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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

수성구 2022. 7. 30. 03:04

7월 30일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

[ICON] Christmas with Saints - XVI c.,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축일: 7월 30일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
San Pietro Crisolog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T. PETER CHRYSOLOGUS
St. Peter Chrysologus B, Doctor (RM)
Born:406 at Imola, Italy
Died:2 December 450 at Imola, Italy
(Imola, ca. 380 - 450)
Pietro = pietra, sasso squadrato, dal latino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406-450년)는 이탈리아의 이몰라 출신으로서

그곳에서 공부하여 부제로 서품된 연후에 교황 식스토 3세에 의하여 424년 라벤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파격적인 이 임명 뒤에는 교황이 어떤 환시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그 결과 베드로는 규율이 상당히 이완되었던 교구를 크게 일신 시킴으로써 교황의 환시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크리솔로고’라는 별명을 얻게 하였다.

 

그의 탁월한 설교에 감동한 갈라 플라시디아 황녀는 그의 최고 후원자였다고 한다.

세심한 배려로 신자들을 돌보고 설교와 생활로써 그들을 가르쳤다. 450년경 세상을 떠났다.

성 베드로는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은 그의 기대와 의도에 맞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

이런 금언은 바로 젊은 나이에 서방 제국의 중심지인 라벤나의 주교(424년)가 된 베드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당시 그의 교구 안에는 이교도의 악습과 풍속들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는데, 그는 그런 것들을 없애고자 결심했다.

그의 중요한 무기는 짧은 설교로서, 그의 설교 중 많은 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 설교들이 사고의 진수는 아니라는 것은 애당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설교들은 도덕적 인식으로 가득 차 있고, 건전한 교리와 5세기 라벤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의 설교 내용들이 너무나 진실된 것이었으므로 13세기가 조금 지났을때 교황 베네딕토 3세는 그를 교회 학자로 임명했다.

교구 신자들을 성실하게 가르쳐 깨우침을 주고자 했던 그는 세계적인 교회 학자로 인정되었다.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직무 수행에 대한 열성과 더불어 교회의 가르침뿐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학문을 존중했는데 그 이유는 학문이란 행운이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한 의무이며 하느님이 주신 능력의 발달이고,하느님께 대한 공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출생지인 이몰라로 돌아와 살다가 450년경 세상을 떠났다.

 

성베드로 크리솔로고의 교훈에 바탕이 된 것은 아마도 학식에 대한 그의 태도였을 것이다.

그의 견해로 학식은 미덕 다음가는 인간의 위대한 개혁자이며, 진정한 종교 지지자였다. 무지는 미덕도 아니고 반지성주의도 아니다.

지식은 신체적,경제적, 행정적 재질과 같이 자존심의 근원이 아니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재질과 기회에 따라서 고상한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우리의 지식을 넓혀야만 한다.

 

-에우디게스에게 보낸 반서(返書)-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의 지도자인 에우티케스는 448년 유죄 판결을 받고 교회 지도자들의 지원을 구하던 중 베드로 크리솔로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베드로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는 평화와 신앙에 대해서, 로마 주교의 허가 없이 신앙 문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에우티케스에게 단순한 신앙심을 갖고 강생의 신비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교회의 평화는 천상의 기쁨을 주게 되지만, 분열은 슬픔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에우티케스에게 일깨워 주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148: PL 52,596-598)

 

육화의 신비에 대하여

 

동정녀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잉태하고 동정녀로서 아기를 낳으며 또 동정녀로 남아 계십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를 초월하는 하나의 표시입니다. 이성을 초월하는 하늘의 권능입니다.

자연을 넘어서는 창조주의 업적입니다. 통상적인 것이 아니고 특이한 것입니다.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신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필연성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 의지에서 왔습니다. 그것은 자비의 표지이고 인간 구원의 회복이었습니다.

첫 사람을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할 필요 없이 순수한 흙으로 지어내신 분께서는 당신이 태어나게 하시고 순수한 동정녀의 몸에서 당신을 지어내셨습니다.

