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성무일도

축일:11월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

수성구 2014. 11. 8. 03:12

오늘의 묵상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와 함께 ‘대’교황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는 성 레오 교황이 로마의 주교로 봉직한 시기(440-461년)는 세계사적 격변기였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몰락 직전에 있었으며, 동로마 제국 또한 그 힘을 잃으면서 정치적 불안이 극도로 고조되었습니다. 교회 내적으로는 신앙의 자유가 공인된 이후 많은 이단적 학설과 도덕적 타락이 신자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던 상황이었습니다.
레오 교황은 이러한 시기에 교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 진정한 사목자이자 현명한 행정가로서 교회와 사회의 용기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를 교회가 ‘교회 학자’로 칭송하는 것은 안온하고 평탄한 조건에서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마음껏 펼친 신학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혼돈과 두려움, 도덕적 타락이 지배하는 시기에 살아 있는 강론을 통해 진정으로 복음을 묵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며 그리스도교 윤리의 참모습을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레오 교황은 전례를 개혁하고 정통 교리를 정식화해서 교회가 흔들림 없이 신앙 교리를 고백하며 합당하게 경신례를 드릴 수 있는 기틀을 세웠습니다. 그가 큰 역할을 한 ‘칼케돈 공의회’(451년)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확증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교의사’에서 중요한 준거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놀라운 업적이 인간적인 성취욕이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실천하는 열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지도자의 역할을 맡은 이들은 무엇보다도 그에게 맡겨진 이들이 죄를 짓도록 방조하거나 방임해서는 안 되며, 선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회가 탐욕과 불신앙으로 도덕적 타락의 길로 들어섰을 때, 신앙인들은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결연히 거슬러야 합니다. 레오 교황은 그러한 그리스도인 직분의 위대한 모범입니다. 늘 제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의 사순 시기 강론의 한마디를 되새겨 봅니다.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머거리처럼 못들은 체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됩니다.”

 

축일:11월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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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eting between Leo the Great and Attila-RAFFAELLO Sanzio. 1514.Fresco, base: 750 cm.Stanza di Eliodoro, Palazzi Pontifici, Vatican

 

축일:11월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Saint Leo the Great

San Leone I, detto Magno Papa e dottore della Chiesa

c.400 at Tuscany, Italy-11 April 461 at Rome, Italy

(Papa dal 29/09/440 al 10/11/461)

Leone = leone, dal latino(lion, from the Latin)

 

 

교회 안에서 로마 주교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뚜렷이 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지속적 현존을 드러내는 교회를 분명히 밝히면서

대 레오 교황은 교황으로서 자기 역할에 부단히 헌신했다.

 

440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자신의 동료 주교들을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닌 자기와 같은 주교로 생각하고

그들을 동등하게 이끌며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레오는 고대 교회에서 행정 능력이 가장 뛰어난 교황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의 업적은 그리스도의 양떼를 위한 전적인 책임을 지는 교황의 의미를 밝혀 주는

네 가지 중요한 분야로 나누어진다.

그는 펠라지아니즘과 마니케이즘 및 기타 이단들을 다루는 데 오랫동안 노력하여

이단 추종자들에게 참다운 그리스도교 신앙을 안전하게 지키도록 요구했다.

그의 두 번째 큰 관심사는 동방 교회와의 교리 분쟁이었다.

이것을 레오 교황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밝히는 고전적인 편지로 응답했다.

그리고 그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중재인의 역할을 하여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기도 했다.

 

이 세 가지 분야에서 레오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그를 성인으로 성장하게 한 것은 깊은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신자들을 돌본 사목적인 배려인데,

이것이 바로 그의 업적에서 네 번째 요소이다.

 

그는 영성적으로 깊이가 있는 설교로 유명하다.

성서와 교회에 관한 지식이 뛰어나고 그리스도인들을 성덕으로 불러들이는 도구였던 레오는

자기 신자들의 관심과 일상적인 요구에 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성탄 강론 중에 하나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교회의 구조에 대한 비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때 우리는 주교와 사제들이

-사실은 우리 모두가-현세적 사물을 관리하는 데 너무나 얽매여 있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레오 교황은 정신과 조직이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분야, 즉 교리와 사목적 배려

그리고 평화에 대해서 자신의 재능을 활용한 위대한 행정가의 한 표본이다.

그는 외적 일만을 다루는 ’실용주의’와 마찬가지로 육신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천사주의’도 피했다.

