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성 바오로)

수성구 2022. 6. 29. 04:52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성 바오로)

축일:6월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feast of Peter and Paul
Solemnity of Saints Peter and Paul
celebration of Saints Peter and Paul co-founders of the Church

 

 

성 베드로와 성바오로는 공동체를 위한 일치의 표지이며 구원의표지입니다.

 

두 분은 로마시의 보호자이다.
베드로 성인는 어부였고 이름이 시몬이었다.
네로 시대에 십자가에 머리를 밑으로 하고 거꾸로 순교 하였다.

바오로 성인은 제일의 선교 사도이며
가장 중요한 선교사로써 67년 로마에서 머리를 잘려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는 각각 64년과 67년에 순교하였으며,
그들의 무덤은 바티칸과 로마 성밖 오스티아로 나가는 길가에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며
주님께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약속을 듣는다.
그는 형제들을 굳세게 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거친 인물에게 그토록 중요한 일을 맡기시는 하느님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는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베드로였기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는 형제들의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바오로는 그리스도께 늦게 부름 받았지만,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활기있고 놀라운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주님의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어떤 시련도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씨 뿌리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었다.

 

서로 대조적인 두 인물이 똑같이 위대한 공헌을 하여
교회가 커 나가는 데에 주춧돌이 되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주님의 신비이다.

 

로마 교회는 두 사도를 같은 날에 기념해 왔다.
두 사도는 교회의 두 기둥으로 공경을 받아 왔으며, 옛 성화에도 함께 등장한다.

 

보편 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정하여,
성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세계 모든 신앙인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ICON]Apostle Paul - Andrei Rublev.
c. 1420s. Tempera on wood. 160 x 109 cm.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성 바오로 사도

St. Paulus, Ap.
San Paolo Apostolo
St. PAUL the Apostle
Born : c.3 as Saul at Tarsus, Cilicia (modern Turkey)
Died : beheaded c.65 at Rome, Italy
Paolo = piccolo di statura, dal latino (small of stature)
Emblema: Spada(Sword)

 

 

 

 

2 디모 4,7-8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리기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성서)

 

 

 

바울로  
라틴어 Paulus
영어 Paul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의 한 사람.

십이 사도의 일원은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가장 큰 활약을 한 사도였다.

칠리치아(Cilicia)의 타르소(Tarsus)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그는 성장한 후

광신적인 바리사이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박해로 악명이 높았다(사도 8:3).

 

그러나 그리스도 교도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된 바울로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개종하였다(사도 22:10).

바울로가 그리스도교를 처음 전하기 시작했을 때 교회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바리사이인들은 그를 변절자라고 욕하였고 그리스도 교도들은

그의 박해에 대한 초기의 평판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나바는 특히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는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에

바울로를 데리고 가서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주님을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일과

또 다마스커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전도한 일들을 낱낱이 설명해주었다(사도 9:27).

 

바르나바의 변호가 효과가 있어 안티오키아 교회는 키프로스, 밤필리아, 이고니온, 리스트라,데르베 등으로

이어지는 전도 여행에 바르나바를 지도자로 바울로와 마르코를 보조자로 각각 임명하여 파견하였다(사도 13:14).

첫 번 전도 여행을 완수한 후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당시 할례를 강요라던 낡은 율법의 지지자들에게

보다 완화되고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유대에서 몇몇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내려와 교우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와 그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몇몇 신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는데(사도 15:1-2) 베드로가 이 회의를 주관하였다.

모든 견해들이 피력된 후에 마침내 바울로와 그의 동료들의 견해 즉,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유태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견해가 승리를 거둔다(사도 15:5-21).

 

회의를 마친 후 바울로는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에서 그는 프리기아, 갈라디아,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지방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모든 신도들을 격려하였으며(사도 18:23)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는 마체도니아와 그리스를 방문하였다.

이 세 차례의 전도 여행에서 바울로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나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릴 만큼 사도로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그는 신약성서 27권 중 13권을 서간문의 형식으로 저술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그가 재판받기 전 투옥되어 있던 2년 동안에 씌여진 것이다.

67년경 바울로는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손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현재 성 바울로 대성전에 안치되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바오로는 라틴어 Paulus로 본래 '작은'이란 뜻이다.

