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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푸른 별장

수성구 2022. 1. 30. 05:36

우리들의 푸른 별장

우리들의 푸른 별장

(신용자. 역사문화답사 진행자)

 

새초. 갈따리. 아들메기. 바랭이. 초롱단. 반가지. 끄랑. 물춤.

능쟁이. 달개비....

집 정리를 하다 발견한 엽서에 휘갈겨 쓴 풀이름들.

20여 년 세월의 무게도 단숨에 찢어버리는 매운 풀냄새가 훅 껴쳐왔다.

그 여름. 산골 아이들은 노래하듯 잡초 이름을 불러주고

우리는 그 이름들을 잊을까 봐 손 닿는 대로 엽서에 적어 놓았던 것이다.

그건 내 젊은 날의 타임캡술이었다.

 

 

그때. 친구와 나는 서울 생활을 박차고 경기도 포천 약사리로 떠났고

빈손으로 산밭에 도전했다.

약사계곡 산밭을 개간하며 꼭 필요한 것만으로 사는 삶을

태초의 삶을 살아보려는 도전이었다.

두 처녀의 마음은 쿵쾅쿵쾅 부풀었지만.

막상 거처가 문제였다.

움집은 어떨까. 초가집을 짓는 건 어려울까.

폐차된 버스를 가져갈까...

 

 

우리 깜냥으론 그 어느 것도 엄두가 안 나서 산 밑에 커다란 푸른 천막을 세웠다.

우리는 그곳을 푸른 별장이라고 불렀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자리한 그곳은

우주에 맞닿아 있는 듯했다.

별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여름밤이면 풀벌레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은빛을 터하는 메밀꽃밭의 운치가 기가 막힌 곳이었다.

 

 

천막 안에 귀동냥으로 구들을 놓고 청솔가지며 잡초를 태울 때 나는

자작자작 소리가 영혼을 밝히던 시간이었다.

그 여름. 우리는 잡초에도 모두 이름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그 작은 풀꽃들이 마주나기. 어긋나기 등

정확한 자연계의 질서 아래 움직인다는 오묘함에 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산속에서 산의 일부가 되어 살았던 아름다운 시절.

 

 

긴 산비탈 콩밭 이랑에 앉아 그야말로 땀으로 멱을 감으며 하루종일 콩밭을 맸다.

친구나 나나 농사일이 처음이었다.

천막을 오르내리는 게 번거로와 건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악착같이 콩밭에 들러붙어 무성한 풀과 전쟁을 치렀다.

농사 중 가장 쉬운 게 심고 김만 매주면 되는 콩 농사라는 말에

우리는 첫 작물로 콩을 택했고 가을이 되면

100가마쯤 추수를 할 거라고 들떠 있었다.

그 가을 12가마를 도리깨로 타작하며 허망하기도 했지만...

 

 

아침이면 자가품이 나 손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혹독한 노동의 대가를 치렀지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강해질 수 있다는 긍지에 스물여설 살 처녀들은 벅차 있었다.

 

 

내 힘에 겨운 일에 맨몸으로 부딪치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

눈에 보이는 산자락. 구름 한조각조차 애틋해

아침이면 눈이 번쩍 뜨이던 그 마음이 도시로 돌아온 지금도

내 가슴 깊은 곳에 숨 쉬고 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