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10월 19일/십자가의 성바오로 사제

수성구 2013. 10. 15. 17:5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강의를 많이 하고 있는 김길수 교수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라는 책에서는 조선 시대의 두 사람의 삶과 죽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조선 시대 최고의 충절을 보여 준 문신 성삼문이며, 다른 한 사람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신념 때문에 목숨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성삼문은 죽기 전에 다음의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 돌려 보니 해가 서산으로 저무는구나./ 황천 가는 곳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 나는 어디서 머물꼬.” 이 절명 시에서 우리는 성삼문이 생을 마감하면서 짙은 허무를 느끼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반면, 김대건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하여 일해 왔습니다. 이제는 이 목숨을 바치려 합니다. 바야흐로 나를 위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이 말에서 김대건 신부는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생각해 보건대, 두 사람의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인 가치에 따른 신념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증언한 모습은 인간적 차원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김대건 신부를 통하여 증언하신 것입니다.

//



 

축일;10월 19일

십자가의 성바오로 사제

San Paolo della Croce Sacerdote

St.Paul of the Cross

St. Paulus a Cruce, C

3 January 1694 at Ovada, Piedmont (northern Italy) as Paolo Francesco Danei

-18 October 1775 at Rome, Italy

Canonized:1867 by Pope Pius IX

 

 

이탈리아의 오바다 태생인 바오로 프란치스꼬 다네이는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은 탓인지,

15세 때에 이미 까스텔라조의 자기 집에서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행하였던 것이다.

1714년, 그는 터키인들과 사우는 베니스군에 입대하였으나, 기도와 보속생활에 이끌려 명예 제대를 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몇해를 은거하던 중, 1720년에 예수의 성명과 흰 십자가가 그려진 고난의 뺏지를 검은 옷에 다신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검은 복장의 가슴에 심장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십자가와 예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수도복을 보여 주셨다고한다.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심이 깊었음.)

이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는 수도회 창설을 명하셨다고 한다.

그의 환시가 올바른 사실임을 인정한 알레산드리아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창설에 관한 허가를 받게 된 바오로는 40일간의 피정을 통하여 회칙을 초안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요한 밥띠스따와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했으나, 처음에는 거절당하였지만,

1725년의 방문에서는 교황 베네딕또 13세로부터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727년에는 자신이 사제로 서품(교황 베네딕도 14세에게)되었다.

그들은 몬떼 아르젠따리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규칙이 너무 엄격했던 탓으로 많은 수련자를 잃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첫 수도원의 문을 열였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또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승인받고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와 고난의 맨발 성직 수도회"(예수 고난회)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선교 여행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기적과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 등이 나타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다. 사도적 열성과 엄격한 극기에서 뛰어났다.

고난회의 최종 승인을 1769년, 교황 끌레멘스 14세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고난회 수녀들이 꼬르네또에 첫 수도원을 갖게 된 것이다.

3년 동안의 병고로 고생하시다가 로마에서 1775년 10월 18일 세상을 떠났다.1867년 6월 28일 비오 9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바오로 프란치스코는 신비가이며 선교사인 동시에 영적 지도자로서 그리고 예수 고난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다.

16명의 형제들 가운데 두 번째인 그는 제노아에 있는 기숙 학교에서 하던 공부를 중지하고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다.

지도자적 성격을 타고 난데다가 부드럽고도 강한 의지를 소유한 바오로는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쉽게 신뢰를 받게 되었다.

바오로의 전기 작가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신체적,영적 빈곤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강한 연민을 지녔었다고 전한다.

그는 얼마 동안의 은수자 생활을 마친 뒤에 로마에서 고난회를 세웠는데,

이 회는 본당에서 신자들에게 강론을 하거나 십자가의 신비를 새롭게 하는 데 헌신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바오로는 십자가의 신비가이다.

어떤 전기 작가는 그에게 그리스도의 수난보다 더 적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바오로는 자기 회의 첫째 가는 사도직인 말씀의 설교에 완벽한 모범을 보였다.

그의 본당 선교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의 역설 안에서 대면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면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과 계속적인 수난이 십자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존에 도달하기 위하여 바오로는 행렬과 가두설교,철야기도,참회 예식,희생,찬미가,기도

그리고 때로는 설교 그 자체까지 평신도들이 능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바오로는 1775년 10월 18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867년 6월 28일 비오 9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9,23)

예수께서는 ’힘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막강한 이해 관계를 날카롭게 파헤쳐서 로마 제국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벌하는 십자가형의 모험을 강행했다.

