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지없이 높으신 분
그지없이 높으신 분
(정서연 마리스텔라 시인. 수필가)
코로나19 바이러스 핑계를 대며 말씀을 멀리한 시간이었다.
미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고. 기도는 적당하게 교회는 멀리.
그렇게 일만 칠천오백이십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오래된 음식에 초파리가 생기듯.
내 몸과 마음은 나태해지며 부패의 알이 부화하더니 이러저리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점점 영적으로 가난해지고 비겁해는 내가 참을수 없는 나날을 보내던중
`성서 40주간 할 거지요`라는 성당 교육 분과장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수님께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를 그동안 깜박 잊고 있었다.
내 목숨 값으로 구한 딸아!
지금 뭐하고 있느냐.
오늘 수난기의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성경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코로나 진단키트의 빨간색 두 줄이 내 발목을 잡았다.
시작부터 격리라니 힘이 빠진다.
그래도 괜찮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십 년을 보내고.
코로나로 이 년의 시간을 나태 지옥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당신 곁으로 돌아왔는데 일주일쯤이야.
아버지 괜찮지요?
일주일 후 성서 40주간이 문을 열었다.
한처음.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 모르는 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과 함께 살아갈 시간의 시작이다.
하느님 동산으로 나를 이끌어주시고. 은총의 숨을 불어넣어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당신의 영에 닿고자 말씀을 새긴다.
당신을 만나는 시간. 비유의 끈을 잡고 천천히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면 그곳에 무지개가 걸려 있으리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시간이 흘러간다.
동산에 머무는 시간이 이렇게 좋은 데 왜 몰랐을까.
이천 년 전 예수님이 군중의 환호속에 수난과 영광의 장소인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군중들은 금송아지에게 마음을 두고
스스로의 완고함과 편견의 잣대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오만을 저질렀다.
우주만물을 주재하시고 섭리하시는 그분을 인간이 인식하는 시공간에 가두어 두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열강 하시는 수녀님의 목소리가 성전에 울린다.
말씀 곁에 앉으면 바빠진 마음. 일렁이는 욕망. 실타래처럼 엮인 온갖 분심들이 조용하게 가라앉는다.
세상 잡음 들리지 않는 거룩한 공간에서 진리에 기대어 머무는 시간이다.
삶의 그물을 벗어난 내 영혼이 자유를 맛보는 은총의 시간이다.
한처음의 새로운 창조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딸아! 너는 내 목숨 값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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