

이토록 사람을 죽게 만드니 어찌 불심깊은

 

대사님이 ~ 아 ~ 이럴수가 ~ .... "

 


 

" 허허 그런가요? 이또한 자비를 베푸는

 

선도(禪道)의 길이 아닐런지요? "

 


 

하면서 더세게 하초에 힘을 실었지요

 


 

" 아 ~ 아~ 선도라 ~ 아 ~ 선도라 ~~

 

너무 좋은 선도(禪道)이군요 ~~ "

 


 

이렇게 천지개벽을 하듯 요란하게 통정을 끝내고

 

숨가쁜 요석공주가 평온을 찾았을때

 

대사님이 태연하게 말하였지요

 


 

“ 불법이란 참으로 신통한바가 있어

 

인도환생(人道還生)케 하는지라

 

사람을 죽게도 할수있고 다시 살게도 할수있는 것이지요 ~

 

나무관세음 보살 ... "

 


 

" 호호 그런가요?

 

역시 대사님은 불심이 깊으시니

 

선도(禪道)의 힘 또한 대단 하시군요 호호 "

 


 

하면서 대사님의 넓은 가슴을 파고드니

 


 

" 허허 그런가요? 공주님은 소승을 자꾸

 

성심(性心)으로 이끄시는군요 "

 


 

하면서 아리따라 공주님의 농익은 육체를 어루만지다가

 


 

"성심(性心)또한 불심(佛心)이니 ~ 극락이 저기로다 ~

 

나무관세음 보살 ~~ !! "

 


 

하면서 또다시 극락의 세계로 공주님을 인도 했으니

 

구름이 비를 만난듯 ...

 

뇌성번개가 폭풍을 만난듯 ...

 

업치락 뒤치락 ...뜨겁고 뜨겁게

 

서로의 몸을 탐닉하며 운우지락의 늪에 빠져

 

3일 밤낮을 열낙(烈樂)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요

 


 

그러나 인생사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법

 

꿈같은 삼일 밤낮이 지나고 나서 원효는

 

요석에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떠나려고 하자

 

요석공주는 요염한 자태로 원효대사의 넓은 가슴을 어루 만지며

 


 

"어딜 가시든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은

 

이가슴에 티끌보다도 작고 먼지보다도 작은 소저 이지만

 

이 넓은 가슴속 한구석에 소저가 기댈곳은 없는지요?"

 


 

라고 했어요 그러자 원효는 한참을 망서린후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소?"

 


 

하고 답하며 홀연히 일어나 요석궁을 뒤로한체

 

발걸음을 옮겼지요

 

요석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냈어요

 

 

 


그리고 그 후 단 3일간의 사랑이었지만

 

요석공주는 배가 불러오고 열달만에

 

아들 "설총"을 낳았지요

 

후일 신라 10현의 한사람이며 우리 옛 문장

 

향찰"이두"를 완성시킨 설총이 바로 원효의 아들이지요

 


 

요석은 아들을 낳아 원효를 바라보듯 훌륭하게 키우며

 

먼발치에서 몸을 숨기며 소식을 듣고 보곤 했는데

 

죽을때까지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요석공주와 열락의 밤을 보내고 서라벌을 떠난 원효대사는

 

스스로 실계(失戒)했기에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으로 팔도를 유랑하다가

 

양주근처를 지날무렵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하면서 파계한 스님이었지만

 

새롭게 깨달음을 얻기위해 인적이 드문 소요산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의 수행을 시작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요염한 심마니 아가씨 한명이

 

한밤중에 나타나 하룻밤 묵어가기를 간청하며

 

수행중인 원효대사를 유혹 했어요

 

그러나 새로운 마음으로 용맹정진한 원효대사는

 

단호히 심마니 아가씨의 청을 뿌리쳤지요

 

그리고 답하였어요

 

“마음이 생하면 옳고 그르고 크고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는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멸하면 상대적 시비의 법이 없어지는 것이니

 

나 원효에게는 무애자재(無碍自在)의 힘이 있노라"

 


 

라고 다시 말해 한 생각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만법이 멸한다는 진리를 .... 역설했지요

 

그러자 요염한 심마니 아가씨는 빙긋이 웃으며 사라졌어요

 

이에 원효대사는 심마니 아가씨가

 

관세음보살의 현신임을 알아차리고 그곳에 정사를 지은뒤

 

무애자재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정사 이름을

 

"자재암"이라 칭했다 하는군요

 

 

소요산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담긴 굴

 


 

그러나 여자의 깊은 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원효대사의 자재무애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원효대사을 사랑한 요석공주의 일념은 변함이 없었지요

