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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동정

수성구 2022. 5. 25. 01:01

5월 25일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동정

축일:5월25일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동정

St. MADELINE SOPHIE BARAT

Saint Magdalena Sophia Barat

Santa Maddalena Sofia Barat Vergine

St. Madeleine Sophie Barat

Born:12 December 1779 at Joigny, France

Died:25 May 1865 at Paris, France of natural causes

Beatified:May 1908

Canonized:24 May 1925 by Pope Pius XI

 

 

마들렌 소피이 바라

 

소피이 바라는 1779년 12월 12일 프랑스 브르고뉴 지방의 주앙니 마을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바라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교양을 지닌 어머니와 마들의 중학교 교사였던 오빠에게서

엄격하고도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

소피이는 소녀 시절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수 성심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또한 16세부터 파리에서 젊은 여성들과 함께 사제가 된 오빠에게서 신앙교육과 인문교육을 받았으며

급변하는 사회 상황에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필요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1800년 11월 21일 파리에서 세 명의 동료와 더불어 첫 서원을 하며 비로소 성심 수녀회가 탄생되었다.

1801년에는 청소년 교육을 통해 성심의 사랑을 알리고자 아미엥에 첫 성심학교를 열었다.

혁명기의 여파로 인한 혼란이 수녀회를 끊임없이 위협했으나

한결 같은 확신으로 교육철학을 확립하고 시대에 맞추어 교육방법을 새롭게 변혁시켜 나갔다.

바라 수녀는 1865년 5월 25일 파리에서 85세의 아름다운 삶을 마치셨다.

이후 1908년 5월 24일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4일에 시성되었으며

현재 유해는 브뤼셀의 성심 수녀원에 모셔져 있다.  

 

 

마들렌 소피이 바라의 정신

 

남긴 말씀 "만일 내가 또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나는 오로지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서만 살아가겠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이 세상 끝까지 가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교육가 특히 여성 교육을 통하여 혁명 후의 불안한 사회를 신앙으로 재건하려는 열정은

프랑스와 유럽 전역을 65년 간 횡단하며 84개 기숙학교와 74개 무상학교를 설립케 했던 원천이었다.  

 

문필가의 풍요한 정서와 인문적 자질로 견고한 신앙과 따스한 우정을 전하는

14,000여 통의 편지는 가족, 학생, 졸업생 그리고 회원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성심 회원들은 예수 성심과 하나되어 그 뜻에 맞게 살며 사랑과 봉사로써 예수 성심의 사랑을 널리 펴는 봉헌의 삶을 살아간다

 

성심 수녀회는 국제 공동체로서 전 세계 43개국, 3,600여명의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영성을 배우고, 심화시키며, 청소년들,

이민자들, 제3세계의 여성들과 불의한 세상에서 예수 성심의 사랑이 발견되고 드러나기를 갈망한다.

우리 각자가 어느 곳에 있던지 우리는 예수 성심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로서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예수마음 배움터 www.jesumaum.org  

 

예수마음 배움터는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피정의 집입니다.

성심수녀회는 창립 초기부터 피정 지도를 주요 사도직의 하나로 여겨왔습니다.

이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 관구는 그 본부가 있는 원효로에서

자그마한 규모로 ’예수 마음 기도의 집’을 운영해 오던 중에 현대인의 마음 속에 점점 더 커가는

하느님에 대한 갈증 곧 강한 영적 목마름의 소리를 들으며 그에 대한 응답으로

1999년 1월 14일에 현재의 예수마음배움터를 시작하였습니다.  

(성심수녀회홈에서)

 

 

 

막달레나 소피아는 통 제조업자인 자끔 바라의 딸로서 1779년 12월 12일,

프랑스 부르군디의 죠와니에서 태어났다.그녀는 큰 오빠 루이에의하여 교육을 받았는데,

루이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고, 동생에게 항상 염격한 규율과 벌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여성 교육에 임할 여자수도회 창설을 계획하여, 예수회의 일부로 창설하려던 바랭신부는

루이의 추천에 따라 소피아 바라와 3명의 동료를 1800년에 수도생활로 받아들임으로써,

예수 성심 수녀회의 창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다음 해에 아미앙에서 그들의 첫 수도원과 학교를 세웠고,

1802년에 막달레나는 비록 이 회원 중에 가장 나이 어렸지만(당시 23세) 장상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63년 동안 수녀회를 지도하였다.

수녀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04년에는 그레노블의 방문 수녀회공동체를 흡수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1818년 미국에 수녀회를 이식하였던 복녀 필립핀느 뒤센느도 끼어 있었다.

