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감동의 스토리

태종 이방원을 배운다

수성구 2022. 9. 11. 03:34

태종 이방원을 배운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흐르게 했던 왕은 태종(太宗, 1367~1422) 이방원이었다.
방번, 방석 어린 형제는 물론 개국공신 정도전부터 처가 민씨 집안까지
완전히 도륙을 냈던 이방원이었다.

필자(筆者)는 지금도 그 잔인함에 차마 경어(敬語)를 쓸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왜 태종이라는 시호(諡號)가 붙었는지, 시호에 클 태(太)자가 붙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이어 그 자식 이방원에게도 클 태(太)자가 붙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식이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오른 이유는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다.
시호는 왕의 붕어(崩御) 이후, 후인(後人)들이 붙인다.

그러니까 후세의 인물, 즉 세종과 그 신하들은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와 같은 동급의 왕이었다는 평가를 한 것이 분명하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사림세력들이 추구했던 신권정치(臣權政治)에 맞서
왕권정치(王權政治)를 정립하고 수호했던 인물이다.

이에 반대하거나 왕의 권위에 위협이 될 기미가 보이는 자들은 모두 주살(誅殺)하였다.
신하는 물론 친가와 외가, 처가의 처남까지 예외가 없었다.
태종은 왕권이 확고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이 피비린내 속에서 왕의 자리에 환멸을 느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물러나고,
훗날 세종대왕이 된 충녕대군에게 이방원은 모든 걸림돌을 제거해 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군사에 관한 일을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죽임을 멈추지 않는다.

왕권에 맞서거나, 장애가 될 모든 인물을 제거한 이방원. 그리하여 아들 세종은 부친이
닦아놓은 탄탄대로(坦坦大路)의 길에서 5000년 민족역사에 남는 최고의 치적을 이룬다.

훈민정음 창제부터 6진개척, 대마도 정벌, 장영실의 과학까지, 참으로 눈부신 날을 이룬 것이다.
필자(筆者)가 이방원에 태종이라 붙인 이유에 함구(緘口)하고 미움을 푼 것은,
태종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10명의 신하가 있다고 치자. 그 중의 한 명은 틀림없는 충신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명은 반역을 꿈꾸는 역적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8명은 누구일까.“
필자(筆者)는 태종의 다음 말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왜 그가 클 태(太)자를 쓰는 임금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나머지 8명은, 내가 강하면 충신(忠臣)이 되고, 내가 약해지면 역적(逆賊)이 된다.“
태종 이방원의 고뇌(苦惱)와 처갓집까지 멸문(滅門)을 시킨 그 번뇌(煩惱)를 이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맞이해야 할 슬픔이요, 고독이 아니겠는가.

박근혜의 몰락 속에서 발견한 것은 돌아선 8명이었다.
지금 윤석열 정부에도 1명의 충신과 1명의 역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8명의 기회주의자가 있으리라.
걸어가는 고독한 그 길에는 청사(靑史)에 기록될 민족의 역사와 국민들의 뜨거운 눈빛이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마시길 바란다.

-시인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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