우리 육신을 지어내시고자 너그러운 마음으로 흙을 취하기를 원하신 그 손은 우리를 회복시키고자 우리 육신을 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조주께서 당신 피조물 안에 계시고 하느님께서 육신 안에 계시는 것은 피조물에게 영예이고 창조주께 수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여,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그다지도 보배로운 것인데, 왜 당신을 낮추어 생각합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을 그다지도 영예롭게 하시는데, 왜 자신을 수치스럽게 합니까?

왜 당신은 어디서 나왔는지 알고 싶어하지만 무슨 목적으로 지음받았는지는 묻지 않습니까?

당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의 집은 당신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닙니까?

 

당신에게 부어진 빛은 주위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당신을 위해 밤이 마련되어 있고 당신을 위해 낮도 질서 지어져 있으며,당신을 위해 하늘은 태양과 달과 별들의 숱한 광채로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땅은 꽃과 수풀과 열매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또 새 창조의 기쁨이 슬픈 고독에 빠지지 않도록 당신을 위해 창공과 땅 위와 맑은 물에 살고 있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동물의 무리를 지어낸 것입니다.

더욱이 당신을 지으신 분께서는 당신의 명예를 증가시킬 무엇을 더 생각하십니다.

즉, 그분은 당신에게 자신의 모상을 박아 주시어, 이것이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세상이 볼 수 있게 하는 모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주님의 소유가 운영하는 대표자없이 남아 있지 않도록 그분께서는 당신을 주님 앞에 세상의 대표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넘치는 사랑으로 자신을 위해 당신 안에 지어내신 그 육신을 취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그림자로써만 드러내 보이시기를 원한 그분은 이제 자신을 실제 사람으로 드러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이제 까지 자신의 모상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의 육신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탄생하십니다.그것은 주님의 탄생으로 부패된 피조물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기가 되고 양육받으시어 당신이 지으신 그 완전하고 끝없는 나이를 되찾도록, 인생이 가야 할 나이를 거쳐 지나가셨습니다.

사람이 더 이상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인성을 짊어지셨습니다.

 

땅의 피조물로 만드신 사람을 이제 천상의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영으로 살던 사람을 하느님의 영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들어올리신 다음 사람 안에 죄나 죽음, 수고나 고통, 한마디로 지상적인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일치 안에 성부와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멘.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가 한 것으로 보는 강론에서

(De pace:PL 52,347-348)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해 줍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덕행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존하는 사람 안에서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평화는 사람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그에게 귀족의 이름을 줍니다.

평화는 또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지니고 있는 위치를 변모시켜 그를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노예 상태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형제들간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완성이고 정의의 규범입니다.

지식의 스승이고 윤리의 수호자이며 만사의 칭송할 만한 질서입니다.

 

평화는 기도의 목표이고 쉽고 안전한 청원 방법이며 모든 욕망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평화는 또 사랑의 어머니, 화목의 유대,그리고 원하는 것은 다 청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평화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청하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습니다.

 

우리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평화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흡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 가운데 너희와 헤어졌다.내가 다시 올 때 너희가 평화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보고 싶어하신 그 평화를 우리에게 남기고 떠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를 보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준 것은 다시 찾겠다." 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모호함이 조금도 없습니다.

 

마음속 깊이 평화를 심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그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것은 원수의 짓입니다.

형제적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미움은 마귀들로부터 나옵니다.따라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미움을 단죄해야 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 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여러분이 평화를 사랑하고 화목을 소중히 여겨야 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평화와 화목은 사랑을 낳고 또 그것을 자라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사랑은 하느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다."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없습니다.형제 여러분, 우리 생명에 이바지하는 계명들을 지킵시다.

 

깊은 평화의 유대로써 형제들의 공동체를 한데 묶고,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그 사랑의 구원적 유대로써 공동체를 견고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 마음의 온갖 욕망을 지닌 채 사랑을 포옹해야 합니다.사랑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은혜와 상급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평화 가운데 계시므로 평화를 다른 모든 덕행에 앞서 간직해야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십시요.그러면 모든 것이 평온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상급이고 여러분에게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평화의 일치 위에 기초를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온을 누릴 것입니다.

 

 

타고난 웅변 때문에 금언(金言)이라는 애칭을 받고 교회의 중진이 된 이탈리아 라벤나의 대주교 성 베드로는 406년 이몰라라는 촌에서 태어나 그 교구 고르넬리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부제로 서품되었다.