 

레오 교황의 진정한 특징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에 대한 교의적 강조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생명의 초자연적 은사에 대한 교리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렇게 레오 교황은 교회의 관리를 위하여 자신이 교황으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한 자기가 대신 행동하고 있는 베드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역사 안에서의 교황-영도자의 권위 굳힌 ’대교황’ 레오 1세

 

베드로를 선두로 초대 교회의 30여명의 교황들은 거의가 다 순교가 아니면 옥사 또는 유배를 당했다.

박해자는 로마 황제들이었다.

그들은 야만적 폭력을 통해 끊임없이 교회와 교황에게 도전하여 박해를 가했다.

그러나 교황과 카이사르 사이의 투쟁, 영권(靈權)과 속권(俗權)의 투쟁은 결국 십자가의 승리로 끝났다.

 

311년의 소위 콘스탄티누스의 전환기를 맞으면서 교회는 비로소 시민권을 획득하고

동시에 지하생활과 고별하게 된다.

그후 교황은 라테란 궁전에 거처를 정하고 또 그것에 성 요한 라테란 대성전을 세우게 되니(축일:11월9일),

그것은 모후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교사인 로마교회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그러나 미구에 게르만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다.

여기서 로마 대제국의 붕괴가 시작되고 로마시는 그를 방어해 줄 주인을 잃게 된다.

이 무렵 다행히 로마 교황좌에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게 되니 그가 바로 레오 1세였다.

 

서 고트족이 로마를 공격했고 이어 훈족이 로마를 침입했다(452).

로마황제는 그들의 침략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교황에게 기댔다.

과연 레오 교황은 로마 시외로 나가 훈족의 아틸라왕과 직접 담판함으로써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멸망 직전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역사는 레오의 이 위대하고 용감한 행위를 깊이 기억하였고,

특히 화가 라파엘은 레오와 아틸라의 만나는 극적인 장면을 그려 바티칸 박물관에 남겼다.

 

이번에는 가장 야만적인 반달족이 가이세랙을 앞세우고 로마를 공격해 왔다(455).

이번에도 레오 교황은 용감이 가이세릭과 대면하고 그와 담판했다.

교황은 로마시를 그들의 약탈에서 구해내는 데까지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로마시를 방화에서,

또 로마시민을 살육에서는 구해 낼 수 있었다.

이로 이해 교황직의 위신이 아주 높아졌고 또 서 로마제국의 멸망(476)이란 최대의 불운마저도 이겨낼 수 있었다.

 

이렇게 교황직은 교회 영역을 초월하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레오 교황과 그 후계자들은 그러한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이칼리아 주민들은 전쟁과 기근이 닥치면 으레 교황을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로 바라보게 되었고,

교황들 또한 위험을 무릎쓰고 게르만족과 최고의 정치적 협상을 했다.

또한 굶주린 주민들을 위해 교회의 소유지에서 곡식과 양식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교황들은 지난날의 황제들의 임무를 자신의 임무로 인식하였고 또 주민들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현지 주민들의 의식에는 교회의식과 시민의식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르나크의 말과 같이 이제 로마교회는 종교적 의미에서 서 로마제국이었고, 로마주교는 사실상의 황제였다.

 

레오 교황의 20년의 재위기간을 통하여 로마 주교좌의 세력과 명망은 더할 수 없이 성장되었다.

대외적으로 교황은 사실상 로마시의 수호자가 되었고,

동시에 대내적으로도 로마교회의 최고 통치권의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후 레오에게 ’대(大)’란 존칭을 부여하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레오 교황은 동방교회도 로마주교의 수위권에 속해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451년 동방의 ’칼케돈’에서 개최된 제4차 공의회에 그의 사절을 파견하여 공의회를 사회하게 했고,

또 그의 유명한 교의서한(敎義書翰)을 보내어 정통신앙을 옹호하게 했다.

그의 이러한 강력한 간섭으로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단성설(單性說)을 단죄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위격(位格)에서 혼합되지도 않고,분리되지도 않은 채 결합되어 있음을 신조로 선포하게 되었다.

레오 교황의 교의서한이 이 신조의 기초가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들은 이 서한을 교황의 최초의 무류적 성좌선언(無謬的 聖座宣言)이라고 까지 평한다.

 

레오 대교황 이후 역사에서 두 번째로 대교황으로 불리게 될 인물이 또 나타났는데

그가 다름아닌 성그레고리오 1세(590-604)였다.

그는 레오와는 다른 스타일의 교황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수도자의 겸손을 지닌 교황이었다.

