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왕 루도비코 9세(1215 - 1270)는 빠리 근처 뽜시 출생으로 12 살에 왕이 되었다.
젊은 시절 프란치스칸 교사들로 부터 교육을 받았고 후에 3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모범적인 왕이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현명하고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성직자들의 궁핍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석방되자 프랑스에 돌아와서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두 번째 십자군 원정 중에 병든 병사를 간호하다 전염된 역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주보 성인이다.
겸손한 마리아-피사넬로(Pisanello)
1420∼22년. 50cm ×33㎝. 베로나.카스텔베키오 미술관
북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한 미술가로 손꼽히는 피사넬로는
풍속화적 경향을 띤 독자적 양식을 만들어 내었다.
특히 동물들이나 식물에 깊은 애정을 가졌는데 그것들이 그의 화면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메다이유(Medaille)조각사로서 귀금속이나 구리를 재료로 하고 주조(鑄造)
혹은 각인(刻印)하여 기념비, 메달, 상패를 만들어 최초의 대표적인 메다이유 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마리아 도상의 흐름을 보면 초대 교회부터 중세까지의 성모상은
대체로 엄격한 신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하여 초대 교회부터 13세기까지 중세의 성모자상은
보통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화려한 옥좌에 앉아 있는 형상이 주를 이룬다.
아기 예수님은 성인의 비례로 그려졌으며 크기만 작을 뿐
어른의 축소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기 예수님을 성인의 모습으로 그린 것은 전능하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으로 나타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의 예수님을 보면 팔을 들어 올린 승리자 혹은 심판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옥좌가 유난히 크고 화려한 이유는 그것이 교회를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마리아상의 변화는 사회변화에 따른 종교와 미술의 변화로 해석할 수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일찍부터 도시와 상업이 발달했던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의 사고가 현실적, 이성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신앙도 천상에서의 구원을 비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성서 이야기는 현실 속으로 들어와 삶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를테면 마리아가 화려한 옥좌에서 내려와 아예 땅에 앉은 유형도 탄생하게 되었다.
이 같은 마리아를‘겸손한 마리아'라고 부른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얼굴을 자신의 뺨에 비비며 애틋한 모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장면은
어머니가 어머니가 되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점이다.
‘겸손하신 동정녀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정지풍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