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위령성월에
성령 대회 관계로 시카고에 머무는 동안
시내를 왔다갔다 하면서
눈에 띄는 것이 공동 묘지이다.
그리고 11월 1일 제성첨례(諸聖瞻禮;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All Saints Day;
Hallowmas)전야인
10월 31일 Halloween를 보내기 위해
집집마다 귀곡산장처럼 많이 꾸며 놓았다.
인간의 원죄의 결과로 죄와 고통과 죽음이
우리네 삶의 필연적 한 부분으로
들어와서 참 괴롭다.
그러나 그 인간의 본성에 반(反)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축제로 즐기며
승화시키는 서양 사람들의 기지(機智)는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일 수도 있다.
외국의 무덤은 참 평화롭다.
마을에 있고 집 가까이 있어 늘 공원처럼
돌아볼 수 있다.
사실 무덤에서 귀신들이 나올지 모르지만,
가장 조용한 곳이 무덤이다.
사람 사는 곳에는 자신의 몸 한덩어리
끌고 가는 것도 쉽지 않고
더군다나 같은 목적과 뜻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함께 걸어 간다는 게
쉽지 않아 늘 문제가 있기 마련이어서
평화롭지 못한 공동체가 많다.
언젠가 다들 이렇게 무덤으로 갈 텐데도
그리고 죽으면 가지고 갈 것이
하나도 없기에 우리가 관에 들어가기
전에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는데도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아웅다웅
싸우고 그러는지 한심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무덤이 너무
가까이 있다보니 죽음을 당연시 여기며
한번밖에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성이 결여 되어 사는 것도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많은 천주교 성직자 묘지 입구에 보면,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 Today me, Tomorrow you;
오늘은 내게, 내일은 네게)라고 쓰여
있어서 무덤 속의 앞서간 영혼들이
지금 자신은 이 죽음과 무관하다며
무덤 곁을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좀 더 죽음에 대해
깊이있고 진지하게 묵상해 보라고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서양에는 이렇게
무덤이 너무나 마을에 가까이 있어서
아무런 느낌이 없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의
동의와 협력과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다.
인생사 모든 일에 자신의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동의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지만,
태어남(生)과 죽음(死)의 문제만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 밖에 놓여져
있어 우리는 이것을
운명(Destiny)이라고 한다.
이 운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분이 나밖에
그리고 나를 낳아주신 도구 역할을 하신
나의 부모 밖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절대자 하느님으로 인정하면
나는 종교인이 되고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받아들였다 해도
우리네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다.
이번에 미국의 보스톤, 버지니아 웰링톤,
메릴댄드, 시카고 등등을 다니면서
마치 교회사 안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을 부정했던
펠라지우스주의(Pelagianismus)를
신봉하는 듯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많지 않은가에 대해 생각했다.
펠라지우스(Pelagius)는
원죄와 유아세례를 부정하며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력으로 실행할
능력이 있으므로 구령(救靈; 영혼구원)도
신앙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이단이다.
그만큼 이 시대의 사람들은 특히
좀 배웠다는 자들은 자아가 강하고
교만해서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해
하느님의 도움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잘 나서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과학적 합리주의,
실증주의 사고에 빠져서 관찰, 실험,
검증에 의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사실(Fact)로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영이신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께 돌려야 할 마음의 정을
하느님 대신에 온통 사람이나
피조물에게 다 쏟아 버리고 만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 자신을 통해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인간 자신이
다 차지해 버린다.
그만큼 이러한 극도의 인본주의인
세속화와 성경 말씀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겉으로 지성으로는 하느님이
계시다고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구체적인 자신의 삶 가운데서는
실천적이고도 고의적인 무신론자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이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세상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필요없고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도 필요없고
계명을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자신이 하느님이고, 자신은
자기 양심대로 살면 그뿐인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의 은덕을
모르듯이 하느님의 것을 자신의 것인양
착각하고 망상하는
인간 교만의 극치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근거이고
목적이신 분을 모르고
자신의 영혼 육신생명의 참부모이신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의 생명과 능력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을 무시하고 사는 자의 결과는
강건너 불보듯 뻔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 세상, 7~80년 살다가 가는 이 인생이
인간의 자유를 시험하는 기간이며,
잘한 것에는 상급이 잘못한 것에는
벌이 따른다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교리가
하느님의 공의(公義)에서 나오며
심판이 있다는 사실과
천국, 연옥,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죽는
순간 즉시 알게 될 터인데
참으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처럼
그때에는 이미 늦어서 부자가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라자로가
있는 곳에는 결코 올 수가 없는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
봄에 새싹을 피우듯이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자연의 순리와
법칙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분께로 와서 그분께로 가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표현대로
이 지상에 소풍왔다가 그분께로 가서
이 지상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셈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장례미사 때마다 그렇게 긴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 심판의 척도인
사랑(애덕)의 실천에 관한 말씀이,
영원한 운명에 관한 양과 염소에 관한
말씀이 그 자리에 참석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울리는
꽹과리로 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섬짓섬짓 할 때가 많았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하느님 대전에 단독자인 우리들은
그 누구도 나 대신에
나의 생을 살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남은 달력 한장, 바람에 뒹굴며
발에 밟히는 낙엽들을 보면서
11월 위령성월에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하고 피정하는 마음으로
미리미리 죽음을 잘 준비하면 좋겠다.
미리 써보는 유언장,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연습,
주님께서 부르실 때 "할렐루야"하고
기쁘게 갈 수 있는 영육의 준비가
필요한 시기가
바로 은총의 위령성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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