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기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수성구 2021. 11. 10. 03:5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TV에서 요새 젊은이들과 현대인들의

 멘토인 어느 스님이 나오는 프로를 보았다.

그리고 오늘 페이스북 안에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 중에, 그 자리에 가서

 그 스님과 사진을 찍은 것을 올렸고,

동료들이 그렇게 부러워하고, 

팔장끼고 찍은 사진을 보고, 나는 

그 다음에 포옹을 할거라는 둥 하면서,

천주교 신자간에 '보살님'이라고 부르는

 농담을 서슴치 않는 것을 보았다. 

나도 우연히 어제 채널을 돌리다가 

그 프로를 반 이상은 본 것 같다.

 

참으로 자신의 몸둥아리 하나를 

끌고 가기 힘든 세상에,

스님께서 정신적 멘토로서 좋은 말씀을

 전해 주는 걸 보았다. 그러한 말씀들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수덕과 수행 정진을 통해

얻어낸 깨달음이라 여겨졌고, 그러기에

 청중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모든 욕심을 내려 놓고

 중생을 위해 수행을 하시니, 얼굴도

 눈도 자세도 깨끗하고 겸손하게 보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스님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성지 순례를 하다가

 교우의 소개로 사찰을 방문했는데,

그 스님은 천주교에서 개종하신 분이고,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상담하러

 자신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자신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권면한다고 했다.

 

최근들어 페이스북 속에서 천주교 

신자들도 쉽게 스님이나 

목사님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종교도, 사랑도, 인생도 

다 하나니, 서로 싸우지 않고 공존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소위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한다.

불교의 스님들이 도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힘든 수행을 하고 있는지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는 완덕에 이르는

 그 과정이 인간의 자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비우는 그 힘든 행위와 수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인 성령의 은총을

 받아서 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교의 그것과 다르다. 

 

유교는 도덕을 가르치는 교육학이고, 

불교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철학이며,

그리스도교만이 초자연적 계시 진리를 

가르치는 계시 종교이며,

신학을 전개한다.

 

우리는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본이시고 목적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생활하시고,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하시고,

죽고 난 뒤에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부활로서 증명해 주셨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아버지께 가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

(요한14,6)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팔레스티나라는 한정된 공간과 

33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살다가신 

역사의 예수님이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하신 후,

모든 시대,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세대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존재양식을 취하신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역사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며, 특히 말씀과 성체 안에, 

우리의 인격과 역사, 만물 안에 

현존해 계시는 분임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일찌기 유불선을 다 공부하고 난 뒤,

한역서학서를 접하고 천주학을 공부하다가,

그것을 믿음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서

 스스로 종교를 찾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절대자 하느님과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과 일치하는 가장 빠른 방법과 길로서

 순교를 택하고 천국을 확신했다.

 

그런 훌륭한 믿음의 선조들을 둔 우리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보화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기 저기 물불을 안가리고

왔다갔다 하는 걸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천주교의 성경과 

수많은 가르침을 애써 공부하지 않으면서,

남의 종교에서 기웃 기웃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천주교 안에 몸답고 사는 봉헌된 

성직 수도자로서 자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오늘날 가톨릭 교회 안의

 성직자,수도자들이 잘못 살았으면,

양떼들이 우리 밖을 헤매며

 진리를 찾고 있는가? 참으로,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다른 모든 종교를 다 인정하고, 

다 좋은 것이라 하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문제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셨고,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그분의 부활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만 한다. 

종교 다원주의 속에서 

예수님의 인성만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선교할 필요도 없고,

세례를 베풀 필요도 없으며,

우리는 또한번 예수님의 신성(천주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 천주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물어보아야 하는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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