 

십자가의 바오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때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상실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보상이 따르는가?

예수께서는 너희가 박해를 받을 때에 "즐겨 용약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과 당신처럼 자신을 바친 다른 사람들과의 긴밀한 인격적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2의 그리스도가 되며 현대 세계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일꾼이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바오로가 십자가를 손에 들고 팔을 넓게 벌린 채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해 설교를 할 때면 아무리 돌로 된 심장일지라도 그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그가 신자들의 잘못 때문에 공개적으로 자기 자신을 매질하자 냉정한 군인이나 도둑들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다고 한다.

작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한 군인이 "신부님, 저는 대포 소리가 진동하는 전쟁터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립니다."하고 말했다.

 

설교가 끝난 다음에 바오로는 고해소에서 참회자들을 부드럽게 대하며

그들의 선한 뜻을 격려하고 새로운 생활 개선에로 인도하며 바른 생활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성 바오로수도회홈에서

 

 

십자가의 성 바울로 사제의 편지에서

(Epist. 1,43; 2,440.825)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고 묵상하는 것은 탁월하고도 거룩한 일입니다. 이 묵상의 길을 통해 하느님과의 영적인 일치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학교에서 참된 지혜를 배웁니다. 모든 성인들은 여기에서 지혜를 배웠습니다.

우리의 사랑하올 예수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히게 된다면 여러분이 부를 노래의 주제는 이러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죽지않고 고통당하는 것이다.” 또는 “내가 원하는 바는 고통당하거나 죽는 것이다.”

또 이보다 더 나은 것은 “내가 원하는 바는 고통도 죽음도 아니고 주님의 뜻만을 채우는 것이다.”는 주제입니다.

 

사랑은 두 사람을 서로 결합시켜 주는 덕행이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선하신 주님의 고통을 우리의 것으로 삼게 하는 덕행입니다.

사랑의 불은 골수에까지 꿰뚫고 들어가 사랑을 주는 자를 그 사랑을 받는 자로 변모시켜 줍니다.

사랑의 불은 사랑을 고통과 연합시키고 또 고통을 사랑에서 구별시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영혼은 사랑할 때 그 고통 속에서 즐기고 그 고통스러운 사랑 속에서 기뻐 용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덕행에서 수련을 쌓고 특히 사랑하올 예수님의 수난을 본받는 데 수련을 쌓으십시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의 정점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감미로움과 온유의 모범이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상을 모든 이가 여러분의 안팎에서 알아보게끔 생활하십시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사람은 그의 끊임없는 영웅적인 덕행의 실천,

특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불평하는 것을 모르는 덕행인 인내심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상을 외적으로도 반사해 주게 됩니다.

모든이가 만사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것만 원하십시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참된 애인이 되어 누구에게도 말하는 일이 없이 침묵 속에 영혼의 내밀한 고통들을 참아 내면서

언제나 마음의 내적 성전에서 십자가의 축일을 경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축일들은 기쁨 속에서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은

내적 고통의 침묵 속에서 참아 내며 즐겁고 평온한 얼굴로 이 십자가의 축일도 지내야 합니다.

고통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지극히 선하신 하느님께만 알려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축일에는 우리가 성대한 잔치를 베풉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랑하올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우리의 양식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1694년 북 이탈리아에 있는 제노아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이 들자 열심하고 희생심이 많은 아이로 보통 아이들과는 어딘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아이에게는 일찍부터 성모 마리아의 특별한 보호가 있었다.

 

어느 날, 냇가에서 놀다가 실수로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갑자기 성모께서 발현하셔서 무사히 구해 주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랬기에 바오로가 성모께 대해 각별한 존경심을 갖고 열렬한 감사의 정을 품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은총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는 주님 수난을 묵상하며 그 거룩한 모습에 도취되어 자신도 주님을 본받는 뜻으로 여러 가지의 고신 극기를 행하며

매 금요일에는 아주 쓴 초를 마시기도 했다.

 

이와 같이 바오로는 초장연적으로는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고 세상에서는 경건한 양친의 교육을 받아 마음도 깨끗하고 몸도 깨끗하게 자라났다.

20세가 되었을때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려는 일념에서 군인이 되어 때마침 터키와 싸우고 있던 조국 이탈리아군에 참가했다.

