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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마음[논개이야기]|◈─……

수성구 2018. 8. 26. 04:10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마음[논개이야기]|◈─……고전글♡漢詩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마음… 아아! 논개여 !

 

  논개(論介)가 기생 이라고 ?..............

논개는 어려서는 아버지의 병환을 정성으로 간호하고 병약한 어머니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5년간 관가의 종살이를 하게 되자 어머니를 대신하여 종살이를 한 효성이 지극한 여인이다.

철이 들어 장수현감 최경회의 후취 부인이 된 뒤에는 사랑과 예로 남편을 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을 지키려는 관군과 의병을 도와 왜군과 싸웠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남편 촤경회 장군이 자결하자 기녀가 되어 왜장들의 촉석루 승전 축하 잔치에 참석 하였다가 왜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남강에 빠진 충절의 여인이다.

논개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녀의 효와 사랑과 충절의 삶을 살펴보려고 한다.

 


  논개의 죽음과 의암.

촉석루는 남강 가 바위 벼랑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아름다운 누각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세우고 일곱차례의 손질을 거친 이 누각은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 이었으므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 남장대(南將臺)로서 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였으나 임진왜란 때는 이곳을 지키는 지휘본부였을 것이다.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들이 여기서 전승을 자축하는 자축연을 열었으니 조선사람 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런 자리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서 성을 지키다 순절한 최경회 장군의 부인인 논개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기생이되어 잔치에 참석하고 술취한 왜장 게야무로 로쿠스케를 유인하여 껴안고 강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의암은 촉석루 아래 바위벼랑 끝에 크기가 3.65m*3.3m인 평범한 바위로 물위로 30cm정도 솟아있다.

이 바위를 의암이라 하는 것은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기억하는 진주지역 주민들이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주민들의 뜻을 받들어 논개가 죽은지 30년이 지난 1625년경에 정대융이 바위 옆면에 전서로 “義岩”이란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강물 속에서 물 위로 솟은 이 바위는 오랜 세월을 두고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움직여 때로는 육지의 암벽 쪽으로 닥아 서고 때로는 강 쪽으로 들어가서 암벽에서 건너뛰기가 힘들 정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그 뿌리는 어디에 닿았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한다.

옛날부터 진주 시민들 사이에는 이 바위가 암벽에 와 닿으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전해온다.

그 말대로 라면 임진왜란 때 이 바위는 육지쪽 암벽 가까이로 옮겨와 있었을 것이니 논개나 왜장이 건너뛰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논개의 출생 과 성장

논개는 조선 선조 7년(1574년) 9월 3일 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훈장 노릇을 하던 주달문(朱達文)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통정대부를 지낸바 있는 논개의 조부 주혁은 경상도 서상면 방지리 에서 이곳 장수 장계의 산골짜기로 이사온 뒤 서당을 차리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진사였든 아버지 주문달도  그 뒤를 이어 훈장으로 이름을 떨치니, 먼 곳에 사는 젊은이들 까지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이곳을 주학자 마을 이라고 하여 “주촌(朱村) 이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

주달문과 밀양 박씨에게는 대룡 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래서 대를 이을 아들을 달라고 삼년간 지성으로 빌어 임신을 하였는데 낳고 보니 딸이었다.

달문이 새로 태어난 아이의 사주를 보니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난 특이한 사주였다.

갑술은 띠 동물로 개이므로 아이의 이름을 “개를 놓다(낳다의 경상도 사투리)를 거꾸로 하여 ”놓은 개“ 곧 ”논개“라하고 한자로 ”論介“라 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천한 이름을 지어야 명이 길다는 민간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늦은 나이에 외동딸을 얻은 논개의 부모는 논개를 애지중지 길렀다.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 하였으므로 아버지의 서당에서 남자 아이들과 함께 글공부를 하였다.

논개의 아버지는 나이가 들면서 해수병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논개는 아버지를 지성으로 간호 하였다.

그러나 논개의 나이 열세 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논개의 모녀는 숙부 주달무의 집으로 가서 함께 살았다.


  최경회 현감과의 만남과 헤어짐

이웃마을에 사는 부자 김풍현은 모자라는 아들을 장가들이기 위해 주달무를 꾀었다. 재물에 눈이 어두운 주달무는 약간의 재물을 받고 논개를 김풍현의 민며느리로 팔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는 소백산의 험한 고개인 민재를 넘어 외가인 경상도  서하 봉전 마을로 도망을 하였다.

혼인 잔치 준비를 하다가 논개 모녀가 도망간 사실을 안 김풍현은 장수 현감에게 고발을 하였다.

논개 모녀는 관원에게 잡혀와 장수현감인 최경회의 심리를 받게 되었다.

