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시와 좋은 글

누가 수치스러운가!

수성구 2022. 9. 17. 05:41

누가 수치스러운가!

 

9월 셋째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3-26)

 

누가 수치스러운가!

(마진우 신부. 대구대교구 초전성당 주임)

 

신학교 4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군대는 한창때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요상한 체험을 많이 한 친구들은 대접을 받는다.

그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병사는 선임들의 총애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런 환경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만일 그런 이야기를 성당 모임에서 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굉장히 문란한 사람으로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디에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반대로 어디에 수치를 느끼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수치가 되는 자리를 종종 마주하게 된다.

 

 

청년회를 하면서 자꾸만 반복되고 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누군가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이렇게 살아가면 안 되지 않을까?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자.

어쩌면 많은 청년이 그 순간 폭소를 터뜨릴지도 모른다.

심하면 그 후로 그 친구는 서서히 배척당하고 더는 모임에 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악습이 강한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잊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비유를 들었을 뿐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교회 안에서 적잖이 발견된다.

결국 우리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살아가느냐가 수치스러운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결정한다.

당대 권력가들에게는 순교자들이 엉뚱한 고집에 매달리면서

자기 삶의 근간을 다 상실해버리는 수치스러운 존재처럼 보였겠지만

지금의 우리 신앙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분들이 되었다.

반대로 한때 권세를 휘두르고 사람들의 헛된 찬사 속에 둘러싸여 살아간 이가

죽고 난 뒤에 그의 실상이 밝혀져 부끄러운 존재가 되는 일도 흔하게 일어난다.

 

 

일시적인 부끄러움을 견뎌내고 영원 안에서 자랑스러움을 얻을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갖추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현명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한순간인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영원 안에서 순교를 받아들이신

우리의 자랑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말이다.

 

'백합 > 시와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정(情)  (0) 2022.09.21
노후를 이렇게 살면 즐겁다  (0) 2022.09.18
은행 나무  (0) 2022.09.16
인생에도 색깔이 있습니다  (0) 2022.09.15
어느 집 입구에 써있는 글  (0) 202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