그러나 도중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이와같은 현세의 전쟁보다는

차라리 초자연계의 영적 싸움에 참가하는 거이야말로 자신의 본래 사명이란 것을 깨닫고 군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바오로는 동료 수명과 상의하여 알제다로 산이라고 하는 인기척 없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기도와 묵상의 거룩한 생활을 시작했으나,

주교께서 세상의 냉담자들의 마음에 다시 열렬한 신앙의 불을 질러 주도록 바오로 등의 적극적 활동을 바라자 그도 이에 동의해 우선 로마에 가서

베네틱토 14세 교황에게 신품 성사를 받는 한편 그의 허가를 얻어 ’예수 고난회’라는 한 수도회를 창립하고 자기의 동료들을 그 회에 입회시켰다.

 

바오로가 성직자가 되어 다시 알젠다로 산에 갔다가 돌아왔을때의 일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또다시 그에게 발현하셔서 흑색복장의 가슴에 심장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십자가와 예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바오로는 그것을 보고 새 수도회의 복장을 이같이 제정하라는 뜻인 줄을 깨달았다.

과연 새 수도회의 목적은 주로 회원 자신들이 예수의 고난을 묵상함과 동시에

일반 신자에게도 그 현의를 깊이 박아주는 데 있었으므로 이만큼 적당한 수도복은 다른 데서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정식으로 이것을 자기 회의 수도복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 수도회는 성모의 통고에 대한 존경을 더 가지게 하는 것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15일(Feast of Our Lady of Sorrows,게시판1365번)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 바오로는 그 열렬한 기도와 고행으로써 냉담한 신자나 죄인을 얼마나 많이 회개시켰는지 모르며,

그 회원들의 활동으로 인해 성모 통고에 대한 신심도 놀랄 만큼 단시일에 전파되어 그로 말미암아 의외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성 바오로는 예수의 고난을 묵상할 때마다 늘 가슴에 주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찼고 그로 인해 두 갈빗대가 밖에 나타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께 장래 일이나 남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특은도 받았다.

예수 고난회는 실로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수년 후에는 여자 수도회도 창립되었다.

성 십자가의 바오로는 총장으로서 회원들을 전후 40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지도하고 자신의 덕행과 좋은 표양으로써 그들의 거울이 되었고,

고령이 되었을 때에 자기가 예언한 1775년 10월 18일, 평화 속에 운명했고, 1867년에 시성되었다.

 

 

 

예수고난회

http://www.passionists.or.kr

 

예수고난회 영성

모든 영성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게도 고난회원 생활의 전체적 수덕적 의미, 기도와 가난의 목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찬 봉헌의 의미는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에로 향하는 길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 일치 ’문’ (the godly door)이시다.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므로, 그분을 통해서 또 그분의 인성에 일치할 때만 하느님과의 만남은 가능해진다.

이런 바탕 위에서,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게 하느님과의 일치,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의 두 축은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사랑의 기억으로서의 "고난의 기억"(memoria Passionis)이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 간다는 것은 곧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성령께 대한 온유함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성령은 교회의 ’기억’이시다.

때문에 우리는 성령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살아간다. 또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의 고난의 기억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영혼은 결국 자기를 모두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가게 된다.

이런 맥락 안에서, 창립자는 수도회의 목적이,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되는 기도의 사람이며, 이를 따른 이들에게도 가르치는 기도의 교사가 되는 것임을 확고히 하셨다.

또한 이러한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는, 예수 고난에 대한 "은혜로운 기억"을 통해서 보다 쉽게 얻어지며,

예수 고난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사업이며 영혼의 회개와 완덕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고난회 상징 해설

예수고난회의 수도복과 수도자들이 가슴에 달고 있는 표지, 그리고 자주 사용되고 있는 전통적인 표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1.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체험

먼저, 두가지 상징과 표어에 대한 설명에 앞서 이와 관련된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체험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성바오로의 예수고난회 창립약사에 언급하였듯이 창립자에게 있어서 수도회 창립과 관련하여 뚜렷한 세 번의 내적 체험이 있었는데,

세 번째 체험은 그의 수도회 창립 성소를 확신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40일 피정을 마친 후 가티나라 주교에게 피정 동안 자신이 쓴 회칙을 보내면서

그 ’서문’으로 붙여 쓴 자전적인 기록을 통해서 이 체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이를 ’회칙 서문’이라고 부른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1720년 어느 늦은 여름날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카스텔라죠에서 있었던 내적 체험에서

장차 자신이 설립할 수도회의 수도자들이 입을 옷에 대해 영감을 얻는다.

