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그때 그 시절

그시절엔 흔하게 접하는 사고였죠...|◈─……

수성구 2019. 11. 23. 02:52

그시절엔 흔하게 접하는 사고였죠...|◈─……그때♡그시절

       

옛날 사건기자들의 훈련법은 독특했다. 사건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무조건 희생자의 살아있을 때 얼굴사진부터 구하게 했다. 여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면 졸병 기자는 사망자 집을 일일이 돌며 사진부터 챙기는 게 일이었다. 기사를 잘 쓰는 것과 별개로 신문들은 그런 사진을 얼마나 더 많이 싣느냐로 경쟁을 벌였다.

 

'미션 임파서블' 사망자 사진을 구해라

 


요즘 같으면 초상권 때문에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데스크들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얼굴 사진이 들어가야 독자에게 사건사고의 현실감을 생생히 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알고 보면 사망자의 인생스토리나 주변 얘기 등 부가가치 높은 기사를 취재하고, 유족한테 사진을 얻어올 정도의 협상력과 순발력을 키워주려는 ‘기자 만들기’ 의도도 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신문에 쓰라며 기자에게 선선히 사진을 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범죄와 관련되면 더욱 그렇고, 전혀 자기 잘못이 없는 엉뚱한 희생자라도 슬퍼하는 유족에게서 사진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따귀라도 얻어맞기 십상이다. 회사에선 어떻게든 사진을 구하라 하고, 다른 사 기자는 이미 사진을 구해 간 것 같고, 유족들은 사진을 줄 생각조차 안 하고…. 이럴 때 초짜 사건기자는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사진만 준다면 정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교나 직장, 심지어 장례식장에 찾아가 수사경찰인 양 속이고 사진을 빼내는 수법도 많이 써먹었다. 사실상 절도죄에 해당하는 범죄인데도 경찰은 공익 차원이라고 여겨선지 적당히 눈을 감아주었다.

신문은 어린이 사고의 경우 더 사진에 집착했다. 누구나 관심 갖고 분노하는 일인 만큼 기사가 완벽해야 하며 사진은 바로 완벽의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사건 데스크는 "어린이 사건은 취재는 나중에 하더라도 얼굴사진이나 현장사진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기자들을 다그쳤다. 사진이 나가야 독자의 관심과 동정을 산다는 거였다. 그런 다그침 때문인가, 사진을 못 구하면 아예 기사를 송고하지 않는 기자도 있었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비닐하우스 촌 가족에게 닥친 연탄가스 사고

 


꼭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기자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70년대 중반, 영동지역 개발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밤새 폭설이 내려 서울시내 교통이 온통 엉망이 된 날 아침 동부경찰서에 들렀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형사가 슬쩍 팔을 잡더니만 귓속말을 건넸다. "참 묘한 사건이 생겼는데…. 혹시 취재차 있으면 함께 가보는 게 어때?"

특종을 주겠다는 얘기, 사정을 하면 했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기자가 눈치 챌세라 바삐 경찰서를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형사는 차에 타자마자 "현장은 개포동"이라고 일러줬다.

당시는 강남 택지 개발이 한창이고 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지만 강남지역을 관할할 경찰서 한 곳도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다. 큰길을 빼곤 거의 비포장이고 대중교통 차편도 별로 없었다. 성동구 자양동 동부경찰서에서 개포동까지 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렸다.




 


사건은 비교적 단순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던 어린이 3명 중 2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숨진 사건이었다. 물론 어린이가 관련됐으니 주목도가 높은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히 연탄가스 중독 사고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형사의 이어지는 설명이 여운을 남겼다. "그게 말이야, 아이들 부모들은 다른 비닐하우스에서 잤다는 거야. 물론 그쪽은 멀쩡하다는 거고…."

