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5월 1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 | 제1독서 사도 13,13-25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복음 요한 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1 더하기 1’은 몇일까요? 당연히 ‘2’입니다. 그런데 난센스 문제로 생각하게 되면 답이 많이 달라집니다. 아마 어렸을 때 이러한 답을 많이 이야기했지요. 찰흙 한 개와 또 다른 찰흙 한 개를 더하면 찰흙 한 개가 된다면서 ‘1 더하기 1은 1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창문이라는 답도 있습니다. 1+1= 에서 =을 1과 1사이 위아래 그으면 창문 모양의 ‘田’이 된다고 해서이지요. 이밖에도 발전, 중노동이라는 답도 있었습니다(왜 그런지는 아시겠죠? 일을 더하고 또 더하니까요).
이렇게 ‘1 더하기 1’도 여러 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산수에서는 정확하게 ‘2’로 떨어지지만, 우리의 인생에서는 예외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에 정답이 없고, 다만 다들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쫓아갈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분들은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정의를 내리기도 하고, 자신이 아는 세상이나 경험한 세상을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곤 합니다. 이런 분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꼰대’라고 말합니다. 고지식하고 본인 경험과 생각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면서 불편한 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꼰대’ 같은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내가 왕년에~’, ‘요즘 젊은 애들은...’, ‘젊었을 때에는 고생도 좀 해봐야지.’, ‘애 참 버릇없네.’ 등의 말을 하면서, 나이 먹은 티를 내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내 자신도 그렇지 않은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나잇값을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하지 않을까요?
종종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을 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훈계조나 명령조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시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로 빛나는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제자들 역시 무시하고 함부로 판단을 했었지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꼰대’의 모습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꼰대의 모습이 예수님을 함부로 판단했으며, 그 결과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꼰대의 삶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살아갈 때, 이러한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며 진정으로 나잇값을 해나가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이다(제임스 M. 배리). 오랜만에 찾은 인천의 신포시장 입구. 나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는? 훌륭한 직장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직장에서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합니다. 또한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서 노력합니다.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도 참 노력을 많이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도 많은 만남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치게 됩니다. 정신없는 삶의 속도 때문에 스트레스에 강타당하고 심신이 녹초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면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직장 안에서, 가정 안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들은 어쩌면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 보다 더 노력하고, 지금보다 더 고통을 감수한다면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혹시 목표를 잘못 잡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직장, 가정, 이웃과의 관계 등은 물론 아주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의 최종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더 큰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직장, 가정, 이웃과의 관계 등은 목표가 아닌 목표를 향한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과정 안에서의 아픔과 상처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겪어야 할 하나의 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그마한 것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쉽게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 쉽게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 목표를 한 번 멋지게 세워보시면 어떨까요? 이런 배려 역시 사람들을 힘내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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