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왕권의 숨은 비밀
이사 7,10-14; 루카 1,26-38 / 2021.12.20.(월);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가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젊은이와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온 이야기를 전합니다. 천사는 영문을 알지 못해서 몹시 놀라는 마리아에게 뜻밖의 인사말로 시작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마리아가 이때 들은 인사말의 내용인 은총이 과연 무엇인지는 두고 두고 밝혀지게 됩니다. ‘두고 두고’ 밝혀진다는 말은 이 은총의 내용이 믿음으로만 알 수 있어서 많은 경우에 마치 숨겨진 비밀처럼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음을 알려주는 천사는 그 ‘은총’에 대해서 우선 직접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부터 운을 떼었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1-32ㄱ). 약혼만 했지 아직 부부생활을 하기도 전인 마리아에게 잉태 예고를 함으로써 그로 인한 마음의 충격을 덜어준 다음에 천사는 더 중요한 전갈을 전해 주었는데, 그것은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게 될 아기가 과연 어떤 인물일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2ㄴ-33).
‘조상 다윗의 왕위’라든가, ‘영원한 다스림’ 또는 ‘그분의 나라’ 등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나타날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세속적으로는 천사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커녕 그분은 유다인의 왕 노릇을 해 보지도 못하셨는데도, 그런 누명을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채로 참혹하게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공생활과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가장 어린 막내였지만, 예수님의 신원과 이를 미리 알려준 천사의 전갈을 믿었고 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복음서 곳곳에 이를 알 수 있는 코드를 깔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적인 계시의 참다운 의미에 대하여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록해 놓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배운 뽈리까르뿌스가 또 다시 자신의 제자 이레네우스를 통해 2 세기 경에 교회의 기록에 처음으로 운을 떼었으니,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자로 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야흐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도 교회의 주류에서는 사도 신경 등 신앙정식을 확정하면서도 이러한 창조 신앙에 대해서는 소수 의견으로만 취급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한찬 흐른 후에야 이 비밀을 푸는 코드를 알아낸 사람이 나타납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프랑스의 사제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고생물학자이면서도 신학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로 내세우는 놀랄만한 주장을 폈더니, 한때 교회의 주류로부터 급진적 사상을 펴는 위험한 이단자로 단죄를 받았다가 그에 동조한 신학자들이 모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서 비로소 교회에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창조는 끝난 것이 아니며 자율적으로 진화되어 오다가 오메가 포인트인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진화가 거대한 도약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오늘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는 그 시작이며 강생으로 나타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새 창조가 본격화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탄생된 교회는 새로운 인류로서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신자로 세례를 받는 이들은 모두 새로이 탄생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 아담, 그리스도 교회를 새 하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새로운 인류로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신앙에 의해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신비스럽게도 성령에 의한 역사적 개입임을 대림 시기마다 듣고 있고, 이러한 개입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을 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은총임을 거듭 거듭 교회는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를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아보는 힘은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으며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의 귀로 들어야 말씀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성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움직이는 손발로라야 비로소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신앙 감각을 알아보고 존중하는 일도, 공동으로 합의하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도 결국 믿음의 능력입니다.
요컨대, 예수님께서 왕권을 행사하시고 그 다스림이 영원하시리라고 주님의 탄생을 예고한 천사의 전갈은 그분의 부활을 믿는 백성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이 나라는 부활하신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는 이들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사회적이고 영적인 실체입니다. 결국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도 부활 신앙에 의한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는 복음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나, 그 나라에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의 창조에 대해서나 또 그 과업에 참여하자면 반드시 필요한 부활 신앙에 있어서나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고, 또 신자들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어서 비밀처럼 감추어져 있지만 중요하고 명확한 진리입니다. 이것이 천사로부터 마리아가 들은 ‘은총’의 숨겨진 뜻이면서, 종종 감추어져 온 그리스도 왕권 사상의 숨은 비밀로서, 부활 신앙으로 본격화되는 그리스도 신앙의 창조적 국면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2ㄴ-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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