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공동묘지에 들어가게나

수성구 2021. 3. 2. 04:39

공동묘지에 들어가게나

공동묘지에 들어가게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송현 신부)

 

 

미국의 저명한 종교가인 빈센트(1832-1920)박사가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모습이 너무나도 초췌해 보였습니다.

빈센트가 안쓰러워하며 물었습니다. 자네 요사이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나?

친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여보게. 요즘 사는 게 괴로워 죽을 지경이네.

정말이지 아무런 걱정 없는 곳에서 산다면 얼마나 좋겠냐? 이 말에 빈센트가 제안했습니다.

여보게. 소문을 듣자하니 걱정 없이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딱 한군데 있다고 하더군.

자네 그곳에 가고 싶은가? 친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부탁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그곳이 어디인지 얼른 알려주게나.

저 앞에 보이는 강을 건너가게. 그러면 큰 공동묘지가 나올 걸세.

그 동산에 들어가게나. 거기서는 근심 걱정이 전혀 없다는군.

이 사람아.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건가?

화를 내는 친구에게 빈센트가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친구여. 사는 것이 걱정되고 괴롭다면 그것은

아직 자네가 공동묘지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증거일세.

세상에 사는 동안 누군들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욥의 고백처럼 인간이 겪는 고통만 본다면 인생은 땅 위에서의 고역입니다.

불가에서도 인간의 삶을 가리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의 바다라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삶에 고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지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해나가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시에 눈을 돌림으로써 고통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곧 고통은 예수님의 구원 활동과 부활에 동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갖가지 고통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는 주님과 동행할 수도 있고 그분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죽음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할 가련한 운명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조금 손해보고 조금 힘들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머물 집이 하늘 나라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절망을 허락하신것은 인간을 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위대하고 새로운 생명을 자각시키기 위해서라는

헤세(H. Hese)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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