당시 그는 영성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내적 평안 중에 있었고, 내적으로 하느님과 깊은 일치에로 들어올려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바로 자신이 검고 긴 수도복을 입고 있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았는데, 가슴에는 하얀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 밑에 하얀 글씨로 예수님의 이름이 씌여져 있었다고 한다.

일부 전기에는 이를 일종의 ’환시’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명백히 그것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동시에 ’이것은 순수하고 흠없는 마음이 어떻게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간직해야할 것인지를 표시한다’ 라고 하는 내적인 소리도 들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게 이 체험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확신하고 구체화하는 사건이었다.

 

 

2. 수도복과 고난회 표지의 의미

모든 수도자들에게 수도복은 하느님께 축성된 자임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의 복장으로서 수도복의 상징과 의미도 변화되고 있지만, 그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맡겨져서는 안되는 일일 것이다.

수도자로서의 내적 헌신과 하느님 축성의 외적 표지로서 상징성은 수도자들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가야 하는 일일 것이다.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수도복은 단순히 수도자로서의 표지 만이 아니라, 또다른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자신들이 헌신하고자 하는 고유한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불리운 삶, 곧 ’참회의 생활’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수도복에 관련된 체험과 더불어 그의 수도생활은 비로소 구체화되었다.

창립자가 들은 마음의 소리에 나타난 것처럼, 수도복은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영혼의 삶의 양식을 드러낸다.

이것은 그의 첫 체험, 곧 엄위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의 미소함을 깨달음으로써 내디딘 ’참회의 생활’이 구체화되는 방식인 것이다.

그 구체성은 수도복이 당대에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옷감(arbagio)으로 만들졌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검은 수도복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관상하는 내적 삶의 태도를 구체화하는 상징이다.

 

이미 체험에 대한 기술에서 드러난 것처럼, 처음에는 수도복에 현재의 표지를 달지 않았다.

고난회 표지의 최초의 모습은 수도복 위에 새겨진 ’십자가’와 ’예수님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1741년까지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자신의 수도복에 아무런 표지도 달지 않았고, 오로지 고난을 기억하고 그것을 살라는 초대인 검은 옷 만을 입었다.

표지가 "IESU XPI PASSIO"라는 눈에 띄는 문장과 함께 도입된 것은 1741년 회칙 개정 때였다고 한다.

 

 

’하얀 색의 십자가’는 이 표지를 착용한 수도자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봉헌되었으며, 항상 그 십자가의 발치에 머무를 것임을 고백하는 의미이다.

’흰 심장’은 예수님의 고난을 항상 간직할 수도자의 순결한 마음을 상징한다.

’못 세 개’는 예수님의 고통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모든 이의 고통을 상징한다.

"IESU XPI PASSIO" 이란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의미이다.

 

3. 전통적인 표어 : "예수 고난의 신비가 우리 마음에"

 

 

 



 

 

 

 

축일:10월 19일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

St. Joannes de Brebeuf, C. et MM

Santi Martiri Canadesi

(Giovanni de Brebeuf, Isacco Jogues e compagni) Martiri

North American Martyrs

(Canadian Martyrs; Isaac Jogues and Companions;

Jesuit Martyrs of North America; Martyrs of New France)

Canonized :29 June 1930 by Pope Pius XI

 

 

캐나다와 미국에서 후론족과 이로케족 인디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고 있던 8명의 예수회 회원들은 1642년과 1649년 사이에 잔인한 고초를 당한 후 순교했다.

그중에 이사악 조게스는 1647년 10월 18일에 순교했고 요한 드브레뵈프는 1648년 3월 16일에 순교했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콩데-쉬르-비르에서 태어난 요한 드브레뵈프은 카앙 근교에서 대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양친은 가나한 농부였다.

그는 1617년에 루앙의 예수회에 입회했고, 1622년에 사제로 서품되자 지원하여 캐나다 선교사로 길을 떠난 후로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후론족과 이로케족 인디언들 사이에서 24년동안이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한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고초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629년, 영국인들이 퀘백을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몰아낼때 그도 쫓겨 나자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1633년에 재차 선교사의 길에 올랐다.

1637년, 천연두가 만연되어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죽게 되자, 선교사들은 재앙을 몰고 온 악마라고 간주되어 그 부족의 마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루었지만, 그는 1640년까지 인디언들과 함께 거주했다.