숙부인 주달무는 재물을 챙겨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사건의 진상을 밝힐수 없었다.

최현감은 논개 어머니가 자세한 걸 몰랐다 하드라도 사주단자를 받았고 김풍현의 재물을 축내었으므로 5년간 관아에서 노비로 일하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있든 논개는 어머니가 병약하여 노비로 일할 수가 없으니 자기가 대신 노비 노릇을 하겠다고 하였다.

논개의 어여쁜 마음에 감동한 최현감은 관속들의 의견을 들은 뒤에 논개에게 2년동안 내아의 급수비로 일하면 죄를 면하게 하여 주겠다고 하였다.

 

논개는 종일 물을 길어 나르고 지성으로 현감부인 나주김씨의 병 수발을 하였다.

이렇게 1년 남짓 지나는 동안 논개의 착한 마음씨와 성실함을 본 최현감 내외는 논개를 아끼고 사랑 하였다.

병이 깊어 회복할 가망이 없음을 안 현감부인 김씨는 최현감 에게 자기가 죽은 뒤에 논개를 후취부인으로 맞으라고 간곡하게 부탁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숨을 거두었다.

논개의 형벌기간이 끝난 뒤에 최현감은 주위의 간곡한 권유와 청을 받아들여 논개를 후취로 맞았다.

최 현감이 59세 되든 해에 어머니 임씨의 상을 당했다.

최 현감은 3년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 에게 주촌에 가 있으면 3년 상을 마치고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다.


  최경회 장군과의 다시 만남과 진주성 싸움.

최현감이 화순에서 어머니의 3년상을 치르고 있을 때인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고 임금이 의주로 옮겨가자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화순에서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있든 최경회는 상복을 벗고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한 뒤 이들을 훈련 시켰다.

전라우도 의병장이 된 최경회는 남원, 임실, 전주, 무주, 금산에서 왜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최장군은 장수로 가서  왜병을 물리친 뒤 신병을 훈련 하면서 틈이 나는 대로 논개를 만났다.

논개와 다시 헤어져 의병을 이끌고 장수를 떠난 최장군은 함양, 거창, 산음, 합천, 성주 등으로 가서 왜적을 무찌르고 진주로 갔다.

그는 진주성 제1차전 때에 진주성을 지키고 있든 김시민을 임계영 장군과 함께 성밖에서 지원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그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 되었다.

논개는 남장을 하고 최장군을 만나러 진주로 향했다.

그녀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진주에 이르러 최장군을 만났다.

왜군은 제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지방을 침공하는 전진 기지로 삼기위해 인근 지역에 주둔 하였든 군사를 모두 모아 진주성을 다시 공격 하였다.

경상 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복수대장 고종후 등은 6천여 명의 의병과 6만 여명의 성안 주민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10만의 왜병과 맞붙어 싸웠으나 중과부적 이었다.

우리병사들은 성안으로 들어온 왜병에게 밀려 지휘소가 있는 남장대 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화살도 다하고 창과 칼날도 무디어 졌으며 믿었던 원병도 오지 않는  처참한 상황에서 남은것은 명예로운 죽음 뿐 이라고 판단한 촤경회 장군은 뒷일을 당부하는 유언을 남기고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 하였다. 

최경회 장군은 광해군 9년(1617)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숭전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스라엘에 야헬이 있고 프랑스에 잔다르크가 있다면, 우리한테는 논개가 있다.

같은 여인으로 프랑스의 소녀는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른 여장부였다면,

반면 우리의 여인은 다소곳 한 미모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단심을 가슴 깊숙이 숨기고 한 목숨을 던져 의기(義氣)를 세우는 기생의 몸이다.

한편 이스라엘에는 야헬을 포함하여 많은 여인들의 무용담이 전해지고 있다.

이런 이스라엘 여인처럼 나라를 구하는 여인들이 우리 역사에 논개 말고도 좀 더 많이 등장했더라면 우리 역사가 많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이렇게 용감한 이스라엘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었고 또 프랑스의 잔 다르크도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대신 종교재판에 의하여 희생되었지만, 의기(義妓) 논개는 적장을 죽이기 위하여 자기 한 목숨을 바쳐 죽음을 택하였다는 점에서 저들과 다르다.

 

촉석루(矗石樓) 발근 달이 논낭자(論娘子)의 넉시로다
향국(向國)한 일편단심(一片丹心) 천만년(千萬年)에 비취오니
아마도 여중충의(女中忠義)난 이뿐인가 하노라

 

임란 중에 나라가 왜적의 침략을 받아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허구 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기생의 몸인 논개와 계월향 두 의기(義妓)가 나라를 구하고자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고귀한 충절은 갸륵하기 그지없다.