만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갑자기, 미국은 공산주의를 택해야하며 헌법을 무시해야 한다고

설교하기 시작한다면 그에 대한 분노와 반발은 대단할 것이다.

그러한 분노와 반발은 바오로가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므로 이 예는 그의 일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실한 바리사이파였으며, 모세의 율법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그런데 이제 그가 이방인들을 환영하는 이단자로, 배반자이며 배교자로 자기 형제인 유대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바오로의 근본적인 확신은 하느님만이 홀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단순하고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가장 철저하게 율법을 기키는 것까지-도 죄에 대한 보상과 은총의 대가로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인간의 선행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죄로부터, 악마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구원되기 위하여

인간은 온전히 예수님의 구원 능력 앞에서 자신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없는 율법의 쓸모 없음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평생을 두고 논쟁했지만

자기 형제인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아직도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약속의 자녀들인 유대인을 원줄기로 하여 이방인들에게 접목된 것임을 상기시켰다.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일은 교회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그 어떠한 그리스도의 사절보다도 더 열성적이고 박력이 있으며 용감한 일꾼으로 만드는 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박해와 천대와 나약함은 매일매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였으며 더욱 승화될 수 있는 요소였다.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있었으며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이방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일하다가

로마 황제 네로라는 이방인 권세자에 의해서 순교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The Apostle Paul-Rembrandt.
c. 1657. Oil on canvas.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바오로는 양극으로 대립된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를 일치 키기 위하여 타협 없이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가장 위대한 행동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모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하여 이방 교회에서 벌인 모금 운동이다.


그것은 우선 그들의 물질적 결핍을 구제하는 방법이었으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공동 연대성을 상징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바오로는 아마도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의심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실패가 어떠한 것이든 율법의 노예에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도구이며, 유대인들의 고귀한 유산에 새로이 접목된 이방인들의 가지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 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2고린 11,24-27;12,10)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바오로는 소아시아의 시리아 다르소에서 출생해 처음은 사울이라고 불렸다.

양친은 유다인으로서 열심히 그 종교의 율법을 지켜나가고 있었는데,

바리사이인이던 아버지는 아들 사울에게도 그 정신을 심어 주려고 애썼다.

그래도 사울은 당신 다르소에서 번성하던 그리스 주의의 교육을 받고,

그리스의 철학, 역사, 문학, 언어등에 능통했다.

이러한 지식은 그 당시의 문화인에 있어서는 불가결의 것이었고,

그의 풍부한 교양은 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바오로는 당시의 습관에 따라 하나의 손으로 하는 직업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천막을 만들던가 아니면 주단을 짜는 일이었다.

그는 그 기술에 매우 능통해 그것으로 넉넉히 독립적인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유명한 학자 가므리엘의 슬하에서

유다교의 신학과 히브리어를 연구하게 했다.

 

예루살렘에는 그의 누이가 출가해 있었는데, 그녀의 아들은 후에 바오로를 많이 도와 준 사람이다.

바오로는 학문에 많은 발전을 하고, 규율이 잡힌 엄격한 생활에 익숙해갔다.

그간 그는 예수나 요한 세레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이유는 아직 예수께서는 공동생활을 시작하시지 않았고,

요한 세례자도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르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신자의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을 무렵, 바오로는 다시 에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타고난 불과 같은 열정과 유다의 율법에 대한 존경심에 맹렬히 그리스도교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그는 성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일때나 예루살렘과 그 부근의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박해때는

언제나 참가했다.

 

 

얼마뒤에 그는 다마스커스에 그리스교도교도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즉시 그들을 체포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는 땅에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는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네 발로 송곳을 차면 너만 해로운 뿐이다."라는 대답이 있었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공포와 경악으로 떨면서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던 바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잇을 것이다"하는 음성을 듣고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의 인도를 받아 가며 다마스커스로 들어가

3일동안 아무 음식도 취하지 않고 오로지 통회의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다마스커스에 아니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나타나

"어서 일어나 '곧은 거리'라는 동네에 사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다르소에서 온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라.