이미 그의 세 누이가 수도자였고, 자신도 수도자가 되어 6개의 수도원을 건설했다.

교황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는 "나는 물속에 깊이 잠겨 파도에 휩싸여 있다"는 시편의 구절을 읊으면서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다고 한다.

부득이 교황직을 수락한 후에도 그는 수도자 시절에 애용하던 ’하느님의 종중의 왕’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다.

 

교황직에 대한 이 겸양의 호칭은 그후 교황들에게 애용되기에 이르렀다.

직책에 대한 겸손이란 점에서 그레고리오는 모범 교황이었다.

1073년 성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직을 수락하면서 "공포와 전율이 나를 엄습하고,

암흑이 나를 가리고 있다"는 겸손을 말을 했고,

1958년 요한 23세는 콘클라베(conclave, 선거회)에서 교황직을 수락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당신의 소리를 두려움에서 받아들입니다.

나의 당황함이 어떤 것인가는 나의 비천함이 어떤 것인가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전환기에서 새시대를 개척할 사명을 의식한 교황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14년간의 교황직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는 대외적으로 중세의 주인이 될 게르만족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그들을 개종시켰으며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앵글로 색슨족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대내적으로 성직자 생활을 쇄신하고 미사를 오늘의 형식으로 정착시켰으며 또 그레고리안 성가도 개혁했다.

그는 또 학자 교황이었다.

그는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교회의 4대 교회학자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저술가의 모습과 함께 성신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항상 곁들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교황직은 성 레오 1세와 성 그레고리오 1세에 이르러 서구에서의 지도자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고,

그것은 동시에 다가오는 중세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성바오로수도회에서)

 

■서방 교회의 4대 학자.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축일:12월7일.게시판790번,1509번.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축일 : 9월30일.게시판670번,1394번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축일:8월28일.게시판607번,1336번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축일:9월3일.게시판617번,134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에서 태어나 440년에 교황이 된 성 레오는 신자들의 참된 아버지이며 목자였다.

그는 신앙의 완전성을 보존하고 교회의 일치를 수호하며, 침범한 야만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여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로써 그는 ’대교황’이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다. 성 레오 교황은 461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

(Sermo 4, 1-2: PL 54, 148-149)

 

우리 직분의 특수한 봉사

 

하느님의 보편적 교회가 여러 계급으로 되어 있어 교회의 거룩한 몸이 여러 지체들로 되어 있지만,

사도가 말하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직분들이 서로 다르다해도 그 다양성은 그들 중 가장 미소한 직분이라도

머리와 연결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지닌 신앙과 받은 세례는 하나이므로

우리는 갈림 없는 친교와 공통의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된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말씀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다운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난 이들은

모두 십자가의 표시로 왕이 되고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써 사제로 축성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분의 특수한 봉사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도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왕다운 겨레와 사제직에 참여케 하는

그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특은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는 영혼이 자기 몸을 다스리는 것 이상으로 더 왕다운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께 정결한 양심을 바치고 마음의 제단 위에서 신심의 정결한 제물을 봉헌하는 일보다

더 사제다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느님의 은덕으로 말미암아 이것들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이 성품에로 축성되는 이날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의 영예인 것처럼 기뻐하는 것은 거룩하고도 칭송받을 만한 일입니다.

교회의 온 몸 안에서 거행하는 사제직의 성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축성의 기름 부음은 높은 계급의 사제직에 더 풍성히 내리지만

그것은 또 낮은 부분에까지 모자람 없이 내립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 모두가 이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공통적인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비천한 나에게보다 복된 베드로 사도의 영광을 관조하는 데에다 마음을 돌린다면,

우리 기쁨의 이유는 더욱 깊고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모든 은총의 원천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은총을 넘치도록 받으신 분을 기념하여 이 축제를 지낼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예외적으로 자신만이 받은 수많은 은총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은 그분을 거치지 않는 은총을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말씀께서는 이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해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셨습니다.

(가톨릭홈에서)

 

 

오늘날 우리가 즐겨 애독하며 묵상하는 그의 96편 설교는

풍부하고 심오한 교리와 신학적 지식을 쉽고 간단한 어휘로써 담은 대표적 교리집입니다.