이 수녀회는 1826년, 교황 레오 12세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1830년에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프와티에의 수련원이 폐쇄당하였으므로,

막달레나는 스위스에 새로운 수련소를 세웠다.

1865년 5월 21일 당시 그녀가 파리에서 1925년 5월 25일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가톨릭에는 여자 수도원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도 성심 수녀원은 크고 유명한 수녀원이다.

이 수녀원이 경영하는 여성 교육 기관은 거의 세계 각국에 걸쳐 설립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도 서울 용산에 그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렇기에 그 회의 창립자인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성녀의 정신이야말고 그 수녀원 영성의 원동력을 이루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통 제조업자인 자끄 바라의 딸로서 1779년 12월 12일, 프랑스 부르군디의 죠아니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그렇게 높은 신분은 아니었으나 두분 모두 신심이 깊었고, 딸도 경건히 교육시키며 양육했다.

 

막달레나가 첫영성체를 한 것은 겨우 10세때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었다.

그에게는 루이라는 나이가 열 한 살이나 위인 오빠가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사제를 지망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여동생의 교육을 담당하겠다고 부모님께 말하였다.

양친도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으므로 루이는 수업을 흥미있고 한층 더 효과를 내기 위해

여동생의 친구 두 사람도 같이 가르치기로 하고 먼저 시간표를 작성했는데,

그 중에는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뿐 아니라,

고등 학문인 문학, 역사, 지리, 수학, 박물등에서부터 라틴어, 그리스어 등 어학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루이는 전에 이러한 것을 배운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종교나 신심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 과목에 대해서는 다른 과목보다 더욱 힘을 썻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마침 혁명이 이루어진 시대로서 종교에 대해 배울 기회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오빠 루이는 세심한 주의를 다해 동생을 교육하였다.

그런데 양친은 - 때로는 배우고 있는 막달레나 자신도-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처럼 많은 학과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의심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였다.

즉 주님께서는 장차 그녀를 상류 계급의 젊은 겨성의 교육에 봉사하는 수녀회의 창립자로 만들기 위함이었으므로, 지도자, 교육자로서 손색이 없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 모든 방면의 지식을 받도록 한 것이었다.

 

 

소피아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결심을 한 것은 그보다 더 이전부터였다.

그러나 당시의 세상 사태로는 그 결심이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서서히 시기를 기다리기로 했으나

그러는 동안 전에 알지 못했던 근심과 비애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오빠인 루이가 다른 많은 사제들과 같이 혁명군의 손에 체포되어 무서운 박해를 받아 살해될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질수가 있었다.

소피아의 기도는 자비하신 예수의 성심에서 획득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후에 나폴레옹이 천하를 장악하자 다시 백성은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그 때 사제로서 파리에서 활약하고 있던 막달레나의 오빠는 그녀에게도 파리로 올 것을 권했다.

양친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드디어 이를 승낙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오빠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오빠인 루이도 전부터 수도 생황을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동료인 바렌 신부에게 이런 자신의 심중을 드러내는 기회에

여동생이 수녀가 되려는 것까지도 말했다.

바렌 신부는 친구 루이의 말을 듣고 예전에 가장 친했던 데 트리네리 신부를 연상했다.

이 신부는 성인처럼 덕이 높은 분이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예수 성심께 각별한 신심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진력할 수 있는

수녀원의 창립을 계획했으나 애석하게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바렌 신부는 루이의 동생이야말로 친구의 계획을 실현하는 사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여성이 아닌가 생각하고 하루는 그녀를 만나 이를 권고해 보았다.

처음에는 소피아도 주저했지만, 마침내 하느님의 뜻이란 것을 깨닫고 그러한 수녀원의 창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소피아의 이런 결심을 듣고 전에 같이 공부한 다른 두 친구와

온순하고 선량한 마음을 가진 소녀도 그녀와 함께 했다.

바렌 신부는 그들 네 명을 위해 우선 일과를 정해 주었다.

그해 즉 1800년 11월 21일, 바렌 신부가 봉헌하는 미사에 네명의 젊은 여성은 경건하게 참여했는데,

거양 성체가 끝나가 그들은 자진해서 몸과 마음을 하느님이신 예수 성심께 바치는 기도를 소리 높이 외쳤다.

이 날의 선서가 성심 수녀원의 시초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 작은 수녀원은 비로소 처음으로 작은 초등 학교의 부속 기숙사를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영을 위해 물론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이지만

또한 최초의 수녀원도 설립하고 묵상을 하며 활동 준비를 했다.

