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이유
얼마전 TV를 보다가
어느 문학인의 신앙 강좌를 들었다.
옛날 참으로 어려운 시절, 구멍이
아홉 개밖에 없는 구공탄을 쓰던 시절,
고등학교 선생인 부인과 글쟁이인
자신이 가난한 단칸방에 살던 시절,
너무나 추워 불을 못지피던 시절에
자신이 쓰던 잉크병이 얼었다가
깨졌는데, 그렇게 되면
잉크색은 제 색깔을 못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지만 너무 추워도 좀 더 인간답게
살고 싶어 없는 돈으로 금붕어를
세 마리 사서 어항에 키웠는데
그 금붕어들도 너무 추워서 얼어 버렸고,
그 큰 눈을 부라리고 죽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나 추운 자신의 모습들을
그 얼어 죽어 있는 금붕어에게서 발견한
부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생명들을 살려야겠다는 신념으로
없는 살림에 그 구공탄에 불을 지펴
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끓여서
조금씩 그 어항에 부었더니
그 죽었다고 생각한 금붕어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사람 따라 체질 따라 다를지
모르지만, 더위는 몰라도,
추위는 모든 인간들이나 미물들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이요,
고통이라고 했다.
그 말 못하는 금붕어들의 동사(凍死)도
추위라는 공감대 때문에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추위를, 아픔과 시련과 고통을
느끼고 겪어 보아야
지금의 생명의 감사로움을 알게 되고,
그 모든 아픈 생명체들의 아픔이
자신의 것이 되어
측은지심과 연민의 정, 동정심이 일어난다.
그런 선(先) 체험이 없으면 그와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저 남극의 영하 40도 이하의 펭귄들이
그 추위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서로가 군집하여 또아리를 틀어
살과 살과의 체온을 비비고 나눌 때
10도 이상의 따뜻한 열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그 군집 속에서 또아리의 안쪽에
있는 따뜻함 속에 있던 펭귄들은
바깥 추위 속에
등이 노출되어 있는 동료들이
안으로 들어와 그 열을 누리도록
자신들은 밖으로 서서히 나가고,
밖에 있는 추운 펭귄들이 안으로 들어와
참으로 공평하게 따뜻한 열을 공유하게
되니까 함께 공존(共存; Coexistence)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무도 시키거나
명령한 일이 아니고 타고난 본능이요
그 추위 속에서 함께 살기위한
생득적(生得的)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럭비 풋볼이나
데모에서 스크럼(Scrum)을 짜는 것이
여기서 나온 것일게다.
그중에서도 황제 펭귄은 아무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는 천적(天敵)이 없는
가장 추운 남극의 끝까지 가서
첨벙 물속에 들어가 알을 낳는다고 한다.
바로 가장 추위를 잘 견뎌낸 자,
끝까지 가장 매서운 추위에
살아남는 자가 종족 본능의 계승자,
황제 펭귄이 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앞서가는 무당 벌레를 따라서
그대로 똑같은 동작을 하는 무당벌레도
어떤 산이 활활 불타면
그것을 20킬로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냄새를 맡고 불타서 아무 것도 없는
그 산으로 날아와 천적이 없는
그곳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인생과 구원의 문제,
가정과 집단의 인간다움과 복지의 문제,
나라와 이념의 존페와 선양의 문제 등등~
지금은 진리와
거짓이 한판 싸움을 하는 시대이다
(1요한2,12~28; 묵시록12,9~11;
13,1.5~18참조).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와의 싸움,
진리의 성령과 거짓 예언자의 싸움,
진리의 근원이신 성부 하느님과
거짓말의 화신(요한8,44)인 사탄과의
싸움말이다.
우리도 그 어떠한 시련, 아픔, 고통,
박해, 추위가 놓여 있어도
죽음보다 더 강한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끝까지 가야 하고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한다.
이것이 지금 내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여기 있는 이유,
숨쉬는 이유, 존재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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