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27)
오늘 복음에서 그 여자가 예수님께
소리지르며 자신의 딸을 고쳐 주기를
원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이에 제자들이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 주어 빨리 보낼 것을 요청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15,24)고
딱 잘라 대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도와주기를 간청한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과정을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거부의 말씀을 하신 사실을 소개하며,
의도적으로 그 여자의 소원에 대해
보다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직역하면
'너는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게
되기를 허락하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가까이에서
듣고 수많은 기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어도, 여전히 영적 무지와
불신앙적 거부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많은 슬픔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유대인들이 당신을
거부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는 자신의 사명을
다시 고취하기 위하여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자가 도움을 구하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가 갖고 있는
유대인을 향한 당신의 관심을
그 여자에게 내비추고 계신다.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비록
표현적으로는 이방인인
그 여자를 무시하는 투의 말씀을
하시고 계시지만, 그 이면에는
그 여자가 이방인이었기에 경멸적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유대인을 향한
자신의 관심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한 그 여자가 하느님의 은혜로운
기적을 과연 수용할 믿음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신 것이다.
'강아지들'이란, 앞에 사용된 유대인을
의미하는 '자녀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여
'개들'(강아지들)로 지칭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을 향하여
갖고 있는 당신의 우선적 관심을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표현을
빌려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 여자를 향한
경멸조의 말씀을 던지신 것이다.
결코 예수님께서
이방 여자를 경멸하시기 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그런 경멸조의
말을 듣고도, 오히려 자신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아지의 처지라고 스스로
인정하며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렸다.
그 결과로 그 여자의 딸은 즉각
치유받았으며, 그로써 이방 여자의
놀라운 믿음이 증명되었고,
예수님께 칭찬까지 받게 되었으며
(마태15,28),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역사(役事)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유대인이 식탁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마음껏 누린다면,
자신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라도 받아야 하겠다는,
지극히 겸손하고도 진실로 강한 의지와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써
이렇게 놀라운 주님의 축복을
이끌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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