선서 기념일이 오면 그들은 서원을 새로이 발했다.

수녀원은 예수성심의 풍부한 강복을 받고 지원자들도 입회하여 점차 커졌으며

성심의 정신을 그 수녀원의 영성으로 삼았다.

그 정신이라 함은 겸손, 타인에 대한 사랑, 희생심, 청빈, 인내, 순명 등의 여러 덕행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수녀회의 발전은 정지할 줄을 모르며 계속 새로운 학교를 세워 나갔다. 본격적인 규율도 차차 완성되었다.

막달레나 소피아는 23세로서 총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의 62년간 그 직책에 있으면서 충실히 임무를 완수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녀원은 계속 발전했으나, 자신은 끊임없는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래 그녀는 건강한 몸이었으나 잦은 여행과 피로함, 게다가 가끔 중병에 걸려 점점 건강을 잃었기 때문이다.

실제 생명이 위험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늘 그녀를 죽음의 위험에서 구해주셨다.

 

고통은 그녀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에도 도래했다.

자신에 대한 자매들의 비방과 모함 등을 포함한 모든 시련은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일체를 인내했다.

다만 한 번이라도 수녀원의 행복이나 사람들의 영혼 구원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분연히 일어나 조금도 양보하는 바가 없었다.

 

막달레나 소피아가 총장으로서 불요 불굴의 활동을 한 것은 그녀의 인간에 대한 타오르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교육가로서의 모범이었다.

수녀회의 교육 사업에 관해 그녀가 내리는 현명한 지도는 점차 그녀의 진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통솔 하에 수녀회는 작은 겨자씨로부터 높이 올려다 볼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성장했다.

 

공을 많이 세운 소피아는 1865년 5월 25일, 85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으로써 그녀에게 영광을 주셨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녀는 1908년 5월 24일 복자위에, 그리고 1925년 같은 날에 성인 품에 오르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기백

 

150여 년 전만 해도 프랑스 역시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어려웠다.

프랑스 혁명기와 공포 정치 시대의 혼란한 시절을 살았던 성녀 마들렌 소피 바라는

그런 불평등한 사회적 관습과 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성심 수녀회를 세운 그는 일생 동안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여성들이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프랑스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많은 학교를 세웠으며,

말년에는 동료 수녀들이 12개 나라에 학교를 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여성이라고 해서 세상에 중립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여성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싸움에서도 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성녀 마들렌 소피 바라의 여성관은 19세기보다는 오늘날에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시대적 장애물들을 과감하게 제거하려 노력하였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거나 혹은 여태까지 계속되어 온 관습이나 방식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성녀 마들렌 소피 바라를 기억해 보자.

 

강인함과 용기는 자기 연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단과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묵인하는 일은 없는가? 하느님은 계속 전진하는 자와 함께 걸으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예수마음 호칭 기도문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마음이여,

당신의 흠숭하심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불타는 사랑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지극하신 열성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보속하심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감사드리심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변함없는 신뢰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간절하신 기도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침묵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겸손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순명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온유하심과 평화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만민을 위한 애덕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깊으신 수렴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죄인의 회개를 위한 강렬하신 소망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천상 성부와의 밀접하신 일치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지향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소망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당신의 의지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

 

예수 마음의 사랑이여, 제 마음을 불사르소서.

예수 마음의 애덕이여, 제 마음에 충만하소서.

예수 마음의 힘이여, 제 마음을 지탱해 주소서.

예수 마음의 자비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예수 마음의 인내여, 제 마음에 지치지 마소서.

예수 마음의 왕국이여, 제 마음에 이룩되소서.

예수 마음의 지혜여, 제 마음을 가르치소서.

예수 마음의 열성이여, 제 마음을 불태우소서.

예수 마음의 의지여, 제 마음을 다스리소서.  

 

흠숭하올 성 삼위여,

당신의 자녀 성녀 마들렌 소피이에게 허락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 드리오며

삼가 구하오니,

저희들에게도 예수 마음과 온전히 하나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아멘.

 

이 기도문은 성심수녀회 초창기에 도움을 주셨던 바랭 신부님이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에게 전해 주신 것입니다.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이 기도문을 아주 좋아했고,

성심수녀회는 오랜 전통 안에서 매월 첫 금요일에 이 기도를 바쳤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이 기도문으로 9일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대축일이며 성체 성혈 대축일 주간의 금요일에 지켜집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은 중세기에 와서 상당히 일반화되어 성 요한 에우데스는

예수 성심 신심과 그 축일 제정의 신학적이고 전례적인 기초를 확립하기에 이르렸습니다.

