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 교리상식

[생활교리] “성찬례,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

수성구 2021. 5. 12. 06:19

[생활교리] “성찬례,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

[생활교리] “성찬례,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와 한결같은 바람은 주님과의 만남이다. 기도가 영적인 대화라고 한다면,

기도의 지향점은 주님과의 만남을 위함이다. 또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성경 인물들이 주님을 어떻게 만나고 체험했는가는 우리의 늘 주된 관심사항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며, 치유하고 사명을 부여”(가톨릭 교회 교리서, 1210항)하는

성사들 역시도 결과적으로 우리를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도해준다.

그중에서 성찬례는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와 성령과 친교를”(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22항)

이루게 함으로써 가장 탁월하고, 가장 구체적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성찬례를 통해 얼마만큼 주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고 있는가?

아니, 성찬례가 이루어진 곳에, 특히 ‘가장 완전하게’ 주님이 현존하시는 영성체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는 그리스도의 몸(성체)”이라고 단언한다.

사실 영성체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22항 참조).

이로써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단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성 아우구스티노) 될 수 있다!

이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주님이 ‘먼저’ “나의 친구”(요한 15,14)가 되시어,

내가 그분과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는 뜻이다. 또 주님과 내가 서로 안에 머물며 지냄으로써(요한 15,4 참조),

이제 그분의 힘과 도우심으로 살아감을 말한다.

 

또한 성찬례는 주님이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극진히’,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확증이요(요한 13,1 참조),

생명의 빵으로 건네지는 성체는 당신 자신을 어느 것 하나 빼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정점이다. 단적인 예로, 사제는 영성체 바로 직전에 둘로 쪼개진 성체를 들어 높여

회중에게 보여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둘로 나뉜 빵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에게 한번 쏟아진 주님 사랑은 결코 거두어지거나 철회될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었을 때,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과 그리움은 단연 성체를 모시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가톨릭 교회에서 성체성사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다.

이 말은 곧 만약 누군가 성찬례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큰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사랑의 성사, 73항 참조).

단연코 성찬례는 주님이 주신 여러 선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선물”(성 요한 바오로 2세)이다.

주님과의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성찬례의 놀랍고도 은혜로운 선물을 놔두고,

과연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더 청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성체성사가 있습니다.”(성 율리아노)

 

[2021년 4월 25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팔봉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