 

 

그는 잠시 퀘백으로 갔다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왔을 때 프랑스의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로케족 인디언들로부터 동료 8명과 함게 체포당하여

1642년과 1649년 사이에 잔인한 고초를 당한 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보인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들을 감동시켜 그가 죽고난 후에도 약 7천명의 인디언 개종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는 후론족의 사전과 교리서를 만들었다.

그중에 이사악 조게스는 1647년 10월 18일에 순교했고 요한 드 브레뵈프는 1648년 3월 16일에 순교했다.

그들은 1930년에 시성되었다.

그들의 신앙과 영웅적인 삶은 북아메리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깊이 심어 주었으며, 북아메리카 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써 일어난 것입니다

(Sts.Antoine Daniel.Charles Garnier. Gabriel Lalemant. Isaac Jogues. John de Brebeuf. John de la Lande. Neol Chabanel.and Rene Goupil)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순교자의 「영적 수기」에서

(The Jesuit Relations and Allied Documents, The Burrow Brothers C°, Cleveland 1898, 164. 166)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여,

나도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게 해주소서

 

이틀 동안 끊임없이 순교에 대한 큰 열망을 느껴 순교자들이 당한 온갖 고초를 견디어 내고 싶어했습니다.

 

나의 주여, 나의 구세주 예수여,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갚아 드리겠습니까?

당신의 손에서 당신 고통의 “잔을 받들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의 영원하신 아버지와 성령의 면전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어머님과 그분의 정결하신 배필 성 요셉, 천사들,사도들, 순교자들,

우리 복되신 사부 성 이냐시오와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면전에서, 그리고 끝으로, 나의 구세주 예수 당신의 면전에서 서약하오니,

당신의 영원한 자비로써 부당한 종인 나에게 언젠가 순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 은혜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내 여생 동안 당신을 위해 내 피를 흘리어 목숨을 바칠 계기가 생긴다면,

그때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다른 식으로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는 한, 그 계기를 피할 자유도 없고 권리도 없게끔 내 자신을 묶어 놓습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이 다가올 때 크나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것을 당신의 손에서 받아들이기로 서약합니다.

그래서 온갖 사랑을 받으실 만한 나의 예수여, 이제부터 벅찬 기쁨으로 내 피와 내 몸과 내 생명을 바쳐 드립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런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분이여, 나도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게 해주소서.

내가 당신에게서 그렇게도 행복한 죽음의 은총을 받을 만한 삶을 영위하게 해주소서.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의 구세주시여, 당신의 손에서 당신 수난의 “잔을 받들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예수여! 예수여! 예수여!

 

나의 하느님이시여, 이 미개의 나라가 아직 당신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죄가 뿌리채 뽑히지 못했다는 것을 당신이 보지 못하십니까!

마음 아플 뿐입니다.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로서는 온갖 고초들이 내 위에 덮쳐도, 이 나라의 포로들이 당하는 가장 잔인한 고초를 당한다 해도

나는 기꺼이 그런 고초들에다 나를 바치고 나 홀로 그 모두를 받겠습니다.

 

 

 

 

 

성 안토니오 다니엘

ST.ANTHONY DANIEL

27 May 1601 at Dieppe, Normandy, France -

shot with arrows and burned to death on 4 July 1648 by Iroquois at Teanaostae,

near Hillsdale, Limcoe County, ontario, Canada

 

성 안토니오 다니엘(Antony Daniel) 은 프랑스 디프 태생인데 처음에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곧 이를 포기하고 1621년, 루앙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4년 동안 가르치면서, 동시에 신학을 공부하여 1630년에 서품되었다. 그는 잠시 외의 대학교에 봉직하다가,

다른 세 명의 사제와 함께 케이프 브리톤 섬과 아르카디아, 뉴 프랑스(카나다)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년 후에 그는 다시 퀘벡으로 갔다.

 

그는 휴론 인디언들과의 선교활동이 대성공을 거두자, 인디언 아동들을 위한 학교를 퀘벡에 세웠다.

그러나 휴론족과 늘 적대관계에 있던 이로콰족들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때는 1648년 7월 4일이었고, 온타리오주 힐스데일 근교의 테노스테이의 인디언 마을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다니엘은 북 아메리카 순교자들 중의 한 분으로 1930년에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성 이사악 조그

ST.ISAAC JOGUES

1607 at Orleans, France -

tomahawked and scalped by an Iriquois chief on 18 October 1646

at Ossernenon in what would become upstate New York, USA

 

성 이사악 조그(I.Jogus) 와 그의 동료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이들이다.