또한 1673년 12월 27일, 프랑스 방문회 수녀였던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예수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 공경과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이후 1856년 교황 비오 9세는 전세계 교회에서

예수 성심을 공경할 것을 지시하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는 이축일의 전례상의 등급을 높이고 온세계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였습니다.

또한 1928년 교황 비오 11세는 이축일을 8부 축일(이것은 1960년에 폐지됨)로하고 회칙’극히 자비로운 구원자’를 통하여 예수 성심 축일을 위한 기도문과 취지를 규정하고 세계를 예수성심께 봉헌하는 예절을

매년 그리스도 왕 축일에 경신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한편 축일 제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1956년 비오 12세는

예수 성심 공경에 관한 회칙을 발표하여 예수 성심 공경을 더욱 구체화하였습니다

1969년 이래로 대축일로 지켜지고 있는데 그 날짜가 성체 성혈 대축일 주간 금요일로 지정된 것은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99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이날을 사제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완덕에로 나아가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경탄하올 어머니.MATER ADMIRABILIS

 

 

성화의 유래

이 성화는 현재 로마의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에

높이 솟아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dei-Monti) 수녀원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수도원은 15C 역대 프랑스 왕의 관대한 원조를 받아

작은 형제회의 창설자이신 성 바오로의 프란치스코에 의하여 세워졌다.

그 후 1828년 교황 레오 12세의 의향에 따라서 성심수녀회에 기부되어,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dei-Monti)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빛내는 청소년 교육의 중심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버팀이 되는 마리아의 聖所가 되었다.

 

1844년 성심수녀회의 청원자였던 젊은 폴린 페르드로는 당시의 원장이셨던 꼬리오리 수녀에게

수녀원을 향하는 2층 복도의 벽에 성모님을 그리고 싶다고 청하였다.

폴린은 프레스코의 특수 기술도 모르면서 온 힘을 다하여 일을 시작하였다.

경험이 없던 이 젊은이가 성모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동안

벽면이 13시간 동안이나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폴린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성모의 보호를 게을리 하지 않고

구한 바에 대한 특별한 도움을 나타내는 ’작은 기적’이었다고 여겼다.  

 

그 해 7월 1일 그림은 일단 끝났으나, 프레스코의 색채가 예상보다 너무 선명하여 커텐 뒤에 숨겨 두어야만 했다.

그 결과 프레스코는 서로 작용하여 현재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 그림은 1846년 10월 20일까지 「백합의 성모」로 불리우며 사랑을 받았었다.

 

1846년 10월 20일, 교황 비오9세께서 수녀원을 방문하시어 이 그림을 보시고

"이 분이야말로 「가장 경탄하올 어머니」이다." 라고

칭찬하신 이래로 이 그림은 「경탄하올 어머니」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부터는 이 성모님의 전구로 많은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말을 못하던 성모성심회의 부랑뺑 신부는

이 성모님께 9일 기도를 바친 후에 잃어 버렸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후, 교황 비오 9세는 이 성화 앞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다음 해 10월 20일은 「경탄하올 어머니」의 축일로 제정해 주셨다.

그 후 많은 순례자들이 이 성화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심수녀회의 창립자이신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와 성 요한 보스코, 성녀 소화 데레사,

성 비오 10세, 복자 빨로띠 같은 분이 대표적이시다.

 

성화에 담긴 뜻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성심학교에는 「경탄하올 어머니」의 성화가 모셔져 있다.

그 이유는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께서 이 성화의 젊은 성모님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화 「경탄하올 어머니」가 몸으로 나타내는 큰 은혜는 내적 생활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손을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놓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조용히 생각하는 모습 전체가 이를 말해 준다.

마리아 곁에 있으면 주위의 번잡함도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은 조용히 하느님 안에 쉴 수 있게 된다.

 

내적 생활과 함께 「경탄하올 어머니」가 가르치는 또 하나의 은혜는

마리아 옆에 세워 놓은 실꽃과 발치에 놓인 바구니가 상징하는 일이다.

그 바구니 위에는 일고 있던 성서가 놓여 있다. 즉, 마리아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학문과 일도 동시에 사랑했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일한다는 기본적 태도를 우리도 배우고 싶다.

마지막으로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꽃과 정의의 태양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는 샛별에도 마음을 두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