 

그가 27세 때였다. 서 로마의 황제 발렌티니아노의 수도였던 라벤나의 주교가 서거하자

그 후임을 선정하고 당선자에 대한 교황의 비준을 받기 위해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했는데, 고르넬리오 주교도 사랑하는 베드로를 동반하고 이에 참가했다.

 

그런데 당시의 교황 식스토 3세는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하며, 당사자를 제쳐놓고 부제인 베드로를 라벤나의 주교로 임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놀라움, 더욱이 당사자인 베드로의 놀람은 어떠했으라! 그는 당황하며 극구 이를 사양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의라는 교황의 엄명을 거절할 수 없어 마침내 주교로 축성되었다.

 

물론 사절단은 교황의 너무나 의외의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근차근 설명을 하자 그 본의를 알게되어 아주 연소한 베드로를 새 대주교로 추대하는데 쾌히 동의했다.

그들이 라벤나에 돌아오자 시민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새로운 대주교를 추대하는 영광에 감격되어 기뻐하며, 황제를 선두로 성대한 행렬을 지어 교외까지 마중 나왔다.

 

당시 라벤나 시민은 다신교에서 천주교로 귀화한지 얼마 안 되었고, 향락과 사치등 악풍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을 때에 아리우스파 이단이 민심을 현혹케 했으므로 그곳의 대주교인 베드로의 임무는 대단히 무거웠다. 그래서 그는 취임 벽두에 이렇게 연설을 했다.

"금번 불초 본인이 의외에도 당신 주교의 대임을 맡게되어, 미력한 나로서는 이 직을 욕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의 협력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선 나는 여러분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과 여러분이 구원을 생가하는 나의 충심으로부터의 염원입니다."이렇게 열성을 피력해 시민의 반성을 촉구했다.

 

그 페부로부터 울려나오는 열성의 부르짖음은 냉담한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깊이 뚫고 들어갔다.

그들은 베드로의 웅변에 감탄하는 한편, 그의 성스러운 생활 태도에 탄복해 그의 설교를 들으러 수많은 이들이 몰려와 청중은 날로 늘어갔다.

처음에는 다만 호기심에 끌려 그 강론을 듣던 이단자들도 그 명쾌한 논리에 마침내 꿈에서 깨어나 진리에 귀화하는가 하면, 죄인들은 그 폐부를 에는 듯한 훈계에 눈물을 흘리며 회심을 약속하고, 시민들은 음미(淫靡)한 놀음과 춤에서 멀어져, 라벤나는 가톨릭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베도로의 열성에 탄복한 황태후 갈라 폴라시디아의 조력이 지대한 힘을 주었다.

 

베드로가 얼마나 열렬히 설교를 했는가는, 때로는 그의 목소리가 아주 쉬어버렸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런 때는 청중이 마치 자기 일같이 그의 신변을 걱정하고 좀 휴양하기를 권고했는데 이로써 그들의 베드로에 대한 존경심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의 설교는 후에 라벤나의 주교인 펠릭스에 의해 편집되었는데, 그 중 176편만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 일례를 들자면, 정초에 성행하는 언짢은 무도회를 책하여 "악마와 즐겨 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같이 있을 때의 깨끗한 평화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겟는가?"

이와 같이 그는 성스러운 분개로 세인의 죄악을 규탄하며 지옥불의 무서움을 설명해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주교 축성식에서 그는 충심으로 가난한 이의 아버지가 될 것을 서약했는데 세월이 지나서도 그 서약을 잊지 않고 자주 라벤나 시의 스라무 가에 있는 빈민굴을 찾아가 자기 음식을 줄여서까지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한다.

그리고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황태후 갈라 플라시디아의 도움으로 자선사업을 했다.

서 로마 제국의 수도 내의 대주교좌에 있으면서 학덕이 겸비한데다 비할데 없이 탁월한 웅변가인 베드로의 명성은 곧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신앙은 반석같이 견고해 요동치 않았으며, 동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에우디게스가 어처구니없이 이단에 빠져 베드로를 자기편으로 끌기위해 권고장을 보냈을 때 그는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 이런 것을 보내는 이는 사도 성 베드로 외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한 마땅히 사도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성좌의 결정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하며 그 유혹을 단연코 물리쳤다.