젊은 예수회 회원인 이사악 조그는 학문과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프랑스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그만두고 신세계의 휴론 인디언들 가운데서 일하기 위해 1636년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요한 드 브레뵈프의 영도 아래 퀘벡에 도착했다.

 

 

휴론족은 이로크와 인들과 계속 전쟁중이었는데 몇 년 안되어 조그 신부는 이로크와 인들에게 사로잡혀 13개월 동안 감금되었다.

그의 편지와 일기를 통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이 마을 저마을로 끌려다녔으며 어떻게 매맞고 고문당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개종시킨 후론족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살해되는가를 보도록 강요 당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사악 조그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탈출의 기회로 고통의 흔적을 지닌 채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다.

몇 개의 손가락이 잘리어 씹히거나 불에 타기도 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리스도의 순교자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도록 허락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가 절단된 손으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영웅으로 고향에 돌아온 조그 신부는 자신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음을 하느님게 감사드리며 고향에서 그대로 머물면서 평안히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열성은 다시 한번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퀘벡으로 돌아가게 했다. 몇 달이 지난 후 그는 휴론족 가운데 있는 그의 선교지로 향하는 배를 탔다.

 

 

1646년, 선교사들을 위해 일하고 있던 요한 드 랄랑드와 조그 신부는 최근에 맺은 평화 조약이 준수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로크와 땅으로 향했다.

그들은 호전적인 이로크와족의 일파인 모흐크 인에게 사로잡혀서 조그 신부는 10월 18일에 도끼로 찍혀 참수되었다.

요한 드 랄랑드는 다음날 뉴욕주의 알바니 근처에 있는 오써느논 마을에서 살해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 중에서 최초로 순교한 사람은 랄랑드와 함께 서원자로 봉사해 오던 르네 구비(R. Goupil)였다.

그는 1642년, 이사악 조그와 함께 고문을 당했으며 몇몇 어린이들의 이마에 십자표를 그었다는 이유로 도끼에 찍혀 죽었다.

 

"나의 의지는 주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느님 안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노력은 하느님께 충실하고 우리의 약점이 하느님의 사업을 부패시키지 않도록 그 사업에 자신을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뿐 입니다."

(1646년 9월 12일,이사악 조그 신부가 죽기 한 달 전에 프랑스에 있는 예수회 친구에게 보낸 편지)

 

 

 

성 르네 구비

ST.RENE GOUPIL

1606 at Anjou, France -

tomahawked in the head following two months of torture in 1642

 

성 르네 구비(R. Goupil)는 프랑스의 앙쥬에서 태어났으며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수도원을 떠나야만 하였다.

그 후 그는 완쾌되어 퀘백으로 갔으며, 거기서 예수회의 선교사와 합류하였다.

그는 휴론 인디언 요그와 함께 여행하던 중, 이로꽈 인디언들의 포로가 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북 아메리카 순교자 가운데 첫 순교자로서 1930년에 비오 11세로부터 시성되었다.

 

 

 

 

ST.CHARLES GARNIER

1605 in Paris, France -

shot in the chest and abdomen, and tomahawked in the head on 7 December 1649 at Fort Saint Jean

Beatified:21 June 1925

Canonized:29 June 1930 by Pope Pius XI

 

 

 

 

 

 

 

 

*예수회 홈 www.sogang.ac.kr/~gesukr

*성 이냐시오 로욜라 축일:7월31일.인창동성당게시판1295번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Ad Majorem Dei Gloriam)

 

 

 

 

 

 

 

St.PETER of Alcantara-

Tumacacori National Historical Park

 

축일:10월 19일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사제

St.PETER of Alcantara

San Pietro d’Alcantara

1499 at Alcantara, Estremadura, Spain -

18 October 1562 at Estremadura, Spain of natural causes

Canonized: 1669 by Pope Clement IX

 

 

성 베드로는 1499년 에스빠냐의 알칸타라에서 태어났다.
신학 공부를 끝내고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였다.
1554년 형제회 수도회칙을 더 엄격히 지킬 허락을 받고
형제들을 보속과 극기, 끊임없는 기도와 극단적인 가난의 삶으로 이끌었다.
열정적인 강론을 통해 형제회 안팎에서 큰 성과를 얻었으며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에 있어 아빌라의 데레사에게도 좋은 조언자였다.
그의 개인적 영성 체험,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열렬한 신심에서 여러 권의 영적 저서를 남겼다
1562년 10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의 알깐따라 지방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베드로 가라비또는

살라망까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6세 때에 만하레떼스에 있는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그가 엄격한 보속 생활을 실시하던 중 바다호스로 파견되었고, 152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을 설교하면서, 로브레딜로, 플라센시아, 라파 그리고

에스트레마두라의 원장으로 봉사하였으며, 라파 수도원을 봉쇄수도원으로 요청하여 허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 한때 그는 궁중의 전속사제로 일하다가, 1538년에는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다소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고, 이것을 관구총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하자 관구장직을 사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리스본 교외 아라비다산에서 성 마리아의 마르떼노 형제와 함께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따르려고 하였다.