 

요석공주는 원효대사가 정진하고 있는 소요산 입구에

 

별궁을 짓고 아들 설총과함께 원효대사을 연모했으며

 

그 터가 지금은 "요석공주별궁지"로 남아 있지요

 

그리고 동두천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별궁지 옆에 요석공원을 만들어놓았고

 

소요산의 한 봉우리를 어여뿐

 

"공주봉"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어요

 


 

또한 설총은 원효대사(아버지)에 대해

 

지극하고 각별한 효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낙엽이 떨어지던 어느 가을 날 설총은

 

원효대사가 머무는 산사를 찾아가니

 

원효대사가 마당을 쓸고 있었어요

 

설총은 얼른 뛰어가 마당비를 받아들고

 

산사의 앞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깨끗이 쓸고 난뒤

 


 

“아버님 마당 다 쓸었습니다.”

 


 

라고 말을 하자 원효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정말 낙엽하나 없이 깨끗하게 잘 쓸었구나 !!"

 


하면서 마당 한쪽구석에 쓸어 모아둔 낙엽을 주워와

 

마당에 다시 뿌리며 설총에게 말하기를

 


 

"총아! 가을마당은 이렇게 낙엽이 떨어져 있어야 제격인 것이야 !!"

 


 

이 말을 남기고는 어데론가 홀연히 떠나가 버리자

 

설총은 원효대사의 선문답 같은 이 말 한마디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군요

 


 

원효대사가 70세 되던해 음력 3월30일 열반에 들자

 

설총은 아버지가 못견디게 그리웠고

 

열반에 드신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어요

 

그래서 아버지인 원효대사를 화장하고 난 후 남은 재와

 

진흙을 이겨 아버지의 모습을 빗었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오래 주석하고 계셨던 분황사의 법당 한쪽에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모셔두고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렸어요

 


 

그러던 어느날 아침 여느때처럼 설총은

 

분황사 법당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의 머리가

 

옆으로 돌려져 있는것이 아닌가!!

 

분명히 정면을 바라보도록 모셔 놓았는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이 머리를 돌리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수 없었지요

 


 

그후부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은 계속 설총이 아침마다

 

절을 하던 법당의 중간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네요

 

목을 돌린 원효대사의 소상은 고려 중기까지

 

분황사의 성보(聖寶)로 모셔져 있었으나

 

고려때 몽고군의 침입으로

 

분황사와 함께 불타버렸다 하는군요

 


 

재경안동향우회 南光浩 님이 올린글을 편집해 봤습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요석공주 - 3일간의 사랑으로,

 

신라의 십현(十賢)인, "설총"을 낳고

 

고승을 파계시킨 비련의 여인

 

당대 최고 고승-원효대사를

 

민중 품으로 인도한 대보살

 


 


요석(瑤石)공주,

 

한국이 낳은 최고의 고승 원효(元曉)대사를

 

파계시킨 사연 많은 과부 요석공주

 

후대인들의 기록에서는

 

요석과 원효의 관계를 ‘3일간의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효의 연인, 요석은 행복했을까,,,,,,,?!

 

삼국유사에는 요석의 목소리가

 

단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기에

 

그 주변 이야기들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수밖에 없다.

 

 

원효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어느 날

 

비틀거리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수호몰가부,아작지천주]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그리하면,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아무도 그뜻을 아는사람이 없었으나

 

신라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서는 요석궁의 과부 공주에게

 

원효를 데려가라고 했다.

 


 


명을 받은 궁리(宮吏)가 원효를 찾으니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는 중이었다.

 

문천교에 숨어있던 나졸들이 원효에게

 

요석궁으로 갈것을 청하나

 

대사께서 껄껄 웃으며 거절하자

 


 


무예를 겨루어서 이기면,

 

대사의 뜻대로 하라는 나졸들의 뜻에 따르나

 

나졸들이 덤비는대로, 원효는

 

이들을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빠뜨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나졸마져 황황해지자

 

원효는 일부러 문천교 아래에 빠져

 

옷을 적시고는,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을 찾아갔다.

 


 


3일간 요석궁에 머문 원효는

 

그 길로 궁을 나서고,

 

공주에게는 태기가 있더니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인, 설총을 낳았다.

 

 

...중략...

 

 

원효가 기거하는 혈사(穴寺) 바로 옆집에

 

설총이 살았으며,

 

원효가 죽은 후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유골을

 

조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의 뜻을 표했는데,

 

어느 날, 설총이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설총이라는 존재는

 

원효와 요석의 관계를 유추하는데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한다.

