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손 도손 나눔

폐지 할머니의 1500만원

수성구 2022. 8. 29. 03:23

폐지 할머니의 1500만원

 

"(빵빵~) 왜 안 비키고 길 막고 그래요!" 운전사가 고함을 지른다. 
리어카 위에 수북이 쌓인 박스와 빈병들이 위태위태하다.  
신경질이 잔뜩 실린 경적 소리에 할머니의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러나 주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리어카, 
질질 끌리는 발걸음,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안쓰러워서 나도 모르게 할머니 뒤에서 리어카를 밀었다. 

"아이구, 고맙게. 그랴도 힘드니께 살살 혀." 할머니와의 첫 번째 만남이다. 
다시 할머니를 만난 것은 이른 아침의 사거리 편의점 앞에서다. 
전날의 흥과 취기가 가라앉은 아침의 거리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광고지와 일회용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이 마구 굴러다니고, 
대충 내놓은 종이 박스가 물기에 젖어 구겨져 있다.


그 재활용품과 종이를 일일이 수거하는  
구부정한 허리와 헝클어진 백발의 작은 몸집이 눈에 익었다.  
언젠가 리어카를 밀어 드렸던 그 할머니다.  
그렇게 스쳤던 폐지 줍는 할머니를 다시 만난 것은 성당에서였다. 

새벽 미사 후 적막과 어둠에 잠긴 성당 안에 앉아 있는데 
저쪽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검은 물체가 웅크리고 있다.  
"뭘 하세요?" 여기저기를 더듬거려서 전등을 켰다.


아, 폐지 할머니다. 
끈 떨어진 묵주를 찾고 계셨다. 
묵주를 드리자 할머니는 머리를 조아리고 연신 고맙다고 하신다.  
여든 살쯤 되셨을까. 해쓱한 얼굴과 남루한 차림새가 할머니의 사정을 짐작케 한다.


그날 후로 거리에서, 성당에서 할머니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동안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주일 미사 후 누가 뒤에서 부른다. 
할머니다. 성당 사무실 옆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손짓을 하신다. 
"그동안 왜 안 보이셨어요?"  
옆에 누운 지팡이를 보니 거동이 온전치 못한 듯하다. 


"이게 뭔가? 난 당최 뭔 말인지 알 수 있어야제."  
꼬깃꼬깃 접은 흰 봉투를 내미는데 신협에서 날아온 영업정지 통지서다.  
할머니는 망연자실했다. 


신협에 예금한 천오백만 원은 남편과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판자촌에 들어와 살면서 
폐지와 고물을 주운 돈 천오백만 원을 
매일 꼬박꼬박 저축한 할머니의 전재산이라고 하셨다. 

재개발을 코앞에 둔 판자촌을 떠나면 방을 얻을 돈인데 
시중 은행보다 이자를 높게 준다고 신협 직원이 자꾸 권해서 올해 초에 신협에 맡겼다. 
통지서에는 적어도 3개월 내지 5개월을 기다리라고 했다. 
다음날 자초지종을 알아보러 할머니를 모시고 신협에 갔다.  
이미 예금주들 때문에 난리통이었다. 


미리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예금을 인출했다고 한다.  
소문에 어두운 할머니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할머니를 진정시킨 후 할머니의 산동네 집으로 모셔 왔다. 
 
연탄을 때서 시커먼 방문턱을  굽은 허리와 삐걱대는 무릎으로 힘들게 올라간 할머니는 
"이거 잡숴 봐. 맛있어" 하며 분홍 소쿠리에 담은 삶은지 오래된 듯한 고구마를 내밀고, 
그냥 보내는 게 아쉬운지 일어서는 내 손을 붙잡는다.  

 

할머니와 마주앉자 고구마 껍질을 벗기듯 감춰 둔 사연을 술술 벗기기 시작하신다. 
고향에서 식구가 서울에 온 것은 40년 전. 
"여그서 할부지하고 자슥들을 다 잃었제. 다 잡아먹었어.

" 병원에 들어가는 돈이 무서워 약만 먹이다가  
병원에 데리고 갔을 때 가망이 없다며 돌려보내진 일, 
그 일을 치르고도 이곳을 떠날 엄두를 못내고 
리어카로 고물 수집을 하며 혼자 생계를 이었다. 
유일한 위로는 성당에 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찾아 주는 사람도, 오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외롭게 살았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할머니의 사정이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헛일이라고 주위에서는 말렸지만 신협중앙회, 금융감독원, 국민권익위원회에  
전화와 이메일로 할머니의 피해를 항의하고 따졌다. 
정작 그들에게는 관리 감독이라는 책임을 물었지만 곰곰이 되짚어 보니 나 역시 부끄럽다. 
그동안 내 곁의 수많은 폐지 줍는 노인 분들은 무심한 일상의 풍경이었지 않은가. 


타인의 고통을 안락한 거실에서 지켜볼 때 나는 안전한 곳에 있다고 안심하지 않았던가.  
뒤늦게야 내 이웃으로 성큼 다가온 폐지 줍는 할머니 앞에서  
나도 나눔과 연대의 이름으로 피할 수 없는 책임을 느끼고 있으니……. 
아! 그래서 타인의 고통과 안락한 내 거실 사이의 거리, 
그 무심한 거리의 고통을 소설가 박완서 씨는 뒤늦게 깨닫고 고백했구나.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물론 남을 해친 적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모르고 잘못한 적은 있을지 모르지만  의식하고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신에게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다행히 할머니는 이웃의 도움으로 더부살이를 하시다가  
꼭 3개월만에 천오백만 원을 찾아서 작은 방을 얻었다. 

 

요즘도 절뚝거리며 폐지를 주우러 다니시는데 
어쩌다 마트 앞에서 마주치면 두유를 사서 꼭 챙겨 주신다. 
세상살이 쉬운게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두 마디 어설픈 말로 위로하기 보다는,

이런 할머니 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소박한 마음속에 숨어있는 작은행복!!!
아름답게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