그 외에도 하느님과 그 백성에 대한 봉사적 책임 의식을 신앙 고백 형식으로 표현한

173편의 서간문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례문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그의 서간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문체와 사상은 교리서 및 전례문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투스카니 사람인 부모밑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살았고,

교황 첼레스티노 1세와 식스토 3세 밑에서 부제로 봉사하는 한편,

에씨우스와 알비누스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하던 중,

식스또 3세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어, 440년 9월 29일에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황제와 교회간의 알력을 비롯하여, 마니교도,펠라지아니즘, 프리쉴리아니즘

그리고 네스토리아니즘에 강력히 대처하는 등 수없는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였다.

448년, 그는 콘스탄티노블에 있던 대수도원장인 에우띠체스 일파와 격돌하게 되었다.

그의 재위 중에 가장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상대자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을 반대하던 에우티체스 일파였다.

 

에우띠체스는 그리스도의 두가지 본성(천주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콘스탄티노블의 총주교 플라비아노가 내정한 원장이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던 에우띠체스는 더욱 심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451년, 레오 교황은 칼체돈 공의회를 소집하여 천주강생의 교리를 분명히 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아프리카에도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교황으로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황권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성좌의 권위는 하느님과 성서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굳게 확립한 위대한 교황이다.

한마디로, 그의 재임 기간은 교황권 확립의 시기였다. 그는 1754년에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The Meeting of Leo I and Attila-ALGARDI, Alessandro

1646-53, Marble, height: 750 cm.Basilica di San Pietro, Vatican

 

교회와 조국을 의해 위대한 공로를 세운 점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대 레오라고 공경을 받고 있는 이 성인은

로마의 유명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극히 재주가 많아,어려서부터 모든 학문을 습득하고

특히 웅변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다.

이러한 천재적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만 사용하려고 한 그는 사제가 되고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되어

440년 교황 식스토 3세 서거 후에 그의 후계자로서 만인에게 추대되어 교황위에 올랐다.

 

그 당시는 옛날에 강국이었던 로마 제국도 바야흐로 멸망하려고 하고,

사방에서 야만 민족들이 봉기하여 국경을 침범하여 도처에서 난리가 일어나 한창 성하던 로마 문화도

일시에 몰락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시대였다.

 

’하느님의 채찍’이라고 불리는 훈니(Hunni)족의 두목 아틸라(Attila)는 용감한 대군을 거느리고

전 유럽을 유린하고 독일에 있어서는 라인 강 부근의 도시를 거의 전부 태워 없애 버리고

그 여세로써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일로(一路)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때 인심의 동요는 말할 수없이 심했다.

이런 공포와 전율의 도가니 속에서 위기 일발에 있는 군중을 구출하기 위해

과감히 나선 이는 바로 교황 레오 1세였다.

 

더구나 그는 몸을 보호할 무기나 군대도 없이 다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직자로서의 의장을 성대히 갖추고 승리에 도취된 아틸라 앞에 나타나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집을 태워 버리는 것이 죄악이란 것을 누누이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의외에도 아틸라는 교황의 위풍에 감복되었던지 순순히 그의 권고에 순종하여

즉시 군대로 하여금 이탈리아를 떠나게 했다.

 

그 후 레오 교황은 또 한 번 로마시를 멸망에서 구출한 때가 있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완달족의 두목 젠세리코(Genserico)가 부하들을 인솔하고

로마에 침입하여 전 시가를 다 태워버리려고 했을 때다.

마찬가지로 완달족도 교황의 간청을 들어 아무해도 끼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레오 교황의 가장 큰 공적은 외부의 적을 물리친 것보다

오히려 교회 내부의 적 즉 위험한 이단 사설을 억제한 일일 것이다.

그는 심원한 학식과 강력한 웅변으록 교회를 순결하게 보호하는데 성공했다.

 

무릇 제4차 공의회를 칼케돈(Chalcedonense)에 소집하여 그리스도의 강생에 관한

에우티케스(Eytyches)및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양 이단을 단호히 배격했던 것이다.

이 회의는 지금까지의 모든 회의 중에서 가장 대규모이고 권위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출석한 주교는 무려 630명이나 되었다. 교황 자신은 불행히 참석할 수 없었지만

성자의 강생에 대한 가톨릭 전통의 신앙을 그는 명석한 말로써 손수 편지를 써서 공의회에 보냈던 바

참석했던 주교들은 그것을 낭독하자, 감동되어

"이것이야말로 사도 전래의 신앙이며, 성 베드로가 레오 교황을 통하여 이같이 말씀하신 것이다"하며

동시에 절규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공의회는 단지 교회에 평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아울러 교황 21년간 지혜와 힘으로

교회를 무난히 다스리고 461년 11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재 교회 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오늘의 묵상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