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유일한 계명은 사랑하는 것이다

수성구 2022. 6. 9. 06:53

유일한 계명은 사랑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 머물러라 3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알기 위한 기준들 (5)

 

 

하느님 뜻은 언제나 따르기 힘들기만 한가?

 

 

하느님의 뜻, 그분 은총의 영감은 분명히 우리의 즉각적 경향과 종종 반대된다.

우리의 즉각적 경향은 종종 이기적 안락함이나 편리함,

게으름에 대한 욕구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유명한 문장이 있다.

"가장 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어려운 것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불쾌한 것에 끊임없이 적응하기를....." (가르멜의 산길 1권 13장)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 말을 한 문맥에서는 그가 한 말이 옳다.

그러나 그의 격언을 잘못 해석하거나, 일정한 상황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언제나 가장 힘든 것이라는

원칙을 하느님 뜻을 식별하기 위한 체계적 법칙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한다면 과장된 금욕주의적 의지중심주의로 빠지게 되어

성령의 자유로움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가장 힘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생각은

우리를 낙담케 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악마가 불어넣는 전형적 생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리도록

초대하시는 요구가 많은 아버지이신 게 사실이지만, 잔인한 분은 아니다.

 

흔히 그분은 우리를 자유롭게 놓아두신다.

그분이 무언가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는 우리가 사랑에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다. 유일한 계명은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으로 고통을 겪을 수도 있지만

사랑에 의해 기쁨과 휴식을 얻기도 한다.

하느님의 인도를 따르는 삶을 무언가 숨막히는 것,

가장 정당한 우리의 바람을 포함한 모든 소망에 끊임없이

반대되는 것처럼 제시하는 것은 우리 상상이나 악마가 내미는 함정이다.

 

하느님의 목적은 우리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하는 데 있다.

하느님께 유순할 때 우리 마음은 해방되고 넓어진다.

이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하느님 뜻을 행하는 것이 때로(특히 처음 순간에는) 힘들지만

그것을 사랑으로 완수 할 때 우리는 기쁨으로 가득 차며,

하느님께서 영감을 주시는 선을 완수하는 데는 참된 기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께 온순할수록 하느님 뜻에 동의하기가 더 쉽고

자연스러워지며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제가 이것을 좋아합니다."(시편 119,35)

 

 

 

삶이 시련의 연속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길 위에서 늘 슬프고

불행하다면 우리가 좋은 길에 있는지, 혹시 하느님께서 바라시지 않는 짐을

스스로 부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소명을 식별하는 기준은 그 길에서 행복한가이다.

세심증에 걸려 있거나 거짓 금욕주의자들이 그러하듯

하느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을

바라시는 게 틀림없다고 상상하는 것은 판단을 매우 그르칠 수 있으며

악마는 이를 이용해 우리를 속일 수 있으므로 이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 좋다.

 

한 가지 일화를 이야기하겠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한테 이따금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매우 피곤하게 하루를 지내고 마침내 포근한 침대에 들게 됨을 만족해하며

저녁에 잠자리에 들려 할 때 마음속에서 이런 속삭임을 들을 때가 있다.

'경당에 와서 나와 함께 좀 지내지 않겠니?' 그러면 한순간 갈등과 저항이 생긴다.

'예수님, 너무하세요. 저는 지금 피곤해요.

수면시간이 부족하면 내일 아침 기분이 나쁠 거고요!'

그러나 결국 그분의 초대에 동의하고 예수님과 얼마 동안 함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면 평화롭고 만족한 기분으로 잠이 들 뿐만 아니라,

다음 날 보통 때보다 더 피곤한 상태로 잠이 깨는 것도 아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것은 정말 당신 뜻이었군요. 그 열매가 여기 있으니끼요.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나를 사로잡는 큰 문제가 있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문제를 행결하기 위해 오늘 저녁 경당에 가서 한 시간 동안 기도해야겠다.

그러나 경당으로 가는데 마음 깊이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나를 신뢰하면서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 나는 더 좋다.

네 문제를 내가 돌보마." 그러면 나는 '쓸모없는 종'이라는

복된 조건을 떠올리며 평화롭게 잠자리에 든다.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긴 채....

 

내가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은

사랑이 많은 곳에 있지 고통이 많은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불안해하면서 스스로에게 짐을 지우는 것보다

신뢰하며 쉬는 데 더 많은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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