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수성구 2022. 4. 5. 02:00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민수 21,4-9; 요한 8,21-30 / 2022.4.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선을 향한 길에는 언제나 악에서 나온 장애물이 길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죄인들이 방해 공작을 폅니다. 모세는 파라오와 대결하면서 열 가지에 이르는 재앙의 기적으로 물리치고 겨우 이집트를 빠져 나왔지만, 정작 해방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파라오 대결 못지않은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바로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불평하는 백성에다가 금송아지까지 만들어 경배하는 우상숭배 풍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옭아매어 죄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피곤한 논쟁에 휘말리셨습니다.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고 당신의 신원을 밝히셔도 막무가내로 당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속물들이요 사탄의 사주를 받은 듯한 죄인들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는 백성의 불평과 우상숭배에 대한 대책이 중재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직접 상대하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 대해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시어 물려 죽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또 다시 모세에게 몰려와 하느님께 불뱀을 치워 달라고 중재 기도를 요청했고,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세우라는 응답을 들었습니다. 구리는 붉은 색을 띠는 금속이어서 불뱀과 색깔이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처방이 그 천 년도 훨씬 지난 후 예수님 당시에는 십자가 처방의 예형이 되었습니다.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피곤한 유혹과 막무가내식 논쟁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은 그들의 기대와 음모에 휘말려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현실적인 권력과 영향력은 그들에게 있었기에 예수님은 기어코 그들의 음모에 따라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의 혐의를 뒤집어쓰시게 되었고, 곧 이어 유다인들의 왕이 되려 했다는 반역 혐의까지 뒤집어쓰시고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과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리셨고 죽음을 당하신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도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높이 달리신 이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이 자신들의 음모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신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방, 즉 십자가를 받아들이시는 믿음은 사탄의 사주를 받는 줄도 모르고 죄를 저지르는 그들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예수님의 이 처방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믿는 이들에게서 효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깨달은 이 처방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자기비허의 삶이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다는 십자가의 신비였습니다. 또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야말로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나는 부활의 신비라는 것도 동시에 얻게 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 시대에 구리 뱀이 불뱀에게 물린 상처를 낫게 해 주었듯이, 십자가를 쳐다보는 신약 시대의 처방이 예수님의 신성을 몰라 보고 죄를 저지르는 죄악의 벌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이렇게 되면 악은 더 이상 선의 방해물이 아니라 디딤돌로 작용합니다. 마치 십자가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되듯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