관구내에서는 자신의 규칙이 통과되지 못하자, 이번에는 코리아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꼰벤뚜알의 지도아래 있는 수도원을 세울 허가를 교황 율리오 3세로부터 받았는데,

이것이 알깐따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꼬회의 시작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수도원들도 그의 규칙을 받아들이므로써, 1561년에는 성 요셉 관구가 설립되었는데,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꼰벤뚜알에서 프란치스꼬회의 관할 아래 두게 되었다.

 

 

1560년, 그는 아빌라의 데레사를 만나서 그의 고해신부겸 상담자가 되었으며,

가르멜 개혁 운동을 격려하였다.

그는 "기도와 묵상론"을 썼는데, 이것이 후일 성 프란치스꼬 드 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669년에 시성되었고, 1862년에는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그는 위대한 신비가였던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축일:10월15일.게시판1420번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축일: 1월24일.게시판90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 하셨는데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생애는 그야말로 이 세상을 그 말씀대로 체험한 금욕, 극기의 본보기였다.

 

그는 1499년에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알칸다라 지방 장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한 그는 그 시에서 철학을 배웠는데, 얼마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들의 입신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는

그를 유명한 살라망카 대학에 보내어 법률을 전공케 했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베드로는 그의 학식이며 가문으로 보아 어떠한 출세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영예와 쾌락이 허무함을 통감하고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여 여러 수도회의 회칙을 검토한 끝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가장 공명되어 16세 때에 만하레테스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모든 일에 철저함을 좋아하는 베드로는 수도자가 된 처음부터 완덕을 지향하고

생각, 말, 행실에 있어 사소한 점까지 하나도 소홀히 함이 없었다.

그가 얼마나 눈을 삼갔는지, 그가 수년간을 같은 수도원에 살면서 그 수도원 성당의 천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으며 또 같이 기거하는 동료 수사들의 음성은 알고 있으나

얼굴은 통 몰랐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사욕 편정을 제어하기 위해 육신을 매질하며 엄격한 단식을 감행하고,

수면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여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나중에는 3일을 한끼만으로 지냈다는 것만 보아도 그의 극기 단련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이같이 오관을 삼간 것은, 육욕이며 기타 외계의 사물에 정신을 팔지 않고

마음껏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고, 가끔 탈혼 상태에 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독특한 묵상 방법을 사용하며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한 책을 저술했는데

이는 ‘황금의 글’이라는 책이나 아직 한국말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 그렇듯 엄격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친절해

마치 어진 어버이와 같이 대했다.

 

 

그는 1524년, 25세에 서품되었다.

그 후 플라센시아의 프란치스코 수도원 원장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설교할 임무도 부여되었다.

그 신앙에 타는 열변은 순식간에 세상에 널리 퍼졌고, 그의 설교를 들은 포르투칼의 왕 요한 3세는

그를 궁정에 초빙하기도 했다.

그의 설교와 일상 생활은 궁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감동하지 않은 이 없었는데,

특히 여동생 마리아는 세상이 허무함을 깨닫고 서원을 하고 궁정에서 수도 생활을 했으며,

리스본 시에 클라라회 수녀원을 건축해 기증했다.

 

베드로의 최대의 업적은 밖으로는 루터의 이단이 일어나고, 안으로는 교회 내의 신앙심이

일반적으로 이완된 당시 프란치스코회의 강기(綱紀)를 숙정하며,

한편 신비신학자로서 유명한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지도해 가르멜 수도원의 개혁에 협조한 것 등이다.

 

한편 자기 회의 쇄신을 도모하고, 당시 교황 율리오 3세의 강복과 충고를 받기 위해

맨발로 스페인에서 로마까지의 여행을 기도하기도 했다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그의 열심한 태도에 감동된 수사들은 각성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의 모범을 따르며

자기들의 생활을 개선했으므로 같은 회이면서 알칸타리노파라는 명칭까지 받고 일반의 존경을 샀다.

