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기도

내일은 하느님의 섭리에

수성구 2022. 3. 24. 04:55

내일은 하느님의 섭리에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6,34)

 

 본문은 '왜냐하면 내일은 그 스스로

 염려할(돌볼) 것이다.'이다.

내일은 내일 스스로가 염려할 것이므로

자신이 미리 당겨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장래의 일은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의 자녀는 주어진 자신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라는 권고이다.

 

사실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에게만 주신 기능이다.

 

다른 피조물들, 즉 이성이 없는

 동물들은 미래의 일을 예측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인간만이 현재의 상황과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에 벌어질 일을 예측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현재의 상황을 미래의 

결과에 적용시켜 희망을 가지기도 하고,

반대로 삶에 닥칠 어려움들을 예측하여

근심하고 염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지도 않을 

내일 일을 미리부터 앞당겨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다.

 

사람의 근심 걱정은 거의가 현재보다는 

앞으로 전개되고 발생될 일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정반대의 미래가 

우리에게 닥친다.

 

안심하고 걱정 없었던 일이 오히려 

근심거리로 변해서 닥치고, 

우려하고 걱정했던 상황은 그리 

심각하게 닥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일을 겪게 된다.

 

인간 예측의 한계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모든 상황은 하느님의 

뜻대로 전개되기 때문에 

늘 예상이 빗나갈 수 있다.

 

내일 일은 내일,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결과를 보고

하느님의 손에 온전히 의탁하면 된다.

 

내일 일까지 오늘 가져와서 만들어 

가지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온전하게 

의탁하지 못하는 반쪽 신앙인이요,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회색 분자이며, 

신앙의 핸디켑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미리부터 염려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머리만 아프고 골치만 아플 뿐이다.

 

우리 신앙인은 오늘 여기에서

 지금(현재)의 일에 충실하면 된다.

지금 현재를 기쁘고 즐겁고

 긍정적으로 감사하면서 살면 된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늘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제가 없는 곳은 가끔 귀신이 

출몰한다는 조용한 공동 묘지뿐이다.

 

그렇다고 미래의 꿈이나 소망, 

예상되거나 예측될 수 있는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를 잘 준비하면서 오늘 나에게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해 

충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다 맡기고

 봉헌하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수평선을 따라

 과거, 현재, 미래를 달린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수직으로 역사하셔서

과거도 현재, 현재도 현재, 

미래도 현재가 되시며, 그러기에

 바로 '영원한 현재'뿐이신 분이시다.

 

그래서 과거도, 현재도 다 꿰뚫어 아시고, 

미래도 미리 예지하시는 전지(全知)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마지막

 궁극적 구원의 문제와 상태를 보시고 

지금 우리를 다루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오상의 성 비오 사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나이다." 

라는 기도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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