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5월 12일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성녀 도미틸라 순교자

수성구 2022. 5. 12. 03:34

5월 12일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성녀 도미틸라 순교자

St Domitilla with Sts Nereus and Achilleus-POMARANCIO

c. 1598-99 Oil on canvas, 275 x 170 cm Chiesa dei Santi Nereo e Achilleo, Rome

 

축일:5월12일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순교자

St. NEREUS and St. Achilleus

San Nereo Martire e Sant’ Achilleo Martire

Died:beheaded. sec. III

Canonized:Pre-Congregation

Nereo = gran nuotatore, da Nereo, dio marino greco = great swimmer, from Nereo, Greek marine GodAchille = bruno, scuro, dal greco = tawny, dark, from the Greek

 

 

이 순교자들은 직업 군인이었으나, 신앙에 귀의한 후 군대 생활을 떠났다.

이 때문에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가 치세하던 무렵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들의 무덤은 비아 아르데아티나에 보존되어 있고 거기에 기념 대성당이 세워졌다.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또는 아킬레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순교자로서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다.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원래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가 4세기 말에 쓴 그들의 무덤 묘비에 따르면, 그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손녀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5월 12일)를 죽이라고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받아 도리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이를 '신앙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로마에서 폰자(Ponza)라는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세 사람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테라치나(Terracina)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그들의 추방 자체가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고 하였다. 이 섬으로 유배된 후에 성녀 도미틸라는 화형에,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의 묘에 안치되었다. 그들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공경되어 그 이름이 5세기 로마의 축일표에 기재되었고,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는 그들의 축일 미사 전례문이 수록되어 있다. 398년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는 그들을 기념하여 성녀 도미틸라의 묘에 성당을 세웠고, 이 성당에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대교황은 재임시 그들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강론을 하였다. “이 성인들은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발 아래 놓았습니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는 그들을 기념하여 새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형제, 성녀 도미틸라 동정, 성 판크라시오 동료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98-100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 '네레오와 아킬레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5년, 1348쪽.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네레오와 성아킬레오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13-114쪽. 
(가톨릭홈에서)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Ps 61,4: CCL 39,773-775)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을 지니신 한 사람이십니다.

그 분은 몸의 구원자이시고 또 몸의 지체이시기에 하나의 육신안에, 하나의 목소리 안에,

하나의 고난 안에 둘이시고 이 죄스러운 세상이 다 사라져 버릴 때 하나의 안식 안에 둘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와 몸으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머리로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홀로 받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분의 지체 중 하나인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여러분이 누구이든 간에,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건 지금 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그리스도의 지체라면 틀림없이 듣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이들에게서 당하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고난입니다.

 

그 때문에 그 고난을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고난으로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고 흘러 넘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머리로서 고난당하셨고 또 이제

당신 지체인 우리 자신 안에서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전체 고난에 기여하여야 하는 만큼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역량에 따라, 그리고 어떤 일정한 고난의 규범에 따라서

일종의 공동 복지에 우리가 기여해야 할 바를 기여합니다.

모든 고난은 이 세상이 끝날 때라야만 다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악인으로부터 박해받은 의로운 사람들과 심지어 주의 오심을 미리 전하려고

주님에 앞서 온 이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도읍에 속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온 도읍은 의인 아벨의 피에서부터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말해 주고 있고,

그 후 같은 한 도읍은 요한의 피에서 시작하여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피와 또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피를 통하여 말해 줍니다.

(가톨릭홈에서)

 

 

교황 성 다마소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의 순교자들은 크리스챤이 된 로마 군인이었으며,

더 이상의 군복무를 거절하여, 비아 아르데아띠나의 도미띨라 묘지에 안장되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은 플라비아 도미띨라의 종들이었는데,

그들의 종교 때문에 그녀와 함께 귀양가서 사형되었다고 한다.

 

이 두 성인에 대한 신심은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로마 군대의 치안을 맡은 군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테라치나 섬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순교했다.