 

449년에 그가 ’에우디게스에게 보낸 반서(返書)’는 지금도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증거하는 중요한 자료로 되어 있다.

 

베드로는 그 당시 겨우 43세였으나 매일 같은 심로(心勞)는 나이보다 빨리 체력을 소모시켜,2년후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 임종 준비를 하기 위해 대주교좌를 떠나 고향인 이몰라에 돌아와 순교자 성 카시아노의 묘를 참배하고, 그 성당 제대에 미려한 성작과 관을 바치고, 그곳에서 병자 성사를 받고 451년 12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성 카시아노의 묘 곁에 안치되었으며, 팔 하나는 황금상자에 봉해 라벤나에 보내어져 그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자선 활동으로 매우 유명했고 또 뛰어난 설교를 했으므로 "크리솔로고"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1729년에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베드로 크리솔로고 
라틴어  Petrus Chrysologus  

 

Petrus Chrysologus(406-450). 성인. 축일 7월 3일. 주교. 교회학자.
이탈리아의 이몰라 태생. 명설교가로 알려져 있다. ‘chrysologus’는 ‘금언’(金言)이란 뜻의 그리스어인데, 이것은 크리소스토모(Johannes Chrysostomus, 347?-407)의 ‘chrysostomos’ 즉 ‘황금의 입’이란 뜻에 견주어 붙여진 이름이다. 라벤나의 주교가 된 후 최초의 설교를 서로마 여황제 갈라 플라키디아(GaIla Placidia) 앞에서 했는데, 그때부터 여황제의 끊임없는 지지를 얻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stinus)와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어서 아리우스주의, 펠라지우스주의, 마니교(敎)등을 논박하였다. 또한 로마 주교좌에 대한 신앙을 견지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에우티케스(Eutyches)에게 보낸 편지(449년)에 의하면, 에우튀케스 논쟁문제의 처리에 있어서는 로마 주교측보다 오히려 에우튀케스에게 더 호의를 표시하였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이 오늘날 잔존하고 있지만 그밖의 문서는 거의 모두가 남아 있지 않다. 설교의 주요한 것은 빈첸티노(Agapitus Vincentinus)에 의해 볼로냐에서 출판되었다(1534년).

 

 

아리우스주의 
라틴어  Arianismus  영어  Arianism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 250?~336)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位格)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聖父)만이 그러하다. 성자(聖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半神)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反)삼위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信經)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아니즘을 몰아내고 정통 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펠라지우스주의
라틴어  Pelagianismus  영어  Pelagianism
 
  
펠라지우스(Pelagius, ?∼418)가 주장한 이단설. 원죄와 유아세례를 부정하였다.

펠라지우스는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력으로 실행할 능력이 있으므로 구령(救靈)도 신앙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그것을 쉽게 하는데 은총이 필요할 따름이며, 은총은 구약의 율법이나 복음서, 예수의 본보기처럼 외적(外的)인 것에서 그치고, 인간의 영혼을 비춰주고 개조하여 강화시키는 것은 내적(內的)인 은총이라고 주장하였다.

 

펠라지우스는 브리타니아가 아니면 스코틀랜드 지방의 출신으로 410년까지는 로마에서 수도자로 있었다. 수도생활에 지도적 역할을 한 인물로, 저술가로도 활동하다가 알라리크군(軍)의 침략을 피하여 아프리카로 갔다. 그는 고전적인 교양이 풍부하고,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단설은 고대 윤리학의 정신을 받아들인 것으로 아우구스티노나 후대의 학자보다 인간의 선에 대한 자연적 능력을 높이 생각한 그리스의 교회 저술가 글레멘스의 저서 등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 잇는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그는 원죄와 그 결과를 부정하고 경시했으며 유아세례도 부정하였다.
 


