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5월 7일 부활 제4주일

수성구 2017. 5. 7. 05:38

2017년 5월 7일 부활 제4주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5월 7일 부활 제4주일

제1독서 사도 2,14ㄱ.36-41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제2독서 1베드 2,20ㄴ-25

사랑하는 여러분, 20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21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다.”
23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복음 요한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글 쓰는 것이 잘 안 될 때면 저는 커피숍에 갑니다. 커피숍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집중도 잘 되고 그래서 글도 훨씬 잘 써지는 것 같아서 종종 이용하곤 하지요. 며칠 전에도 혼자 커피숍에 가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 테이블에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1시간 가까이 있었지만 둘이 서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싸우거나 다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싸운다면 서로를 노려보거나 화를 내는 말 등이 있어야겠지만, 둘은 서로 나란히 계속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 둘이 정말로 무엇을 하는지 살짝 쳐다보았습니다. 바빠서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이 둘은 나란히 앉아서 휴대전화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지요.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인으로 함께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관심어린 시선과 대화가 아니라, 스마트폰 게임에 집중하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튼 함께 있지만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있는 모습이 과연 올바를까요? 이는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스마트폰을 들고서 자기 좋아하는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화도 나누면서 식사하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고 말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할 얘기도 없어요.”

왜 할 이야기가 없을까요?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순간적인 재미와 만족을 주는 스마트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들은 신앙인들 사이에서 그대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미사와 기도 생활 안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제의 강론 때문에? 기도 생활의 지루함 때문에? 어쩌면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따라가기보다 인도하며,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모아들입니다. 그리고 양들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주님과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전히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데, 우리들은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이 우리를 따라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불평불만 속에 살고 있을까요? 이러한 마음속에서 목자이신 주님과의 간격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로 성소주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해보는 날이지요. 성직자, 수도자로의 부르심도 있고, 가정을 이루는 결혼 성소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르심에 얼마나 잘 듣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와 함께 하는 착한 양인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착한 목자가 원하는 모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 공감할 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보다 깊어진다(오쇼 라즈니쉬).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새로운 나를 만나기

결혼할 나이를 훌쩍 넘긴 어떤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청년에게 “이제는 너도 결혼해야지.”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집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그런데 다들 이 말에 공감하는 눈치인 것입니다.

집이 없는 것이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지 않고 단 둘이 살고 있는 부부들은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아이를 갖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이런 식의 일반화로 자신의 미래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는 또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집이 없어서 겪는 힘든 상황이 결혼 후에 계속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어려움을 대물림하기 싫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꼭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갈까요?

부정적인 생각이 무기력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기력은 자기비하로 이어지면서,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의 무기력을 전달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고 피하려는 모습에서 벗어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쁜 목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