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4월 1일 그레노블의 성 후고 주교

수성구 2022. 4. 1. 04:03

4월 1일 그레노블의 성 후고 주교

축일:4월1일

그레노블의 성 후고 주교

St. HUGH OF GRENOBLE

Sant’ Ugo di Grenoble Vescovo

Born:1053 at Dauphine

Died:1132 of natural causes

Canonized:1134

Ugo = spirito perspicace, dal tedesco = spirit perspicacityes, from the German

 

 

프랑스의 샤토외프에서 태어난 그는 평신도로서 방랑스의 주교좌에서 활동하다가 주교의 협조자가 되었다.

그는 성직매매를 반대하는 주교의 캠페인에 적극 가담하여 큰 성과를 얻었고,

1080년에 열린 아비뇽 시노드에 참석하고 있던 중에 그레노블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대사로부터 서품되고,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주도면밀한 교구 개혁안을 수립하였는데, 성직매매와 고리 대금업을 철저히 배격하였고,

성직자의 규율과 사제 독신제를 확립하는 한편, 텅빈 교구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그후 그는 세즈-디외 수도원에서 베네딕또 회원이 되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권고로 자기 교구로 돌아갔다. 그는 성 브루노의 제자였기 때문에 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성 브르노의 카르투시오회가 크게 번창하는데 기여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인들의 전기를 보면 경건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이가 대단히 많다.

예외도 있지만 대개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서 말씀 그대로이다.

즉 좋은 양친은 보통 착한 아이를 가지게 된다.

 

성 후고의 양친도 역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용감한 군인이면서 또한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로 82세의 고령에 달했을 때 성 브루노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엄한 규칙을 지키며 선종 준비를 했다.

어머니도 독실한 신자로서 후고를 낳기 전에 하느님께 기이한 묵시를 받았다.

그것은 성 베드로 사도가 사랑스러운 그의 아들을 안고 다른 성인들을 데리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느님의 옥좌에 그를 바치는 것을 뚜렷이 보았다고 한다.

 

이는 이 부부가 자기 자녀를 훌륭히 교육을 해야 된다는 훈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묵시로 인해 자기 아들이 하느님께 특별한 성소를 받으리란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가 사제가 되는데 필요한 온갖 편의를 도모해 주었다.

 

사제가 된 후고는 장상인 주교로부터 커다란 신뢰를 받으며 중요한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유난히도 열심히 덕행의 길을 닦았다.

그는 또한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이 교황은 갖은 악폐와 용감히 싸우며,

특히 자기에게 반대하는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맹렬히 투쟁했다.

후고는 충심으로 교황측을 지지하며 힘이 미치는 데까지 교회의 자유와 선량한 풍습을 위해 진력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뽑혀 27세의 약관으로서 일찍이 1080년에 열린 아비뇽 시노드에 참석하고 있던 중에

그레노블의주교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관할 교구의 신앙 도덕의 상태는 매우 한심한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전력을 다해 풍기의 개선에 노력한 결과 상당히 효과를 보았지만,

그래도 그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점에는 아직도 거리가 멀었었다.

따라서 겸손한 그는 자신의 무능을 탓하고 주교직을 물러나 유명한 클뤼니 수도원에 들어가서

고요한 은수 생활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교황은 그에게 다른 임무를 맡겼다. 그는 순명의 덕을 지키기 위해 이에 순종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이같이 탁월한 겸손과 순명의 덕을 강복해 주셨다.

그때부터 그는 개혁에 성공해 죄인은 회개하고 신자들은 열심해져서 그에게 위로되는 바가 컸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겸손으로 순회 설교를 하며 고해 성사를 주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틈이 있으면 오로지 기도와 고행으로 지냈다.

그는 사람의 중죄를 생각하고서는 종종 기도 중에 눈물까지 흘렸다.

그의 검소한 생활과 겸양, 애덕은 실로 감탄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는 또 빈민을 위해서는 온갖 물건을 아끼지 않았고, 사람들의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희생을 바쳤다.

그리고 단식재를 지키지 않는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스스로 엄한 단식을 실행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창립자 성 브루노가 자기의 관할 교구에 수도원을 세웠을 때에 후고의 기쁨은 비할 바가 없었다.

그는 될 수 있으면 그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주교직에 있는 동안에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마음속으로나마 들어간다는 의미로 종종 그곳을 방문하고 늘 2,3일간 머무르며 기도와 고행에 몰두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는 몸이 쇠약해져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보속하는 마음으로 항상 병고를 인내하며 끊임없이 기도를 바쳤다.

이같이 후고는 주교로서 51년간을 지내고 1132년 80세로 선종했다.

그 후 그의 전구로 인해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가 성인품에 오른 것은 그의 임종후 얼마 안 되어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수줍음

 

당신이 혹시 <백설공주>에 나오는 수줍은 난쟁이와 성격이 비슷하다면

수줍음이 얼마나 큰 시련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보다 좀더 활발하고 외향적인 성격이 되고 싶겠지만

수줍음은 타고난 성격의 한 부분이어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12세기경 그르노블의 주교였던 성 후고는 수줍음과 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몹시 수줍음을 타는 사람이었다.

직책상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남들 앞에 자주 나서야 하는 주교에게 수줍은 성격은

큰 걸림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수줍음을 겸손으로 바꾸었다.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앞세우는 그의 겸손한 모습은

동료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게 했다.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갖고 있던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 후고는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억지로 외향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자신의 수줍음을 겸손함으로 바꾸었고,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게 되었다.