그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내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할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사울로 말하자면 유명한 박해자였으므로 아나니아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어쨌든 주님의 분부대로

그를 방문하고 사울에게 손을 얹으니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는 동시에

바오로는 시력을 회복하고 일어나 아나니아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신자가 된 바오로는 전에 그리스도교의 박해 때 드러낸 열의를 그대로 전교하는데 돌려

그 박학한 지식을 무기로 삼고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복음 선포의 시작은 다마스커스 마을이었는데 유다교도들이 그를 미워하며 죽이려고 햇으므로

그는 그것을 피해 광야로 가 그곳에서 3년간 기도하고, 성서를 읽으며, 묵상하면서 사도직을 준비했다.

그 동안의 의식주는 손수 천막을 만들어 마련했다.

 

그는 한 나라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영혼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사도로서 일어섰다.

우선 그는 다시 다마스커스에 갔고, 다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 사도를 만나보고,

다시 고향인 다르소에 돌아가서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아티오키아로 길을 떠났다.

그는 가는곳마다 신자들이 단체를 만들엇으며, 그만큼 도처에서 교회를 탄압하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용감하던 그는 아무리 고난이 많이 닥쳐와도 하느님을 위해 온몸으로 인내했다.

 

 

Cartoon for St. Paul Preaching in Athens.- Raphael.
c1513-1514. Mixed media on paper, mounted on canvas.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UK.

 

 

그의 유명한 3차례의 전도여행은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에 돌아왔을때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여행은 3년간이나 걸려서 소아시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등에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이번 한 번의 여행만 한 것이 아니라, 처음은 중요한 도시만을 방문하고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부근 일대에도 점차 신자를 증가시킨다는 전교법을 이용하여 제2, 제3의 전도여행을 했다.

 

제2차 전도여행도 역시 약 3년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이번에는 전에 교회를 세운 도시를 방문하고 기타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도 방문했다.

또한 그는 유럽의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아테네, 고린토 지방에도 발을 옮겨 에페소 지방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제3차 전도여행은 5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중 3년은 에페소에서 머물렀다.

바오로는 전부터 로마를 방문하고 거기서 전교를 하다가 다시 멀리 스페인까지도 가려고 결심하고 있었으나

그 실현에 앞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유다교도들에게 체포되어 2년간을 가이사리아의 감옥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황제에게 상고하고 그로 인해 로마에 호송되었으나

그곳에서의 감금생활은 매우 관대했으므로 전교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지내기를 2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무죄 선고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St Paul-MASACCIO
1426. Tempera on wood, 51 x 30 cm.

Museo Nazionale, Pisa


 

전승에 의하면 바오로는 후에 스페인에 갔다가 다시 동쪽 나라로 갔으나

예루살렘 방면에는 가지 않고 다시 로마로 향했다.

그리고 네로 황제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67년 칼로 참수 당하여

거룩한 순교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한다.

 

바오로의 순교 장소에는 오늘날 한 성당이 건립되었고 그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그의 묘지위에는

미(美)의 극치를 드러내는 대성전이 웅장하게 서 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성 바오로 대성전이다.

 

성 바오로는 생존시에 친히 세운 교회나 제자들에게 보낸 서간이 14통이나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신약성서로 인정받아 지금도 예수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귀중한 문헌으로 되어 있다.

 

 

바오로의 활동은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수많은 나라에 가서 전교하며 갖은 환난을 당했다.

그는자기 스스로도 말한 바와 같이 종종 감옥에도 갇히고 죽을 위험을 당하고 냉대와 학대를 받았다.

그는 유다인들에게서 40대에서 하나 모자라는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로마인들에게서도 태형을 세 번 당하고, 세 번 파선을 당해 일주일 동안 바다 위에서 표류한 적도 있었다.

 

또한 그에게 가끔 닥쳐온 죽음의 위험, 병고, 기갈, 단식, 추위, 노고, 영적 고통 등,

그는 일체를 그리스도를 위해 인내했다.

 

예수야 말로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라 2, 20)

하신 그의 말대로 사랑하는 예수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열렬히 원했다.

그 희망은 성취되어 그는 지금 성스러운 사도, 영광스러운 순교자로서 천국의 영복을 누리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바오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크리스챤 저술가로 꼽힌다.

로마서(고린토에서 57년-58년), 고린토 1서(에페소에서 54년), 고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디아서(에페소에서 54년), 골로사이와 필립비, 에페소,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 Ⅰ-Ⅱ(고린토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디모테오서와 디도서를 보냈다.

