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동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수성구 2020. 12. 3. 02:26

동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동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엠마오로 가는길에서 송현 신부)

 

 

탈무드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스스로 경건한 신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이면 어김없이 유대회당에 나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율범이 정한 다른 모든 규정들도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실제 품행은 매우 나빠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외면했습니다.

하루는 랍비가 그를 조용히 불러 타일렀습니다.

여보게.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고 다니게..

그러자 사나이가 인상을 쓰며 대뜸 대꾸했습니다.

저는 율법이 정한 날이면 꼬박꼬박 회당에 나가서 기도하는 경건한 신자인데요.!
이 말에 랍비는 이렇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여보게. 동물원에 매일간다고 해서 사람이 동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사나이는 율법의 나무들 앞에 눈이 가려져 정신의 숲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알맹이는 빼고 법조문의 껍데기인

글자..에 매달렸듯이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율법을 섬기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주의를 배척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법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한 채 법규 준수만을 고집하는 그릇된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러한 접의 가치 전도에 따른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들은 하나같이 외적인 형태의 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과의 합일에 오류 없이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율법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그 정신에 해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 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법률 준수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적인 정신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법과 의무는 규정 준수보다는 정신에 따라 판단해야 마땅합니다.

 

 

선악을 가리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정원보다 울타리를 더 소중히 여길 수는 없습니다.

글자와 규정에만 매여 그 정신과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 선 것입니다.

외적 규정이라는 나무를 지나 정신의 숲으로 들어서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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