왜장과 함께 죽는 이들의 나라 사랑을 위한 충절이 가능했던 것은 여타 많은 기생들이 마음을 바친 정인(情人)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위해 한 목숨 바칠 수 있는 정절이 유독 강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촉석루(矗石樓) 난간(欄干)밧긔 남강수벽(南江水碧) 백구비(白구飛)라
슬푸다 일편석(一片石)은 정충고혼(貞忠孤魂)을 실엇고나
서풍(西風)에 잔(盞) 들어 위로 할졔 눈물 게워 하노라
안민영 (安玟英)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는 많은 여기(女妓)들 중에는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단심을 보여주는 기생들이 더러 나온다.

그것이 비록 한 사람의 정인을 향한 사연이긴 하지만 두고 두고 후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 아름다운 사랑의 열정을 살아갔었기에 귀한 연가(戀歌)로 전해져 오늘의 우리들에게까지 회자되고 있다.

경성 기생 소춘풍은 생전 자기의 가슴을 열고 정을 주었던 사람 사인 이수봉(李秀봉)이 죽어 헤어진 뒤 중년에 몸은 최국광(崔國光)의 첩이 되었지만 병들어 죽는 임시에서도 떠난 임, 이수봉을 평생 가슴에 담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가난을 못 이겨 몸을 왕자 이천군에게 맡기면서도 첫 순정을 바쳤던 임, 한사인을 향한 일편단심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기생 관홍장은 이렇게 약조를 맺었다.

 

 " 내 비록 창가의 여자이긴 하나 이미 한사인(韓舍人)에게 몸을 허락했으니 재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모의 배곯음을 볼 수 없어 우선 공자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한사인이 풀려서 돌아온다면 비록 나으리의 댁에서 아홉 아들을 낳았다 하더라도 구속받지 않겠습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 진 뒤에야 나으리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작은 암자에 울리는 풍경(風磬) 소리 그윽한 어느 깊은 밤, 죽은 박준한을 그리는 마음 가눌 길 없어 불연(佛緣)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일심으로 면벽송경(面壁誦經)하고자 주변을 정리하고 박준한의 노모가 계신다는 황해도의 어느 작은 암자를 찾아가 자신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던 기생 송이….

그토록 아껴 주던 어윤겸을 배반하고 홍 사또에게 달려 온 것을 비방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뒤늦게나마 그를 위해 순절한 것을 두고 세인들은 매화를 '재가열녀(再嫁烈女)라고 불렀다.

 

그녀에게 진정한 열녀의 걸어갈 길을 가르쳐 준 이씨 부인의 전례를 따라 비록 시앗이 되어서라도 사랑하는 임의 옆에 눕겠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홍시유의 무덤 앞에서 목숨을 끊은 매화. 

 성종의 사랑을 몸으로 받았던 기생이었지만 성종 임금이 승하한 후 스물여덟 한창 고운 나이로 석왕사 주지스님에게 애원하여 머리를 깎고 운심이라는 법호를 받아 여승이 된 기생 소춘풍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최경창이 죽자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내고 9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하다가 임종할 때에 "나를 님 곁에 묻어 주오" 라는 유언을 남기자, 완고한 해주 최씨 가문에서도 홍랑의 정절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리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며 해주 최씨 문중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가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기생 홍랑의 절의. 

 

이런 기생들의 일편단심의 기질과 정신과 전통이 면면히 그들의 가슴 속으로 흘러내려옴으로 하여 임진 왜란과 같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그들의 마음 속 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논개와 계월향의 조국사랑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으리라.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 꽃 보다도 더 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 꽃 보다도 더 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 꽃 보다도 더 은 그 마음 흘러라.

 

 


진주병사(晋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고 있던 논개는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싸움에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쳐 대승을 거둔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에서 패배한 왜군이 1593년 6월 12만여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온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성을 지키던 민.관.군 7만명이 끝까지 항쟁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 (主谷村六助)을 촉석루 절벽아래의 의암바위로 유혹하여 그를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의기이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할 때 팔이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다고 전한다.

 

말고 말근 강남수(江南水)야 임진(壬辰)이를 네 알니라

충신(忠信)과 의사(義士)덜이 몃몃치나 빠져 난고
아마도 여중장부(女中丈夫)난 논낭자(論娘子)가 하노라

 

그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후인 1721년(경종 1)에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논개의 의열에 대해 국가가 봉작을 내려주고 사당을 건립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녀의 순국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논개를 <의기>로 지칭하게 되었다. 왜장을 끌어안고 춤추었던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1739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의암별제>는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기녀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추모제이다.