히브리서는 아마도 다른 저자인듯 하다.

 

 

 


 

The Conversion of Saul -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542-45. Fresco, 625 x 661 cm. Cappella Paolina, Palazzi Pontifici, Vatican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는 한 마디 음성에 박해자에서 열애자로 돌변한 바울로는

기원전 5년경 다르소의 히브리 가정에서 태어난 바리사이파요 율사 후보생이었다.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만으로 부족하여 다마스커스까지 쫓아가 신자들을 없애려던 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가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 이를 성 스테파노의 기도의 은혜라고 한다.


동족에게 매를 맞고 돌질을 당하고 바다에서 세 번이나 파선하여 표류하였으며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2고린 11,27)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에서 희랍으로 희랍에서 로마로 또 스페인까지 먼 길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1고린 9, 16)이라고 외쳤으니 그를 "이방인들의 사도"(로마 11,13)라고 하는 것이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한 그는 모든 것을 버렸기에 모든 것을 얻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고 황홀해 하였다.

그에게 더 소원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와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필립 3,10)이었다.

그 소원은 64년 로마에서 성취되었다.


신앙은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

새 사람이 되려면 비워야하고, 비우는 것은 채우는 것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The Apostle Paul - Dionysius.
From the Church of Nativity of the Virgin in the Ferapontov Monastery.
c. 1502. 155 x 60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사도]

사도라는 말은 희랍 원어로 아뽀스똘로스(Αποδτολοs)이며, 그 뜻은 ’누구를 보낸다.’

또는 사자(메시지 전달자)라는 말이고,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뽑으신 12 제자라는 뜻으로 통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라는 말은 희랍어 구약성서에 단 한번 사용하였으며,

이런 뜻의 아라메아어는 예수님 시대 이전에는 사용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예수님께서 생전에 쓰신 말인지, 초대교회 때에 쓰여진 말인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기록의 근거는 이러하지만,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첫 파견자들인 12 제자를 지칭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사도들의 증거활동]

사도들의 임무는 그리스도 부활의 사실을 증거 하는 것으로 (사도행전 1, 8. 22 ; 2, 32 ; 10, 39-41),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믿는 사람들을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 안으로

보다 깊이 젖어 들도록 이끄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증거활동은 두 가지 의미의 특징을 지녔는데

첫째로는 눈으로 보았다는 증거(사도행전 10, 39)와,

둘째로는 크리스찬 믿음의 증거로 신앙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신앙을 현실화 시켜주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유다스를 대신할 마티아를 뽑을 때 사도가 되는 요건(要件)을 정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오시는 동안,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승천하실 날까지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뽑아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사도행전 1, 21-22)."

 

 

 

 

The Conversion of St Paul- ESCALANTE, Juan Antonio Frias y
Oil on canvas. Museo Cerralbo, Madrid

 

[바오로사도]

바오로 사도는 위와 같은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직 임무를 받았다는 점으로 보아 "사도"라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이미 광의(廣義)로 풀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소명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이루어진 점(갈라디아 1, 1)과

특별한 개종(改宗)이었다는 점입니다(로마 1, 1).

 

바오로는 항상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라고 하였지만,

다마스코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뵈었던 경험이 사도가 되는 조건에 합당했던 것입니다(1 고린토 9, 1).

 

†주여. 나를 약하게 하소서.

 

성 바오로는 비상한 은총과 능력을 받았고 또 그것은 바오로 안에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느님의 능력이요. 바오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 바오로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에게 매질하고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런 약점을 떠나게 해주시도록 세번이나 간청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 고린 12.9)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을 힘껏 드러내게 하시기 위하여

바오로를 약하게 하셨다는 말도 안되는 이것을 당신은 깨닫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에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 은총의 기적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우리 자신의 힘을 넘어서기를 두려워 하기 때문에

용서가 가져오는 기적적인 결과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해야 할 위치에 우리 자신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활동하는 것을 알아보지 못 할 것 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우리는 그것을 참으로 믿습니까?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훌륭한 것을 만들어 내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밀알이 죽어야 합니다.  


 

 

Peter and Paul, the Holy Apostles

 

 

St Paul-GIOTTO di Bondone
1290s, Fresco,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