 


 


만약, 원효가

 

요석공주와 그 아들을 평생토록 내팽개치고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며,

 

후일 위대한 학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자신의 표상으로 삼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가 주석하는 절 바로 옆에 집을 짓고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설총은 불교학자가 아니라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학자가 되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평생 그 그림자를 쫒은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우뚝 선, 거목으로 자란 것이다.

 

 

이는 원효가 불교의 틀을 넘어선

 

대자유인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설총 또한 사자에게서 태어난

 

또 한 마리의 당당한 사자였음을 반증한다.

 


 

 

“한 뭉치의 흙을 던지면,

 

개는 흙뭉치를 따라가 물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을 좇아가 문다”는

 

아함부 경전의 가르침처럼

 

원효에게서 배출된 아들은

 

아버지가 받아들인 불교를 배우는 대신

 

아버지가 불교를 통해 완성해낸

 

‘걸림이 없는’ 삶의 방식을 배웠던 것이다.

 

그 가운데 요석이라는 존재가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을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분명 원효는

 

요석이나 설총만을 위해 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 것도 짐작이 가능하다.

 

 

 

경주-평택, 원효대사 순례 탐방길 조성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는

 

한 길로 생사를 뛰어 넘는다’는

 

화엄경의 구절이 적힌, 호리병을 들고 다녔던

 

방랑객에게

 

성욕도 장애가 되지 못했거늘,

 

하물며, 처자식이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요석은 원효로 하여금

 

아무 것에도 걸림 없는 삶을 열어준

 

최고의 도반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녀의 크고 넓은 품은 원효로 하여금

 

청정비구라는, 법력 높은 고승이라는,

 

또 신라 최고의 엘리트라는

 

모든 ‘멍에’를 훌훌 벗겨주었던 것이다.

 

 

요석도 여인인 이상, 정인을 그리워하며

 

때로는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며,

 

때로는 절망이 불길처럼 번져

 

가슴을 새까맣게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토록 사랑한 사람인데

 

어찌, 마음 한구석에

 

조금의 원망과 설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흔들림 없는 사랑 앞에선

 

혼란의 폭이 조금씩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바위 같은 사랑!

 

그 사랑이 비록,

 

자신이 바라는 애착의 형태가 아닐 지라도

 

그 마음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는

 

그 확신이 들어서는 경계에 이르면

 

그 사랑은 상대를 독점하겠다는 소유욕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원력의 에너지로 승화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남자는 좋은 여자를,

 

훌륭한 여자는 훌륭한 남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효가 살았던 시절은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이상을 위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젊은이들의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자식과 지아비를 잃은 신라인들에게

 

어찌, 승리감만 가득했겠으며,

 

나라를 잃고 노예의 처지로 전락한

 

백제와 고구려인들에게

 

어찌, 이해와 자비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었으랴.

 


 


이 혼란의 시기에 스스로 파계승이 된 원효는

 

주정뱅이들과 저자거리에서 노닐고

 

거지와 도적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가르치며

 

한마음으로 생사를 뛰어넘는

 

대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일승사상은 작게 본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크게 본다면

 

범부의 삶과 부처의 삶이 다르지 않음의 설파이다.

 

 

삼국통일이라는 혼란의 시기는

 

원효라는 위대한 고승을 배출했고,

 

그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비구승의 모습으로

 

후대의 사표가 되는 대신,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보살의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석공주는 원효를 사자좌에서 끌어내

 

민중 속으로 보낸 인도자에 다름 아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통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사나이, 원효.

 


 


그를 향한 그리움에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 해도

 

그녀는 커다란 그 기둥을 자신의 의지처로 삼았을 것이며,

 

그를 통해 보살도를 향한 구도의 열정을 불태웠을 것이다.

 

 

사실 원효는

 

그 누구보다 계율을 중시한 스님이었다.

 

그는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지을 정도로

 

계율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계는 작은 구절에 연연하는

 

소승의 계가 아니라

 

그 계 또한 많은 인연에 의탁해서 생겨난

 

유동적인 대상이었다.

 


 


욕망에 집착하면, 그 사랑은 죄가 되지만,

 

고요한 마음으로 성찰하는 욕망은

 

진리로 가는 해탈문이 된다.

 

 

사랑 때문에 극락에도 갈 수 있고,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다.

 

중생들의 사랑이야 그 극락과 지옥을

 

하루에도 수천번씩 오르내리는 과정이지만,

 

위대한 성사 원효의 사랑은 자신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한 여인과 더불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보살도였으며,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대자유의 길이었다.

 

그런 원효의 금란가사를 벗기고

 

민중으로 인도한 대보살이

 

바로, 요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