우리도 자신의 독특한 성격을 미덕으로 가꿀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내 자신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내 성격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미덕을 찾아내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 그레고리오 개혁 ◆ 

한자  ~改革  라틴어  reformatio Gregoriana  영어  Gregorian reform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초반에 걸친 교회 내의 대개혁운동을 말한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재위 : 1073~1085)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호칭되는데, 비록 그가 이 운동의 주창자나 완성자는 아니었지만 교회의 자율성 회복을 통해 교황권(敎皇權)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그의 업적의 비중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개혁운동은 카롤링거 왕조와 오토왕조의 범세계적 교회의 이상으로 종교와 통치권이 혼합되고 교회가 세속권에 종속된 상태에 놓여 있었던 암흑기의 부패한 상태로부터 교회를 혁신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대체로 니콜라오(Nicolaus) 2세의 교황 선거법이 공포된 때(1059년)부터 제 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개혁의 성과는 교황 우위권(優位權)의 재확인, 성직자의 생활 쇄신, 교회의 세속권으로부터의 독립 보장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10세기와 11세기 초반에 크게 약화된 교황 우위권은 니콜라오 2세 및 알렉산데르(Alexander) 2세에 의해 그 개혁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 의해 강조된 우위권과 교황의 권위는 수차례의 교회 회의를 통해 인정되어 그의 사절들을 통해 실행에 옮겨졌다.

 

또한 교황 우위권의 안정된 기반 위에서 우르바노(Urbanus) 2세(재위 :1088~1099)는 클뤼니(Cluny) 수도원(1088년 창설)에 특별한 면속특전을 부여하여 수도원 개혁을 통해 수도자들의 생활을 쇄신시켰다. 당시 속인(俗人)의 성직 서임권(敍任權)으로 교회재산의 남용, 성직자의 부패가 조장되었는데, 서임권 논쟁 등을 통한 속권의 교회에 대한 간섭 배제는 주교의 권한 강화, 성직 매매, 성직자의 결혼 및 축첩(蓄妾) 등 중세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점차로 일소할 수 있었다.

 

또한 11세기 중반부터 일련의 교회 회의들을 통해 관철된 교회와 교회토지 및 십일조세에 대한 회복으로 인하여 교권(敎權)의 로마 집중화, 교회 세습권의 확보 등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났으며 교황권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클뤼니수도회 ◆ 
한자  ∼修道會    영어  Order of Cluny  
 

베네딕토회 수족(修族)의 하나로 프랑스의 클뤼니시에서 910년 창설되었다. 창설자는 아퀴타니아의 빌헬름 공작으로, 그는 당시 수도원 침체 요인의 하나였던 주교권의 지나친 간섭을 배제시켜, 클뤼니 수도회를 주교의 관할권에서 독립시켰다. 오도(St. Odo) 대수도원장 이후 가장 중요한 개혁 수도회가 되었다.

  

클뤼니수도회에 의한 개혁을 일반적으로 클뤼니 개혁운동이라고 부른다. 클뤼니 개혁운동은 수도회 내적으로는 엄격한 베네딕토 회칙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수도생활의 엄격한 규제로 나타났고, 수도회 외적으로는 평신도 임직권, 성직 매매, 사제 결혼에 대한 논쟁에서 교황을 도와 교회정신을 견고하게 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이 개혁운동은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 독일, 영국, 스페인 등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12세기에 이르러 2,000여 소속 수도원을 갖는 커다란 수도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3세기부터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여, 그 이후부터는 시토회(Citeaux)에 개혁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 시토회 ◆ 

한자  ∼會    라틴어  Ordo Cisterciensis    영어  Cistercians(O. Cist.)  
 

1908년 프랑스 부르군드지방 시토(Citeaux)에서 성 로베르토(St. Robertus de Molesme, ?~1111)가 설립한 수도원에서 시작된 수도회. 회의 이름은 모원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us de Clairvaux)의 기여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곧 서부유럽으로 확산되어 13세기 중엽에는 680여 개의 소속대수도원들이 있었다.

  

은수적(隱修的)인 수도회의 생활양식으로 교회, 제구(祭具), 제의(祭衣) 등이 매우 소박하며 성 베네딕토의 회칙을 기초로 한 규범을 준수하여 단식, 침묵, 단순노동 등이 매우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1119년 교황 갈리스도(Callistus) 2세에 의해 인가된 ‘사랑의 헌장’(Charta Caritatis)이 회헌이 되었으며 이런 시토의 규정들은 다른 중세수도원들, 특히 의전수도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시토회에 각 국가단위의 구심점들이 형성되자 시토에 있는 수도원은 국외 시토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엄격한 회칙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어 이것은 라 트라프(La Trappe)의 수사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1902년 레오(Leo) 13세 때 트라피스트회는 시토회에서 ‘엄률 시토회’로 분리하여 독립하였고, 이전의 시토회는 ‘성 시토회’로 존속하였다. 1898년 시토 대수도원이 복구되었을 때 엄률을 채택하였으며 로마에 거주하는 시토의 아빠스는 엄률시토회의 총장이 되었다. 현재 11개 수족에 1,318명의 회원이 있다(1983년 교황청연감).
(가톨릭대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