그들의 시신은 후에 도미틸라 묘지라고 알려진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896년, 데 로시의 발굴에 의해 390년에 시리치우스 교황이 건축한 지하 교회에서

그들의 빈 무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죽은 지 200년 후에 교황 대그레고리오는 그들의 축일에 즈음하여 28번째 설교를 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존경하고 있는 이 성인들은 세상을 경시하고 평화와 부와 건강이 세상의 매력을 줄 때에

그 세상을 발 아래 내던졌습니다."

 

많은 초기 순교자들의 경우처럼 사건 자체가 역사의 안개속에 가려져 있음에도

교회는 그 기억을 고수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들이 고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세계-무력과 물질주의,

잔인하고 비판적인 세계-에 살고 있었지만 살아 계신 분의 현존에 의하여 내부로부터 변화되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용기는 우리보다 앞서

신앙의 표적과 그리스도의 상처로 흔적을 남기고 간 남녀 영웅들에 의해서 활기를 되찾는다.

 

다마소 1세 교황은 4세기에 그들을 위한 비문을 썼다.

그 비문은, 비석이 아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때 그것을 읽은 여행자들에 의해 알려져 있었지만

후에 데 로시가 발견한 파편들로도 그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네레오와 아킬레오 순교자들은 군인의 신분으로서 폭군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잔인한 직무를 실천하며

언제나 공포에 떨며 푹군의 명령에 따를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오, 신앙의 기적이여! 갑자기 그들은 그들의 미친 짓을 그만두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들의 사악한 지휘관의 진영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들은 그들의 방패와 갑옷 그리고 피에 물든 창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면서 기꺼이 신앙이 승리한 것을 증거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마소 1세 교황의 기록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도미띨라 순교자

St. Domitilla

St. Flavia Domitilla

 

플라비아 도미띨라는 로마 원로원 플라비우스 글레멘스의 아내이자 도미씨안 황제 여동생의 딸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그녀의 남편이 96년에 순교한 후에 티레니아해의 판다타니아 섬으로 유배되었다.

우상에게 제물 바치기를 끝내 거절하므로 화형에 처해졌다고도 한다.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황제 티투스(Titus)와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의 질녀이다. 성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는 95년 로마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 6월 22일)의 부인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질녀인 도미틸라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고 가예타(Gaeta) 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판다타리아(Pandataria) 섬으로 추방했다. 이교도 역사학자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는 도미틸라가 로마 제국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은 무신론자 또는 신성 모독자라는 죄명으로 고발당하여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둘째 이야기에 의하면, 역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성녀 도미틸라가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질녀라고 전한다. 평생 동정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신자임이 발각되어 판다타리아 섬에서 북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진 폰티아(Pontia) 섬으로 추방되었다. 도미틸라를 죽이라고 파견된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는 오히려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을 받아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고 도미틸라와 함께 추방되었다. 이후 도미틸라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말처럼 순교와 마찬가지의 긴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마침내 테라치나(Terracina)에서 도미틸라는 화형에,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아 함께 순교하였다. 이 때 그녀의 수양자매인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와 테오도라(Theodora)도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녀 도미틸라와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의 유해는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의 묘에 안치되었고, 398년 성 시리키우스(Siricius) 교황은 그들을 기념하여 이곳에 성당을 세웠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는 새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되었다. 수많은 초기 순교자들처럼 도미틸라 성녀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실들이 전해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긴 교회 전통 속에서 성녀 도미틸라는 황제의 질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목숨으로 신앙을 지켰음을 전해 주고 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형제, 성녀 도미틸라 동정, 성 판크라시오 동료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98-100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도미틸라, 플라비아',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1777-1778쪽. 
(가톨릭홈에서)

 

 

St. Gregory, St. Maurus, St. Papianus and St. Domitilla-Peter Paul Rubens.   

1606. Oil on canvas. Gemaldegalerie, Berlin, Germany.

 

성 네레오와 아킬레오 형제,성녀 도미틸라,성 판크라시오 동료순교자

Sts. Nereus and Achilleus, Domitilla and Pancratius

 

교회내에서는 네 명의 성스러운 순교자를 함께 기념한다.

