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수성구 2021. 12. 23. 02:48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말라 3,1-24; 루카 1,57-66 / 2021.12.23.(목); 이기우 신부

 

대림절은 형식상 메시아를 기다리는 때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메시아 백성이 되고자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은 기준이자 길잡이가 되어준 인물입니다. 

 

독실한 유다인으로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모두 메시아를 오랫 동안 기다려온 아나빔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늙도록 아이가 없어 그저 기도만 열심히 했던 부부인데, 그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를 준비하는 위대한 역할을 수행할 큰 예언자로 점지해 주셨습니다. 그에 대한 작은 징표가 있었으니, 너무도 큰 이 은총에 대해 놀라운 나머지 믿기 어려워 했던 즈카르야를 출산이 임박할 때까지 벙어리가 되게 했다가 천사의 지시대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마자 입이 풀려서 말을 하기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그 탓에 부부 지간에 아기 이름을 놓고 그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는 일에는 신기하게도 의견이 일치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말라키는 일찍이 이 사건을 내다본 바 있었습니다. 그 예언의 골자는 장차 나타날 예언자가 우상을 숭배하던 고약한 풍조를 심판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를 심판의 도구로 삼으시고 행하실 바는 자못 엄중해서 우상 숭배에 물들다 못해 절어버린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문화를 심판하여 파멸에서 구해낼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견디고 버티어 낼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걱정될 정도로 가혹한 심판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 살던 사람들이 각성해 가던 17세기 무렵에 우상 숭배에 대한 사색을 깊이 해 낸 또 다른 말라키가 있었으니, 그가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입니다. 십자군 전쟁의 부산물로 이슬람 문명권에서 보존해 오던 그리스 문화가 들어오고, 또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 선교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제사 문제로 추방당하여 귀환하자 역으로 그들이 중국 고전 저술들을 유럽 언어로 번역하여 소개해 준 덕분에 동아시아 문화까지 들어와서 그야말로 17세기 유럽에는 지식의 홍수가 들이닥치던 판이었습니다. 원래 직업이 판사였던 베이컨은 법률가답게 지식의 홍수 속에서 우상숭배적인 지식을 냉철하게 판별하는 요령을 알려주었습니다. 

 

첫째로 종족의 우상은 자기가 속한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편견에서 나옵니다. 백인우월주의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같은 편견도 여기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을 닮도록 모두 다 귀하게 만드셨지만, 이 종족의 우상은 이러한 하느님의 창조 의지를 근본적으로 배척합니다. 인간의 생래적 평등을 부인하는 편견은 오류입니다. 

 

둘째로 동굴의 우상은 종족의 우상에서 파생된 우상으로서,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혈통뿐만 아니라 고향, 학교, 신분, 성 등 온갖 연고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자신과 다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을 배타시하거나 아래로 멸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부장적 문화나 사회적 신분제도도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것이 마치 동굴 속에 갇혀 사는 존재가 동굴 바깥의 세상을 모르는 것처럼, 보편적이지 못하고 편협하고 폐쇄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고수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자유라는 가치가 이 동굴의 우상 때문에 짓밟힙니다. 

 

셋째로 시장의 우상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흥정에서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일어나는 여러 가지 오류들, 즉 눈속임으로 거래하거나 그럴듯한 말재간으로 사기를 치고, 또 큰 목소리로 상대방의 논리나 진실을 압도하려는 경향 등 언어가 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하는 일이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넷째로 극장의 우상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모든 극들, 즉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모두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들인데도 이를 현실로 착각하는 오류입니다. 역사, 전통, 권위, 사상 등도 반성이나 비판 없이 바라보면 죄다 극장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전의 사두가이든 율법의 바리사이든 자칭 전문가가 말했다는 이유나, 신문이나 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로 믿게 하는 오류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비판해 보고 사실과 진실을 확인해야 비로소 믿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경험한 바의 원칙과 상식에 부합될 때라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기가 자라서 대체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던 유다 산악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처럼, 오늘 말씀은 대림 시기도 막바지로 들어선 이 때에 우리가 과연 어떤 성탄절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소박한 설레임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 대림 시기에 메시아 백성으로 변화되고 성숙하는 길은 인간을 귀하게 대할 줄 아는 하느님의 진리에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상으로 군림하는 종족과 동굴과 시장과 극장에서 빚어지는 온갖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리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오류는 어렵고 복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