 

무진년(戊辰年) 유월일에 단을 부어 분향하여
삼백명 여기(女妓)덜이 정성으로 기제(妓祭)하니
논낭자(論娘子) 충혼의백(忠魂義魄)이 내리실가 하노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와 같이 한 목숨을 던져 먼저 간 성민(城民)들의 원수를 갚은 의로운 기개를 가진 장한 여인은 우리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廟에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든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섞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구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혀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바친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갸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 꽃의 상징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꺽이우지 못한 낙화대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밝히운, 강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 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오,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오,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祠堂)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鐘)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贖罪)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의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한용운

 

               
           

 

 

의암사는 장수현감 정주석이 논개의 충절을 선양하고 장수 태생임을 기리기 위해 1846년 '논개생장향수명비(論介生長鄕竪名碑)'를 세운 후 1955년에 군민들의 성금으로 남산에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974년에 현위치로 옮겼다. 경내에는 생장향 수명비각, 기념관, 외삼문, 내삼문, 충의문, 영정각 등이 있다.
기념관에는 약간의 논개의 유품과 남편 최경회 장군의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논개는 선조 26년 임진왜란시 왜군이 진주성을 점령, 남편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장군 등이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자, 남편의 원수를 갚고 국치를 설욕하고자,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군 승전잔치에 기생을 가장하고 참석하였다. 주흥에 도취된 왜장을 남강가 바위로 유인, 그의 허리를 껴안고 함께 강속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당시 논개의 나이는 19세였으며, 투신한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1955년 장수에 사당을 지어 '의암사'라 명하고, 논개의 영정을 모셨으며, 매년 음력 9월 3일 '주 논개제'에는 각종 문화행사가 치뤄진다. 주변에 백운산, 장안산 등이 있다.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 46호
지정일자 : 1981년 4월 11일
소재지 : 전라북도 장수읍 두산리 산3번지

 

 


      촉석루

 


논개의 최후와 무덤.

논개는 왜장들이 칠석날 촉석루에서 전승을 자축하는 잔치를 여는데 기생을 징발 한다는 말을 들었다. 논개는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진주기생 논개”라고 기적에 올린다음 잔치에 참여 하였다. 잔치에 참석한 왜장들 중  가또오 기요마사의 부장으로 선봉장이 되어 전공을 많이 세운 게야무라 로꾸스께 가 논개에게 마음을 두고 가까이 닥아왔다. 논게는 이를 눈치채고 잔치자리를 빠져나와 촉석루 아래의 의암으로 갔다. 취흥이 도도한 왜장은 의암으로 와서 논개를 끌어 안았다. 논개는 기회를 놓지지 않고 왜장을 끌어 안은뒤에 깍지를 끼고 남강으로 몸을 날렸다. 최경회 장군을 따라 의병에 사람 중에는 최경회의 고향인 화순 현감을 지낸 장수등 호남 출신이 많았다. 살아남은 의병중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충절에 큰 감동을 받은 이들이 왜군 몰래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시신을 수습하여 메고 왔다. 그래서 주씨의 집성촌인 경북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에 매장 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가 함께 있다. 그 옆에는 논개의 시신을 메고 온 의병 추모비가 있다.

 

남강가 바위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사장으로도 쓰였다.  해마다 여름이면 진주의 노인들은 시원한 강바람이 더위를 식혀주는 이곳에 모여 시조를 읊고,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임진왜란때의 진주성싸움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리며 애국의 기상을 기른다. 6.25때 불탄 것을 시민들이 힘을 모아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 5월에 옛모습을 되찾았다.

지정번호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
지정일자 : 1983년 7월 20일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은 의암 주논개가 태어난 마을이다. 1574년 9월 3일의 4갑술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난 논개는 주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지금 마을은 오동제에 수몰되고 2002 년 9월 29일 현위치로 이전 건립되었다.

드라이브코스
- 장수에서 차로 30분 거리 (19km)
- 장계에서 차로 15분 거리 (7km)
- 장계 → 오동리 오동제 → 대곡리 주촌 논개 생가지 → 지지계곡 → 동화댐 → 백용성 조사 → 방화동 가족 휴가촌 → 장수 온천 호텔, 남원
소재지 :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


[ 논개영정(의암사) ]
1955년 비단에 채색된 이당 김은호 화백의 작품.

이당은 임진왜란 때의 전설적 여인인 논개의 상을

1955년 정초에 전북 장수의 관민유지들의 고장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논개사당(의암사)에 봉안될 영정을 그림

 


[ 논개영정(보수원) ]
우에스카라는 일본인이 히코산에 보수원을 짓고

적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와 논개의 영정을 봉안했던 것을 되찾아온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