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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수성구 2022. 9. 20. 05:35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어느 신부가 본당의 어느 어르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합니다.

사사건건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누구 만났는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어제는 왜 늦게 사제관에 들어왔냐고 물으신답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려는 이 어르신께 대한 불편함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르신은 왜 스토커처럼 본당 신부에게 집착하실까요?

이 신부가 자기 아들 같아서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에 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너무 서운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남이란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즉,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입으로는 상대를 배려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도 자기 관점에서 나오는 ‘배려’라는 이름일 뿐입니다.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책에서,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알아서 해주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 됩니다.

때로는 답답해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진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알아서 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답답하고 간섭하고 싶지만, 우리를 위해 꾹 참으며 말없이 함께하실 뿐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짜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도 불의의 폭력을 저지르는 박해자들을 벌하지 않는 주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단순히 주님을 믿고 있다는 이유로 망나니의 칼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갈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며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은 이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진짜 사랑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찬미를 외치면서 기쁘게 순교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삶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진짜 사랑을 찾고 있습니까?

혹시 불평불만과 원망으로 주님을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의 순교자 모습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다. 절망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하인츠 구데리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