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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목요일] 파스카 신비, 재앙이 지나가는 표지

수성구 2022. 4. 14. 04:55

[성목요일] 파스카 신비, 재앙이 지나가는 표지

파스카 신비, 재앙이 지나가는 표지

탈출 12,1-14; 1코린 11,23-26; 요한 13,1-15

2022.4.14.; 성목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하는 성목요일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행하신 이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유산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미사에서 들려온 말씀들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정리하고 교회를 준비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탈출기 12장의 첫째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 역사의 뿌리가 되어 온 파스카 사건을 어떻게 기념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당시 세계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에서 무기 하나 없이 이집트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까지 체험하면서 탈출했던 경험이 함께 빠져나온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민족의식을 지닐 수 있게 하는 원천이었습니다. 

 

  이 파스카 사건을 기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오직 하느님의 해방 의지에 기원하고 있음을 거듭거듭 확인했고 그래서 이 파스카 축제는 연중행사 중에 최대의 민족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집트에서의 탈출은 파라오가 강요한 죄악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했고, 시나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해방됨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현실로 들어감을 의미했습니다. 죄악이 초래하는 재앙에서 벗어나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새로운 미래에서 살아갈 자유, 이것이 파스카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의 마지막 해에 맞이하는 파스카 축제를 제자들과 함께 조촐하지만 의미있게 보내고자 하셨습니다. 이 자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최종적으로 부여하시는 기회여서 특별한 절차를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은 그대로이지만, 허리에 띠를 매거나 지팡이를 짚고 서서 먹는 일 대신에 선택하신 특별한 예식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공생활 동안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의 의미를 이 발씻김 행위 하나로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발씻김 행위, 즉 세족례는 섬김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인 당신께서 제자들의 발을 마치 하인처럼 씻겨 주었으니, 제자들끼리는 물론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는 것이요, 함께 역사적인 파스카 과업에 참여할 하느님 백성들에게도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성사적 행위였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런 뜻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절차를 소개하는 것을 다 생략하면서도 이 발씻김의 성사를 거행하신 예수님의 선택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발씻김 예식에 이어 행해졌던 빵 나눔과 포도주 나눔의 예식은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전서 11장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섬김의 생애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운명을 맞이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김의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분은 당신을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새로이 소집된 하느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파스카 과업의 길에서 파스카의 길로 나아가야 할 할 제자들끼리는 서로 섬겨야 한다는 수칙도 정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섬김의 예식으로 그분과 제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계약을 맺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계약은 파스카 과업이 성취될 때까지 영원하리라고 못 박으셨습니다. 사실상 그분이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현실이란 파스카 과업임을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하느님께서 내리신 마지막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표지가 어린 수컷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몸소 당신이 파스카의 희생양이 되셨고, 이는 섬김의 증거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섬김의 교회, 섬김의 공동체, 섬김의 인간관계를 이룩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의 죄악이 자초할 재앙을 피해 지나갈 수 있는 파스카 표지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쇄신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전임 교황들에 이어 추진하고 있는 ‘새 복음화’ 작업의 마무리로 제안된 공동합의성 구조를 이룩하는 교회, 곧 시노달리타스의 성서적 근거입니다. 

 

  현재 시노달리타스, 즉 공동합의성 구조를 이룩하는 교회로 쇄신하기 위해 전 세계 교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의 장에서, 그러니까 가족이 함께 사는 가정, 직업에 종사하는 직장, 사회 활동의 여러 분야들과 사도직 활동 등에서도 빠짐없이 이룩해야 하는 파스카 표지가 바로 섬김의 정신으로 공동합의성 구조입니다. 힘과 이익을 좇아서 움직이는 세상의 질서는 공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재앙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으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분되는 상호 섬김의 삶이야말로 현대 물질문명의 재앙을 예방하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진리로서 파스카 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