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긷는 사람들
저는 개인적으로 참 공허하게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유명 인사를 소개할 때 ‘전(前) 국회의원’ ‘전(前) 모 대학 학장’ 하는 식의
소개 법은 그 사람의 ‘현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오직 그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던 ‘과거’만을 회상하게 합니다.
과거의 영광을 찬양하느라 정작 지금의 삶에 소홀한 것 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지방 ‘시카르’라는 고을에 있는 우물은
쉽게 볼 수 있는 보통 우물이 아니었습니다. 존경하는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천이백 년 전에 파놓은 우물로 오랜 전통뿐 아니라 대대로 많은 사람들의
목마름을 쉬지 않고 채워주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만큼 많은 사연과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는 ‘위대한 우물’,‘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랑스럽고 위대한 우물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곳을 매일 찾아오는 한 사람, 삶에 지치고 방황하는 한 여인의 삶을
새롭게 바꿔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예수님은 꿰뚫었던 것입니다.
“그래, 이 마을 사람들이 천 년이 넘도록 마셔온 이 물이 지금 그대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풀어 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이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드라마 대사가 한때 유행했습니다.
이 대사처럼 정말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합니다.
또 “안녕들 하십니까?”란 질문에
“난 안녕하지 못하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아픔과 갈증의 현상에 때마침 ‘힐링 열풍’이 불면서
모 교수님은 ‘청춘은 당연히 아픈 것’이라 하고,
또 어떤 구도자는 ‘잠시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멘토링과 위로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갈증과 아픔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신앙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전통은 2천 년의 역사 동안 세월의 풍파를 거쳐 왔고,
그것의 깊이와 수량의 풍족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물가의 예수님이 던진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우물이 우리들의
영혼에 진정한 위로와 기쁨이 되고 있는지, 이런 전통의 힘을 바탕으로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신앙인으로서 자신 있게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랑만 해왔지 그것이 나의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면, 전해져
내려오는 이 오래된 신앙의 우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을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젠 그물을
직접 길어 올려 목말라하는 세상을 적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물가에서 물 긷는 자들입니다.
아마 세상이 목이 타서 이렇게 방황하는 것은, 우리의 무관심과 게으름 때문에
물 긷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반성해 봅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 않겠습니다.”(요한 4,15 참조)
서울대교구
이명찬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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