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미움의 불가마 속에서 용서로 살아남기

수성구 2022. 3. 22. 06:47

미움의 불가마 속에서 용서로 살아남기

 

다니 3,25.34-43; 마태 18,21-35

2022.3.22.;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는 아자르야가 하느님께 바친 기도 내용을 전해줍니다. 그는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임금의 눈에 들어 궁정 관리로 봉직하게 된 유다인 젊은이들 중의 하나로서 유다식 이름은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는 임금의 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가마형에 처해지게 되자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리듯 청원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비단 우상숭배를 거절하기 위하여 바빌론 임금의 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자기 변호의 말은 온데 간데 없고, 동족들이 지은 죄를 나열하고 있으며, 그것도 바빌론 유배 당시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그것도 남북에서 모두 지은 죄를 총괄하여 통회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개인의 청원기도가 아니라 동족의 죄를 고백하며 속죄를 청하는 중재기도의 성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기도 내용이 담겨 있는 다니엘 예언서가 유배 이후에 쓰여진 성서임을 감안하면 절규에 가까운 아자르야의 중재기도와 불가마형에서도 살아남았다는 믿기 어려운 결과 등은 유배 당시의 실화를 기록했다기보다는 유배에서 돌아온 동족들에게 다시는 그와 같은 곤경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 절실히 요청되는 민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신앙의 교훈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교훈적 성격은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는 용서라는 주제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먼저 이 주제를 꺼낸 베드로의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아마도 베드로는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고, 그가 질문하면서 스스로 제시한 답변 즉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아마도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고민은 진정성을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흔히 접하게 되는 이 문제에서 자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일곱 번까지 갈 것도 없이 삼세 번에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낼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간에 저질러지는 그 잘못이 중대한 행위일 경우에는 단 한 번의 잘못이라도 그 관계를 파탄낼 수도 있을 만큼 용납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입니다. 

 

  용서의 문제는 행위 이전에 마음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시대와 사회,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누구나 자기의 마음이라는 또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용서의 문제는 마음 다스리기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질문을 잘못했습니다. 행위의 횟수를 여쭈어볼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대해 질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마음 다스리기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 마음 다스리기의 지혜에 있어서는 상호간의 상대적인 잘잘못을 따지는 판단이 중요하지 않고 그보다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정해 놓고 그 위에서 상호간의 관계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임금과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 간에 백 데나리온씩의 빚을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넉 달치의 임금이 백 데나리온이니까 그 빚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해서는 저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 차이가 무려 6천만 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에 저질러지는 잘못을 없던 것으로 하자고 무조건 참으라든가 잘못을 저질러도 좋다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상호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역발상입니다. 우리가 백 데나리온 어치의 빚을 누군가에게 탕감해 주면 그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만 탈렌트 어치의 빚을 탕감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고 말입니다. 

 

  발상하기에 따라서 우리네 마음은 아자르야와 그 동료들이 던져진 불가마일 수도 있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처지로 인하여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형제가 잘못을 저질러서 내 마음이 증오와 미움으로 불타는 불가마가 되었다 해도 이 역발상을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자면 그 불가마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임금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도 그 답변의 결론으로 마음을 거론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래서 미움의 불이 타오르는 그 한가운데 우뚝 서서 우리도 아자르야처럼 우라 자신이 저지른 죄뿐만 아니라 동족이 저지른 죄들까지도 용서해 달라고, 그 속죄 청원의 표시로 서로 간에 더 너그럽고 자비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겠노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단 용서할 줄 아는 사람들로 거듭 날 뿐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 지어내신 하느님을 믿고 섬길 줄 아는 세상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겠노라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불신의 불가마 속에서 빠져나와 믿음의 세상으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