무슨 소리, 그럼 타살이라는 얘기? 놀라 묻는 기자에게 형사는 자신도 현장에 못 가봤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이르다고 했다. 다만 오랜 형사의 감으로 타살은 아니고 사고사가 분명한 것 같은데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가스 중독 사건을 전화로 신고한 사람(아마 통장이나 이장이었던 듯하다)에게서 들은 얘기를 고스란히 전했다.



 

 

 

어른들이 먼저 일어나 아이들 방에 가봤더니..

 



개포동 근처 비닐하우스 촌에 각각 아이들을 둔 홀아비와 과부가 살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몰랐으나 아이들이 친해져 비닐하우스를 오가며 노는 바람에 각자의 사정을 알게 됐다.


남자건 여자건 생계수단이 막막해 재혼은 생각지도 않았으나 사정을 알면서 마음이 변했다. 어린 아이들도 새 엄마 새 아빠가 생기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가난한 두 사람은 식을 올릴 생각은 못하고 합방 날만 잡았는데 밤새 눈이 내린 어제가 바로 그날이었다.

어른들이 한쪽 비닐하우스에 신방을 차리고 아이들은 다른 하우스에 자도록 했다. 아침이 되어 어른들이 먼저 일어나 아이들이 자는 곳에 가봤더니 연탄가스에 중독돼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길이 폭설 탓에 완전히 끊겨 의사를 부를 수도 없었다. 비닐하우스 동네 사람들이 모여 김치 국물을 떠먹이는 등 난리를 쳤으나 회생하지 못했다. 부모들은 넋이 나가 울고만 있다….



 


형사의 얘기를 듣는 동안 취재차는 지금의 강남경찰서 부근까지 왔다. 운전기사는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온통 흰 눈에 덮인 둑길과 들판 저 너머로 높은 산이 보였다(아마 삼성동 근처 탄천 둑길에서 대모산을 바라봤을 것이다). 산 밑에 사고가 난 비닐하우스가 있다는데 눈밭을 헤치고 걸어간다 해도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한두 발 디뎌봤지만 거의 무릎까지 눈에 빠졌다. 형사도, 기자도 난감했다.



 

 

 

눈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한 아이의 죽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아무도 현장에 가지 못했다. 사연이 안타까워 기사만이라도 송고하려 했으나 결국 그것도 포기했다. 사진부터 구하라는 데스크 지시가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찰조차 확인하지 못한 현장상황을 전해들은 말만 믿고 보도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또 신문에 보도되면 형사는 자세한 상황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그의 입장을 생각해서도 덜컹 들은 대로 기사를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사는 우선 '폭설로 현장 접근 불가. 계속 수사 중' 보고서를 올리겠다고 했다. 경찰서 사건접수부에는 '연탄가스 중독'이라고만 쓰고 사망자 발생여부도 기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체 검안도 못했으므로 상황보고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장에게 알리고 길이 열리면 후속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자의 입장도 고려해 다른 언론사에서 사건을 취재하지 못하게 보안을 지키겠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눈 녹으면 현장에 가 어린이 사진을 구하고 가슴 아픈 사연을 신문에 실으려던 계획은 또 어그러졌다. 그날 밤 느닷없이 지방출장 명령을 받은 것. 출장 중 몇 차례 형사에게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요즘처럼 휴대전화가 있는 시절도 아니어서 그 일은 서서히 잊혀졌다.

사건발생 열흘 정도가 지난 다음에 담당형사를 다시 만났다. 다른 사건을 배당 받아 바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현장에 갔을 때의 상황을 얘기했다. "두 명 죽은 게 아냐, 한명만 죽었어. 통장이 전화로 잘못 얘기한 거야. 단순 가스중독이고…타살혐의 일체 없어. 단순사고로 서류보고하고 끝냈지." 한참 지난 얘기를 쓰면 데스크에게 핀잔을 들을 게 분명했다. 사건 자체를 모르는 것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슴은 먹먹했고 눈시울은 뜨거웠다. 지금도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면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한 어린이의 죽음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