마니교 
라틴어  Manichaeismus 영어  Manichaeism
 
 
페르시아인 마니(Mani, 216-276)가 3세기에 창시한 이원론적(二元論的) 종교 이단.
마니교는 한때 인도, 중국, 지중해 연안 일대에 퍼져나갔으며 거의 세계적인 종교라고 할 만큼 널리 보급된 적도 있었다. 3세기초의 서부 페르시아는 풍성하고도 다양한 토착 외래종교와 신앙의 집합장소였다. 토속적인 고대신앙과 조로아스터교(拜火敎), 그리고 유태교가 그 중에 들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시리아 교회에 소속된 아랍인들을 통해서 페르시아에 소개되었으며, 심지어 힌두교의 바라문(Brahmana)과 불교 승려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풍토에서 귀족가문 출신의 창시자 마니는 240년 무렵, 사산조(朝) 시대에 조로아스터와 그 밖의 예언자(모세, 예수)의 사명을 개선할 뿐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신의 계시를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주장하였다.

 

마니는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왜 타락했는가, 또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웅장한 우주론적 신화를 구상하였다. 태초에 두 가지 적대적 본질이 존재했는데, 선과 악, 빛과 어둠, 하느님과 물질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느님의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꾸며낸 것이고, 그 모두가 원상(原狀)을 회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작용을 하는 것이 물질이며, 여기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 한 쌍이 창조된다. 그리고 아담의 눈을 열어주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찬란한 예수라는 이름은 그의 영혼의 신적 기원(紀元)을 알려준다. 그러나 아담의 자손은 물체의 설계에 따라 생식을 계속하며, 이것이 바로 현재 인류가 존재하는 상태라고 주장하였다. 마니교는 또 불교적인 윤회설(輪回說)의 색채도 짙다. 그 사상체계에서는 다른 종교와의 유사성이 많은 점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마니교에 의하면, 신은 모든 선의 창조자이고, 악마는 모든 악의 창조자이다.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간에는 끊임없이 투쟁이 전개되고, 신은 영(靈)이 신체보다 우위에 섰을 때만 승리를 거둔다. 사람이 행하는 악은 악마가 지배하는 힘에서 비롯된다고 마니교는 전제한다. 그러므로 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는 종교이다. 마니는 인도에 가서 종교 단체를 만들고 페르시아에 돌아와 설교를 계속하였다. 왕실(王室)은 처음에 그를 환영하였으나 다음에는 배척한 후, 걸형(桀刑)에 처하였다.

 

마니교는 죄와 참회문제에서 그리스도교와 가장 심각하게 대립된다. 즉 세계는 선인 빛의 세계와 악인 어둠의 세계라는 두 근원적이고 적대적인 부분으로 구분되고, 어둠의 세계 각 부분(지구, 인간)의 발생과정에서 선 · 악 두 세계의 요소들이 뒤섞여 생겨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마니교는 12세기에 가까운 동안 북아프리카로부터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갖가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8세기와 9세기에 걸쳐 외몽고의 오르콘 강변에 세워진 위구르국에서는 국교로도 인정되었고,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중국 서남부인 복건성(福建省)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29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반마니교 칙령이래, 동 · 서 로마의 그리스도교 황제들과 발상지인 페르시아 군주들의 금교(禁敎) 정책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와 같은 교회 저술가들로부터 이단이요, 그리스도교의 큰 적으로 신랄한 공격을 받아왔다. 마니교는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설을 주장한 바울리치아노파(派),보고밀파(Bogomiles), 카다리파(Cathari) 등 중세 종파들과의 관계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많은 수수께끼를 남겨놓고 있다.

[참고문헌] O.G.V. Wesendonk, Die Lehre des Mani, 1922 / F.C. Burkitt, The Religion of the Manichees, London 1925.
 
 
 
에우티케스

라틴어  Eutyches 

 

Eutyches(375?∼454). 콘스탄티노플의 교외수도원장.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이단자.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의 수창자(首唱者)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들과 동질(同質)임을 부정, 또한 강생(降生) 전에는 2성이 있었으나 강생 후에는 신성(神性)과 인성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 동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궁정에 세력을 가지고 네스토리우스파에 강력히 반대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지방회의(448년)에서는 오히려 드류라이온의 주교 에우세비오에 의해 단성론적 이단으로 고발당하고, 총대주교 플라비아노에게 파면당하였다. 이에 대해 에페소 군도회의(449년)에서는 거꾸로 그가 정통신앙임이 선언되어 복직했으나,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그 파의 총수 디오스코로가 파면 추방되고, 그 자신도 후에 추방당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