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다시 찾은 삶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별 다른 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셋째 아이를 임신한 지 8개월째이던 나는
집에서 한 살배기 둘째 딸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면서
큰 아이 네일이 밖에서 노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과 몇 분 사이에 아들애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깜짝 놀란 나는 이웃집에 도움을 청해서 아들을 찾으러 나섰다.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에서 겨우 몇 미터 떨어진 작은 샛강에서
물에 빠져 있는 네일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 아이는 2주 후면 4번째 생일을 맞게 될 나이였다.
병원까지 아이를 태우고 달려가서 죽음을 선고 받고
장례를 치른 일들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고통과 비탄, 무력감에 빠져서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거기에서 나를 건져낼 수 없었다.
자식 잃은 엄마의 아픔
하느님께 두었던 나의 절대적인 믿음은 사라졌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늘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지만,
비탄에 싸인 지금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느님은 아무 데도 없어."
"세상은 그저 공허와 혼돈만이 가득할 뿐
아무 희망도 없는 곳일지 몰라."
이런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하느님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는 한편으로,
나는 하느님을 향해 화를내고 욕을 퍼부었다.
어떤 때는 내 삶에서 나가 달라고,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하듯 그분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나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주어놓고는
그렇게 금방 도로 빼앗아간단 말인가?
사람들은 어떻게든 나를 도우려고 애썼지만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상처를 대충 꿰매어 끌어안고
그저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더 많은 고통과 상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딸아이를 바라볼 때면
그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뱃속에 든 아기로 말하자면,
나와 남편이 그토록 기다리던 소중한 새 생명이었지만
지금은 나를 두려움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약을 먹고 아기와 함께 영원히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간호사였던 나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게 딱 하나 있었다.
만약에 하느님이 정말로 계셔서 내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다시는 내 아들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마침내 나는 하느님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저에게 당신 모습을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보여 주세요."
나에게 직접 보여 주는 표징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소용없다고
나는 온 마음으로 처절하게 부르짖었지만
실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아무런 응답도 기대하지 않았다.
내 방에 들어오신 분
네일이 죽고서 6주 정도 지난 어느 날,
나는 혼자서 침실에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와 딸아이는 낮잠을 자고 있고,
나는 언제나처럼 격노하고 울부짖으면서
슬픔을 토해내고 있었다.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누군가 방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너무나 생생하고 확실한 데다
사랑과 평화가 온 몸을 감싸는 느낌이어서
나는 그게 누군지 돌아보았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심지어 옷장 문까지 열어 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분이 거기에서 분노와 상처, 거부로 가득찬 나를
품에 안고 계셨다.
그분은 나를 꾸짖기는커녕,
그분 앞에 있는 그대로의 정직한 모습을
나를 -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으니까 -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 주셨다.
내 발은 마룻 바닥에 붙어 있었지만
나는 예수님이 두 팔로 나를 안아 올려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평화로 충만케 해 주심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나의 온몸에 넘쳐흐르자
나는 네일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게 되었다.
비록 그 아이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하느님의 친밀한 사랑을 깨닫게 되자
나는 네일을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릴 수 있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나의 눈물
그때부터 나는 점차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여러 해를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순간마다 인내와 온유함으로 나를 이끄셨다.
하느님이 계시는지 의심하고
하느님이 왜 나의 이 고통을 돌보아주지 않느냐고
투정하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전에는 하느님이 너무나 거룩하고
닿을 수 없는 분 같아서
선한 삶을 살려고 애쓸 때마다
홀로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지금은 모든 것이 변하였다.
예수님은 어느날,
내가 깊은 슬픔에 빠져서 주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한 번 더 나를 찾아오셨다.
나는 울면서,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교회가 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요한14,12)을 가지고
예수님께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님께 물었다.
"아픈 자가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왜 우리는 보지 못하지요?"
"예수님, 당신은 당신의 친구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리셨으면서
왜 내 아들은 살리지 않으시는 거죠?"
갑자기 마음속에서
저 먼 옛날의 길거리 한 모퉁이에
내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관을 둘러멘 한 무리의 장례지내는 행렬이었다.
맨 앞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예수님은 내게 곧장 다가오셨다.
그분은 크나큰 슬픔에 잠기어 울고 계셨다.
그분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 눈물이 과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어찌된 일인지 바로 '나'의 눈물이라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예수님은 고통을 겪는 나와 함께 계셨는데
얼마나 깊이 함께하셨는지
내 눈물을 예수님이 대신 흘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굳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께서 내 의문에 직접 응답해 주시거나
어려운 상황을 즉각 변화시켜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과 함께 있을 때면
나에게는
아무런 응답도 해결책도 필요하지않았다.
그분이 나를 이끌고 내게 필요한 것을 주셨음을
많은 경우 나는 나중에야 깨닫곤 했다.
상실과 회복
하느님께서 나의 삶을 치유하신 일을
곰곰이 생각할 때면
나는 종종 욥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 올곧은 사람은 하루아침에
열이나 되는 자식을 잃었지만
살아서 다시 한 번 복을 누렸으며
참고 견딘 것에 보답을 받았다.(욥1;42)
내게 닥친 시련은 욥에 비하면 훨씬 덜했으며,
나는 욥만큼 올곧지도 선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내게 보여 주신 사랑과 보살핌은
그에 못지않게 직접적이며 깊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욥이 하느님 앞에 참회하며 드렸던 대답을
똑같이 바칠 수 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42,2-3)
그리고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나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 마땅함을
나 역시 잘 알게 되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1,21)
- 말씀지기 9월 호 '내안의 말씀' 에서
이 글을 쓴 마가렛 밀러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펨브로크에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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