 

 

1555년, 스페인 및 독일을 통치하던 황제 가롤로 5세가 그 왕위를 동생인 페르디난도에게 넘기고

자기는 센트유스토 지방에 은퇴해 오로지 수덕에 전념했을 때

알칸타라의 베드로를 그의 지도 신부로 청했던 바, 그는 겸손된 마음에서 대단히 황송하게 생각하며

“저는 도저히 그런 중책을 맡을만한 자가 못됩니다.

폐하를 지도하기 위한 적당한 인물이 다른 데 있을 것입니다”하며 극구 사양했는데,

황제는 그의 겸손 지덕의 미를 깊이 경탄했다 한다.

 

하루는 어떤 귀족이 신앙의 쇠퇴와 도덕의 타락을 탄식하며 베드로에게 호소하자

그는 “물론 개선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 둘이 먼저 고치는 것으로 시작합시다”하고 말했다 한다.

 

베드로는 매일같이 고행과 엄격한 단식으로 지내며, 63세를 맞이하여 1562년에는

드디어 병을 얻어 병자 성사를 받고 그 해 10월 18일에 운명했다.

당시 아직 생존 중인 예수의 데레사에게 베드로가 나타나

“고행은 행복하다. 그는 나에게 영원한 행복을 준다”하고 말했다 한다.

그는 1669년에 시성되었고, 1862년에는 브라질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그는 위대한 신비가였던 것이다.

 

 

 

프란치스칸 묵상 방법

기경호(프란치스꼬) ofm 신부

 

개요
이 묵상 방법은 작은 형제회의 알깐따라의 성 베드로가 창안한 묵상법이다. 이 묵상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묵상의 주제는 항상 하느님과 연관되어야 한다. 이 묵상에서 자기 자신이나 이웃의 관계에만 국한된다면 묵상이 아니라 양심성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 묵상은 보통 15-30분에 걸쳐 하게 되며, 6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단계 준비, 제 2단계 독서, 제 3단계 고찰, 제 4단계 감사, 제 5단계 봉헌 및 결심, 제 6단계 청원. 이는 준비 단계, 묵상 부분, 감사 및 결심, 청원 부분으로 단순화시켜 볼 수 있다.

 

제 1 단계
묵상기도 바로 전의 준비
① 간접적인 준비(먼 준비)는 평소의 내적인 상태로서 평소에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말한다. 이를 위하여 오관을 조절하고 절제함으로써 고요와 침묵의 마음 상태를 지니도록 한다.
② 직접적인 준비(가까운 준비)는 묵상의 주제를 정하고 독서를 선정하는 것이다.
③ 기도 바로 전의 준비: 다음 사항에 마음을 집중시키도록 한다.
-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한다. 여기서 짧은 기도를 할 수도 있다.
- 분심을 버리도록 한다. 지나친 지성적인 걱정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 마음의 정리. 감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도록 한다.


제 2 단계
영적 독서 - 적어도 전날 밤에 준비한 읽을 거리(묵상 재료)를 천천히 읽는다. 초기의 묵상에서는 영적독서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좋다. 즉 독서 - 고찰 - 감사 - 봉헌 및 결심 - 독서 -고찰 - 감사 ...
여기서는 어떤 독서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제 3 단계
고찰 - 여기서 고찰이란 협의로는 반성하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이 단계는 본질적인 묵상 단계로서 시간은 너무 길게 잡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고찰을 하는 목적은 어떤 진리에 대해서 실천을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함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에 뛰어들고, 기억력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억을 되살리도록 한다(상상력과 기억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지력을 통하여 위의 두 가지를 일치시키도록 한다(분별 능력).
고찰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부활, 교회 안에서의 신비, 인간의 가치와 지상적 산물, 죄에 대한 것, 나아가 프란치스칸으로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다.

 

* 묵상시 주의점 *
① 이론적인 주제를 피해야 한다(주제는 항상 우리의 신앙과 연결되어야 한다.)
② 자기 자신의 말로 하도록 한다. 즉 자신에 알맞는 방법을 찾도록 한다.

 

제 4 단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단계로서 마지막 단계의 구체적인 청원과 연관된다.

 

제 5단계
봉헌 및 결심 - 묵상기도를 통하여 주신 선물과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해 드리고, 구체적인 결심을 한다. 이는 다음 단계의 청원과 연관되어 있다.

 

제 6 단계
청원 - 이는 봉헌 및 결심과 관련된 것으로서, 구체적인 청원과 보편적인 기도를 바친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