그들의 천국에 개선한 날짜는 동일하지 않지만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네레오 및 아킬레오 두 형제는 1세기 중엽 로마 군대에 들어가 시내 경비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명령으로 마음에도 없는 참혹한 형벌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도 종종 있었으므로

이에 싫증을 느껴 군대를 떠나 황제의 근친 프랄비아 가문의 공주 도미틸라의 시종관이 되었다.

그리고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성 베드로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도미틸라는 네레오 형제의 한결같은 부지런한 봉사에 감탄하여 살펴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이처럼 훌륭한 행위로 이끄는 종교가 그리워져,

그 형제들에게 자기도 신앙에 들어가리라는 뜻을 나타냈다.

형제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주인의 말에 기뻐하며 그 즉시 공주를 교황에게 모시고 가서

교리를 연구하게 하고 세례까지 받게 했다.

 

도미틸라 공주는 예전에 아우렐리아노라는 귀족 청년과 약혼을 맺었는데 그는 이교도였다.

그리하여 네레오와 아킬레오 형제는 결혼을 하면 혹시 공주의 구원 사정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하고

매우 염려하여 성의껏 공주에게 충고하자

공주도 그 위험을 깨닫고 아우렐리아노와의 혼인을 파기하고 평생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고

클레멘스 교황으로부터 동정 서원의 뜻인 머리수건을 받았다.

 

자기 가족중에서, 또 로마의 명예로운 군인 중에서 금지된 그리스도교를 봉행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황제 도미시아노의 놀람은 어땠을까?

도미시아노 황제는 즉시 도미틸라와 네레오 형제를 부러들여 배교하기를 명했으나

신앙이 견고한 그들이 듣지않자 황제는 그들을 본시아라는 섬으로 귀양 보냈다.

갖은 영화 속에서 아무 불편 없이 도회지 생활에 익숙했던 도미틸라에게 있어서 이 유배는

얼마나 적적하고 고독했는지!

그러나 그녀는 일체의 모든 불편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하여 잘 참아나갔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점차 더 심해갔다.

보신아 섬에는 미누디오 루포라는 사말이 와서 신자들을 압작하기 시작했으나

도미틸라와 네레오 형제 세 사람은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네레오 형제는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며 마침내 테라치나라는 섬으로 다시 귀양가게 되어 그곳에서 순교했다.

 

도미틸라 공주에 대해서는 약혼자 아우렐리아노가 다시 설득해 보기 위해

레오도라와 에우프로시나라는 두 부인을 로마로부터 보내

온갖 감언 이설로 유혹을 했으나 역시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주 편에서 그들 두 부인을 신자로 개종시켰기에

루포는 그들 세사람을 테라치나에 보내어 그곳에서 한 집에 몰아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도미틸라 및 네레오 형제의 유골은 후에 로마에 옮겨져 프라비아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어

교회 신자들의 존경을 많이 받게 되었다.

 

성 판크라시오는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시대에 청형되어 순교한 소년이다.

그는 교회에서 옛날부터 특별히 존경을 받아왔고,

로마에는 지금도 그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어 추기경좌의 높은 격식(格式)이 마련되어 있다.

 

판크라시오는 소아시아의 피리지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된 후 백부 디오니시오와 함께 로마에 가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학자의 소개로

마르첼리노 교황을 알현하고 교회의 진리를 깨달아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어, 겨우 14세 때에

꽃이라면 봉오리와 같은 홍안의 미소년으로서 용감히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명했다.

그는 칼레포디우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희생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는 로마의 군인이었다.

그들은 직업상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해야만 했는데,

그 일을 하는 동안 하느님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네레오와 아킬레오의 개종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결국 테라치나라는 섬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는 자신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경우 당하게 될 위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위험과 맞부딪힐 때는 하느님이 함께해 주시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정한 희생이 없으면 영원한 상급도 없으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때는 아니다.

대신 우리는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을 죽이고 우리가 소유한 물질에 대한 그릇된 애착을 버림으로써

하느님의 모상이 되어 가도록 소명을 받았다.

우리도 성 네레오와 성 아킬레오처럼 마음과 삶을 오롯이 하느님께 드리고 그분을 완전히 신뢰한다면

원래 우리 것이 아닌 것들을, 우리의 생명까지도 봉헌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희생은 무엇인가?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어떤 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